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13화
지발은 에단 황자를 섬겼었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를 시살하고 자신 역시 처형당한 반역자 에단 말이다.
사람들은 지발이 당연히 제국에서 쫓겨났을 줄 알았다.
한데 적기사단과 행동을 함께하다니?
반역자의 부하가 여전히 황실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연좌제로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입장이셨을 텐데....? 저 대단한 제국조차도 그쪽의 능력을 높이 사는 모양이네요?”
제국 황실은 그랜드 마스터와 얽힌 이야기들을 세상에 공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지 에단 황자가 반역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황제가 교체됐다고만 알고 있었다.
야탄교 또한 마찬가지다. 빌어먹을 에단이 도중부터 교류를 차단한 까닭에 자세한 내막을 파악하지 못했다.
야탄교 신도들은 눈앞의 적기사단이 당연히 제국 소속인 줄 알았다.
“새로운 황제는 세계의 화합을 이루겠노라 천명하지 않았던가요? 일방적인 군사개입은 없을 거라고 약조한 것으로 아는데 뒤에서는 무력을 위시해 타국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으니 제국은 이전과 바뀐 것이 없군요. 도리어 더 음흉해졌어요. 본교와 크게 다를 바 없달까? 이참에 본교를 국교로 삼는 게 어때요?”
로제는 여유가 있었다.
전국 각지의 야탄교 신도들이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는 바.
끊임없이 증원될 병력과 함께라면 적기사단쯤 쉽게 돌파하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황제와 제국을 욕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여기서는 물러나줘야겠다.”
연신 떠드는 로제에게 한 기사가 검을 겨눴다.
그녀의 이름은 수잔.
상당히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으나, 안타깝게도 이마에 큰 상처가 있는 여기사였다.
“어머...? 반응이 이상하군요? 황제와 조국을 향한 적기사단의 충성심은 바다와 같이 깊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나요?”
“야탄 따위나 섬기는 오물이 나와 언제까지 말을 섞을 심산이지? 어서 발길을 돌리거나 죽어라.”
“이마의 흉터만큼이나 흉측한 말투네요. 못 배워먹은 티가 나요.”
“죽음을 선택한 거지?”
스파앙-!
수잔이 직선으로 검을 뻗었다.
어지간한 랭커는 반응조차 못할 정도의 쾌검이었지만 로제는 충분히 반응하고 다이아몬드 실드를 펼쳤다.
로제는 최상급 랭커이기도 했고, 금색으로 빛나는 수잔의 이름을 목도한 순간부터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잔의 실력이 로제의 예상보다 위였다.
‘다이아몬드 실드를 일격에 파괴한다고?’
실드를 산산조각 낸 수잔의 검.
짧게 회수되었다가 다시 쏘아지는 그것은 전보다 더 빠른 쾌속을 담고 있었다.
이번엔 막기 힘들다고 판단한 로제가 고통에 대비해 이를 악 무는 순간.
쩌엉-!
로제의 곁에 잠자코 서있던 프로도가 창을 휘둘러 수잔의 검을 막았다.
“네겐 상성이 나쁜 상대다. 후방으로 물러나서 엄호해라.”
“알았어요.”
“오물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채챙-! 채채채채챙!!
수잔이 더욱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계획은 눈앞 야탄의 신도들을 일거에 소탕하는 것이었지만 의외로 쉽지가 않았다.
프로도의 창술이 대단히 수준 높았다.
“종?”
“그렇다. 너는 솔로 넘버로군.”
콰쾅-!
쿠콰콰콰쾅!!
전투가 전쟁 규모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로제를 비롯한 수천 명의 야탄교 신도들이 흑마술을 전개해 프로도를 엄호했고, 적기사들은 수잔이 시간을 버는 동안 야탄교 진형으로 돌진해 신도들을 학살했다.
고작 20명 대 수천 명의 싸움이었지만 호각지세를 이루는 형국이 적기사단의 높은 명성을 납득시켰다.
‘아니, 듣던 것 이상인데?’
로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적기사들이 검술의 달인일 뿐만 아니라 마법까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발동 속도가 무척 빠른 보호 마법과 버프 마법들 위주였기 때문에 흑마술을 쉽게 무력화시켰다.
‘적기사가 왜 마법을? 더군다나 처음 보는 마법들인데?’
로제가 조금 더 후방으로 물러났다.
눈치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인물답게 그녀의 판단력은 무척 훌륭한 것이었다.
‘평균적인 실력 차이가 너무 커.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병력의 반 이상을 잃을 거야.’
