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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88화 (978/1,794)

템빨 52권 - 14화

“....!?”

쇄도해오는 펜릴을 목도한 아그너스가 흠칫 놀랐다.

상대방의 강함을 간파한 것이다.

펜릴이 몸에 두른 혈기(血氣)에 스치기만 해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뱀파이어?’

쩌어어엉-!

데스나이트가 나타나 펜릴에 맞섰다.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는 각자의 시대를 풍미했던 존재들.

하이랭커를 압살함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도 충분히 딜탱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펜릴 앞에선 무력했다.

콰작-!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을 낚아챈 펜릴이 단지 악력만으로 그것에 균열을 일으켰다.

비틀, 휘청거린 데스나이트가 휘두른 검이 펜릴의 가슴을 베었지만 펜릴의 수도가 한 발 앞서 데스나이트의 갈비를 관통했다. 위력을 잃은 데스나이트의 검은 펜릴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퍼펑-!

혈류의 기둥이 솟구쳐 금이 간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을 완전히 부셔버렸고, 데스나이트는 머리를 잃은 상태로도 펜릴에게 저항했지만 눈 먼 검에 맞아줄 펜릴이 아니었다. 녀석을 손쉽게 뿌리친 펜릴이 다시금 아그너스에게 도약했다.

하지만 또 새로운 데스나이트가 나타나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저항은 무의미하니 귀찮게 굴지마라.”

펜릴이 외쳤다.

그를 무시한 아그너스는 뒤늦게 알림창을 살피고 있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 마주하였습니다.]

[뱀파이어 후작 펜릴과 마주하였습니다.]

....

...

“.....”

이제 보니 개구리의 선견지명이 무척 뛰어났다.

놈이 말한 추방자의 후손들과 이렇게 곧바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하필 지금....

꽈드득, 이를 간 아그너스가 마리로즈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검은 것은 이미 너희들이 사냥한 거냐?”

검은 것.

다크 엘프 베니야루는 무척 강하다.

레벨은 500에 육박했고 궁술, 암습, 정령술, 흑마술 모든 분야에 능통했다. 특히 공격력이 발달해 일반적인 엘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아그너스가 7번이나 패배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이들은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펜릴 하나만 해도 그녀와 수준이 비슷했고, 마리로즈는 펜릴보다 몇 배 이상 강할 게 분명했기에.

더군다나 저 ‘지크프렉터’라는 놈도 심상치 않아보였다.

“대답해. 검은 것을 죽였느냐고 물었다.”

재차 묻는 아그너스의 눈빛이 혼란과 분노로 물들었다.

연인을 부활시키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

그것이 증발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는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목이 찢어질 때까지 소리치며 세상 전체를 때려 부수고 싶었다.

“왜....! 왜 너희가....! 크아아아아!!”

급기야 이성을 잃은 아그너스가 모든 데스나이트를 동시에 소환, 그들과 함께 마리로즈에게 달려들었다.

승산이 전혀 없음을 알고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용감해서가 아니다.

단지,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죽어! 죽어!! 죽어엇!!”

힘의 안배는 없었다.

아그너스는 정말 모든 스킬을 동원해서 마리로즈에게 총공세를 날렸다.

하지만 도중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

문득 정신을 차린 아그너스는 자신의 사지가 구속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거미줄처럼 펼쳐진 혈류의 가시가 아그너스는 물론이고 그의 데스나이트들까지 꽁꽁 묶어 결박시켜놓고 있었다.

“바알의 계약자가 고작 이 정도야? 교황도 그렇고, 이 시대는 수준이 낮네.”

혈류의 가시를 일으킨 장본인.

마리로즈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그너스를 응시했다.

이런 하찮은 녀석을 해친다고 해봤자 바알에게 복수가 될까?

바알은 눈 하나 깜빡 안 할 것 같은데?

그런 의문이 생겼지만, 마리로즈는 펜릴에게 눈짓했다.

“끝내. 바알에게 조금은 타격이 되겠지.”

야탄과 대악마를 멸하는 것.

염원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에 대한 최소의 의리다.

어머니를 지옥으로부터 추방시킨 그들을 굳이 찾아다니면서 복수할 생각은 없지만, 복수의 기회를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다.

푸욱-!!

마리로즈의 명령을 받든 펜릴이 아그너스의 가슴에 손을 쑤셔 박았다.

“쿨럭....!”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아그너스의 허리가 크게 꺾였다.

가죽과 살이 파헤쳐지고, 내장과 뼈가 끄집어내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힘 있는 자들에게 유린당하는 연인을 돕지 못한 채 그저 울부짖었던 과거의 나.

힘 있는 자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

똑같다.

지독히도 무력하다.

변하겠노라 다짐해놓고도 결국 변하지 못했다.

“끄....! 큭큭....! 킥! 킥킥킥....!”

연인을 부활시키는 방법을 알게 됐다.

이제 엘프 한 마리만 사냥하면 된다.

오직 그 일념만을 품었던 최근의 아그너스가 잃었던 광기를 되찾았다.

“캬하핫....! 켁!”

“....!?”

아그너스의 심장을 뿌리 채 뽑아내고 있던 펜릴이 움찔 놀랐다.

아그너스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린다 싶더니 혀를 깨물고 자결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쏴아아아아아-

아그너스의 육신이 빠르게 풍화했다.

피가 증발하더니 가죽과 살의 일부가 썩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약간의 살점과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이 혈류의 가시에 꿰인 채 덜렁거렸다.

“같잖은 수를!”

심장을 지키겠답시고 자결해 스스로를 언데드화 시키다니?

산 채로 심장이 뽑혀나가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게 놀랍다.

뻐억-!