적기사들과 지발이 말하는 ‘주인’의 정체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만약 저들의 주인이 칠공작급 이상의 거물이라면 원군이 도착할지라도 승산이 적어진다.
그리고 간과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저들의 주인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마리로즈라면?’
만에 하나 그들이 협력 관계를 맺는다면?
야탄교는 적기사단과 마리로즈에게 협공을 당하고 궤멸하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로제가 플라이 마법을 전개했다.
그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퀘스트?
그냥 포기다.
대악마를 소환한 대가로 얻은 아이템을 무장한 그녀 입장에서 죽음은 반드시 피해야하는 최악의 변수였으니까.
‘어쩐지 예감이 안 좋더라니. 쯧, 괜히 시간만 버렸네.’
로제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프로도와 다른 신도들이 적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만큼 그녀는 무사히 퇴각할 자신이 있었다.
오판이었다.
콰아아앙-!
“컥....!”
뭐에 맞은 거지?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등 전체를 덮쳐오는 충격을 감당 못하고 지면에 처박힌 로제가 격심한 혼란에 빠졌다. 땅에 깊숙이 얼굴을 묻은 그녀의 시야가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고오오오오오─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온다.
산이라도 다가오는가 싶다.
“....무슨....”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혼란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로제가 덜덜 떨리는 목에 간신히 힘을 줘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자신의 몸과 대지를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기둥과, 그것을 아주 천천히 뽑아내고 있는 백색 거신의 모습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지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을 회수하는 마장기 레이더스의 어깨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그가 로제에게 손가락을 겨누고 있었다.
“바로 너처럼 이기적인 놈이야.”
“끅.... 쿨럭....”
“네가 브누아 황자를 도와서 대악마를 소환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는지 알아?”
“궤변....이네요. 저는 단지 퀘스트를.... 쿨럭, 쿨럭. 진행했을 뿐이에요. 대악마의 출현은 필연적인 스토리. 쿨럭. 제가 아니었어도 결국 다른 누군가가.... 쿨럭, 쿨럭. 같은 일을 벌였을 거라고요.”
“맞아. 그랬겠지. 하지만 그 다른 누군가도 너처럼 철면피였을까?”
“....?”
“템빨단이 너를 척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방송에 나와서 눈물로 호소하던 네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었다.”
“무슨....”
“쥐 죽은 듯이 있었어야지. 너로 인해서 죽거나 소중한 것을 잃었던 수백, 수천 만 명의 사람들에게 눈곱만큼의 죄책감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네 고통을 호소하지 말았어야지.”
“당신 미쳤어요? 나는 단지 퀘스트를 진행했을 뿐이라니까요?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하죠? 그리고 나도 사람이에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소연할 수 있는 권리쯤 있다고요.”
몰래 물약을 복용한 로제가 슬그머니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초를 세고 있었다.
지발의 마장기가 가동을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발이 치를 떨었다.
“네 퀘스트 때문에 죽은 사람들도 억울한 일을 당한 거라고. 그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거냐?”
“아.... 그랬군요. 그것 참 마음이 아프네요는 무슨. 알게 뭐야? 죽은 자들의 고통? 정말 소름 돋는군요. 고작 게임 따위에 너무 과몰입하는 거 아닌가요? 오타쿠세요?”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제의 입 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지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단지 마장기 때문.
마장기 없는 지발 따위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지발의 마장기는 가동 한계 시간데 도달해 있었다.
“블랙홀!”
로제의 궁극기가 전개됐다.
범위 내 모든 대상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입히는 것은 물론이고 다섯 종류 이상의 디버프를 동시에 거는 최강의 흑마법이었다.
꽈과과과과곽-!
로제가 지정한 공간 전체가 종잇장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발이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토해낼 지발의 모습을 상상하는 로제였으나....
서걱-!!
“....!?”
백색 거신.
마장기 레이더스가 창을 휘둘러 블랙홀을 양단해버렸다.
넋 나간 표정을 짓는 로제를 지발이 비웃어주었다.
“아직도 조루일 줄 알았어?”
에단이 죽었던 그날.
얼떨결에 그랜드 마스터 일행과 함께 황궁을 탈출했던 지발은 그랜드 마스터에게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수락했다.
세계관을 통틀어 가장 큰 기연을 놓칠 순 없던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지발은 그랜드 마스터의 도움을 받아 발전했다.
“자, 잠시만요. 사실은 저도 슬퍼요. 저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늘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요. 다만 부끄러워서 솔직히 말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사색이 된 로제가 소리쳤다. 그녀는 정말로 슬픈 표정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레이더스의 창이 로제의 몸을 다시 한 번 관통했고, 그녀는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마침.