치솟는 화를 감당 못한 펜릴의 팔꿈치가 반밖에 남지 않은 얼굴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그너스의 두개골을 내리찍었고,

“....킥킥.”

아그너스는 웃었다.

리치 무무드가 그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었다.

“시간을 벌어.”

쩌어억-

아그너스가 명령하자 무무드가 아가리를 벌렸다.

고작 리치 따위가 발악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콧방귀 뀐 펜릴은 무무드를 무시했지만 마리로즈의 표정은 굳고 있었다.

퍼어어어어어엉-!

무지갯빛의 마력이 폭사했다.

처음으로 유의미한 상처를 입은 펜릴이 피를 토했고, 아그너스와 데스나이트를 구속하고 있던 혈류의 가시가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놀라운 마력이군.”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의 감탄사가 숲의 혼란에 스며든다.

펜릴의 비명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마리로즈의 시선은 무무드에 고정됐다.

“살아생전에 무엇을 하던 녀석이지?”

마리로즈조차도 무무드의 마력에 놀라고 있었다.

살아생전 브라함을 초월했던 천재 마법사의 위용이라는 것이다.

그래봤자 이미 죽은 자.

마리로즈 앞에선 무력했지만.

따악-

마리로즈가 손가락을 퉁기자.

퍼퍼퍼퍼펑-!

혈류의 덩어리가 날아가 무무드와 데스나이트들을 폭파시켰다.

마침.

“지크프렉터!!”

뒤늦게 숲에 도착한 지발이 화마 속에 서있는 지크프렉터를 발견하고 소리쳐왔다.

그는 지크프렉터가 마리로즈에게 화를 입었다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마음이 무척 급했다.

“괜찮....?”

지발에게 대꾸해주려던 지크프렉터가 갑자기 석상처럼 굳었다.

늘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들어찬 채 하얗게 질렸다.

여유로 점철되어 있던 마리로즈도, 수치심에 이를 갈던 펜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 모두 아그너스의 손에 들려있는 한 권의 책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그것은 어떤 신의 원죄를 서술한 고서.

시조 베리아체와 6악 지크를 나태의 죄에 물들게 만든 원흉이었다.

“나태의 서....!”

펜릴과 지크프렉터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아그너스는 책을 펼치고 있었다.

“키햐하하핫!!”

광소가 숲을 격동시켰다.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온 정신력으로 나태를 간신히 외면하고 있던 마리로즈, 펜릴, 지크프렉터가 동시에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만사가 귀찮아. 잠이나 자야.... 드르렁.”

이미 포기한 펜릴은 벌써 코를 골기 시작했고,

“바알의 준비성이 대단하군....”

지크프렉터는 허벅지에 단도를 꽂아가며 눈꺼풀이 닫히려하는 것을 참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마리로즈는 마법을 발동 중이었다.

“나누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구나.”

스파앗-!

마리로즈의 마법이 전개되며 그녀와 펜릴이 숲에서 사라졌다.

상식에 위반될 정도로 빠른 전이마법이었다.

아그너스의 붉게 충혈 된 눈이 홀로 남은 지크프렉터에게 돌아갔다.

“킥, 킥킥킥.... 사지를 토막 내서 죽여주마.”

“.....”

본래라면 콧방귀도 안 나왔을 선언이다.

하지만 나태의 저주는 무섭다.

먼 옛날, 일곱 선인이던 시절의 지크는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료들을 외면하는 죄악을 범했다. 신들과의 전쟁에서 피눈물을 흘려가며 죽어가는 동료들을 돕지 않고 홀로 잠에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급기야 졸기 시작하는 지크프렉터에게 아그너스가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다가섰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에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의 앞을.

“그만 둬라.”

땀에 흠뻑 젖은 지발이 막아섰다.

동시에 지크프렉터가 잠에 빠졌다.

그를 힐끗 확인한 지발이 아그너스에게 단언해보였다.

“이자는 지금 죽어선 안 돼. 이자가 네게 어떤 실수를 범했는진 모르겠지만 한 번만 넘어가줘라.”

아그너스를 바라보는 지발의 눈빛에는 동정심이 가득했다.

그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아그너스의 과거를.

아그너스가 품고 있는 상처를.

“큭.... 큭큭....”

실소하는 아그너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지발이 보내오는 시선.

아그너스는 그런 시선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기에.

“너부터 죽어.”

채애애애앵-!

아그너스의 검과 지발의 검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그너스는 지쳤고, 지발은 마장기 소환 스킬을 소모한 입장.

둘 모두 온전치 못한 상태로, 아무런 목격자도 없는 고요한 숲에서 매가리 없는 전투를 펼쳤다.

“아그너스!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냐! 지금 우리들의 상태론 승부를 맺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닥쳐! 닥쳐어!!”

“제길! 제발 좀 진정하라고, 이 미친 개새끼야!”

“캬아아아악!!”

“히이익!”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 지발은 아그너스가 무서웠다.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 좀비 같은 모습으로 덤벼왔으니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적기사들이 어서 바깥 상황을 정리하고 달려와 주길 바랄 뿐이었다.

바로 그때.

“토네이도.”

퍼어어어어엉-!

강력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그너스와 지발을 해치려는 의도가 담긴 마법은 아니었다.

그 마법은 단지 아그너스와 지발 두 사람이 서로 떨어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

아그너스와 지발의 시선이 마법의 발현지로 돌아갔다.

금발의 소녀가 보였다.

“그만.... 그만 둬요.”

슬픈 표정으로 말하는 소녀.

그녀의 이름은 유페미나였다.

“너, 왜 자꾸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그너스가 소리치다가 입을 다물었다.

푸욱-!

갑자기 날아온 한 발의 화살.

그것이 유페미나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기에.

“아....”

아그너스는 뭔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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