퍼어어어어어어어엉─!!
숲이 있는 방향에서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화기와 마기가 뒤섞인 폭발이 숲의 절반 이상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지발의 얼굴이 굳었다.
‘대화가 잘 안 풀린 건가?’
스스로를 칠악성의 화신이라고 밝힌 그랜드 마스터 지크프렉터는 지발에게 많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목적은 ‘쫓겨난 신들’을 만나 ‘타락한 신’들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이며, 그것은 타락한 신들과 대악마 모두가 싫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들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모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깨어난 것이다.
지크프렉터는 마리로즈에게 큰 기대를 품었다.
대악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그녀의 힘을 빌려 협력할 수만 있다면 목적을 이룰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그녀의 행적을 쫓아 이곳에 도달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악한 마족인 마리로즈가 과연 지크프렉터에게 협력할까?
지발은 의심했었는데 역시나였다.
수잔의 외침이 들려왔다.
“지발!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마스터를 도우러 가라!”
“이런 빌어먹을.”
왜 하필 가장 약한 나를 보내는 거야?
난이도가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은 히든 퀘스트가 떠오르자 혀를 내두른 지발이 급히 숲속으로 달려갔다.
***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숲을 침식해나간다.
충격파로 벌거벗은 숲의 중심에 세 사람이 있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 후작 펜릴, 그리고 그랜드 마스터 지크프렉터였다.
마리로즈의 홍옥 같은 눈동자가 지크프렉터를 빤히 주시했다.
“그대는 굉장히 강하구나. 그대를 보고 있자니 크레이슐러가 떠오를 지경이야.”
“그자와는 조금 다르다. 내 육신은 비록 인간이나 영혼은 인간이 아니니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구나. 아주 고약한 말버릇이네.”
“나는 칠악성의 화신.”
“....?”
“나태의 죄로 물든 6악 지크의 영혼이 윤회 끝에 도달한 모습이 바로 지금의 나다.”
“.....”
“나는 타락한 신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결탁했던 대악마들에게 복수하기를 꿈꾼다. 우리들 일곱 선인을 죄로 물들인 신들을 끌어내리고 모든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나의 숙원이다.”
“이봐, 헛소리하지 마라.”
펜릴이 끼어들었다.
그는 지크프렉터의 말이 너무 허무맹랑해서 거짓말 같았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를 무시한 지크프렉터가 오직 마리로즈를 응시한 채 말해나갔다.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쫓겨난 신들의 행방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행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럼 그곳을 조사하면 되겠네.”
“그렇다. 하지만 여러 방해가 들어와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쉽지가 않아. 신에게 호의를 얻어 그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인물. 혹은 대악마를 압도하는 힘을 지닌 인물의 협조가 필요하다.”
“후자가 나로구나.”
마리로즈가 흥미를 보였다.
그녀는 지크프렉터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질문했다.
“그럼 전자에 속하는 인물도 실존하는 것이냐?”
“그렇다.”
“그게 누구지?”
“그건....”
대답하려던 지크프렉터가 입을 다물었다.
마리로즈와 펜릴의 시선 또한 이미 다른 방향으로 향해있었다.
하늘에 검은 포탈이 열리고 있었다.
지옥의 냄새가 흘러나오는 포탈이었다.
지옥과 인계를 잇는 지옥문의 출현이었다.
펜릴이 격하게 반응했다.
지옥문을 자유자재로 열 수 있는 존재는 지옥 전체를 통틀어도 흔치 않았으니까.
한 자릿수 대악마도 쉽게 해내지 못할 일을 도대체 누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알...!!”
지옥의 절대 군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증오의 대상을 펜릴이 입에 담자 마리로즈와 지크프렉터 둘 모두 표정을 굳혔다.
급기야 완전히 개방되는 지옥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그들이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할 때였다.
“너희들은 뭐야?”
지옥문에서 녹발의 사내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아그너스의 등장이었다.
마리로즈, 펜릴, 지크프렉터의 면면을 대충 한 번 훑어 본 그가 으르렁거렸다.
“검은 것은 어디로 갔지? 사지를 찢어 죽이기 전에 어서 말해.”
“....바알의 계약자?”
마리로즈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잠에서 깨어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바알의 계약자였으니까.
“펜릴, 놈의 심장을 뽑아서 바알의 각인을 지워.”
같은 시각,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어머님께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대현자 스틱세이가 그리드를 찾아와 말했다.
스틱세이의 나이를 알고 있는 그리드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셨어?”
“.....”
“세계수 말입니다, 세계수.”
할 말을 잃는 스틱세이를 대신해서 라우엘이 설명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