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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86화 (976/1,794)

템빨 52권 - 12화

샤이, 스니퍼, 커브.

악명 높은 PK 3인방인 그들은 몇 번이나 그리드를 해치려고 시도한 바 있다.

한데 재미있게도, 그리드는 그들에게 은근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 빼앗은 아이템 덕분에 교황 드레비고와의 싸움에서 선전할 수 있었고, 최강의 어쌔신 카심을 얻었으며, 제국과의 전쟁에선 직접적인 도움까지 받았으니까.

행운을 물어오는 파랑새라고 할까.

지극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샤이 일당의 도전은 그리드에게 늘 이롭게 작용해온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마리로즈와의 만남이었다.

샤이 일당의 함정에 빠져 마리로즈의 봉인처에 입장했던 그리드는 의도치 않게 마리로즈의 봉인을 풀어버렸고 마리로즈에게 눈도장이 찍혔다.

그리고 그리드는 그것을 ‘악연’으로 간주했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마족.

레베카 교단이 사활을 걸고 봉인해야만 했던 악당에게 눈도장이 찍혀봤자 좋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와의 만남은 언젠가 반드시 해롭게 작용할 것이다....

그리드는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마족이 사악한 것은 아니며, 뱀파이어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레베카 교단은커녕 레베카 여신부터가 무조건 정의롭고 신성한 것이 아님을.

여러 인연과 사건을 통해서 그리드는 알게 되었으니까.

“킁킁. 킁킁킁.”

마리로즈가 말한 그리운 냄새의 정체는 나의 체취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그리드가 자신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면서 생각했다.

‘마리로즈는 내게 호의를 품고 있다. 내가 봉인에서 풀어줬으니 은혜를 갚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브라함과 놀을 포함한 여러 직계들을 만나며 알게 된 사실은, 직계가 의외로 순수하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는 만큼 인간에게는 잔학한 면이 있었지만 그것은 생리에 불과할 뿐.

성격 자체가 사악하거나 괴팍하다고 보긴 어렵다.

또한, 기본적으로 직계는 악신 야탄과 대악마들을 증오했다.

시조 베리아체가 그들로 인해 추방당하고 뱀파이어 전체가 나태의 저주를 받았으니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그리드는 확신했다.

‘네펠리나의 우려와 달리 마리로즈를 적대할 상황은 오지 않을 거야. 도리어 그녀는 우군이 될 확률이 높아.’

그게 개연성에도 맞다.

마리로즈와 적대하는 순간 템빨국은 며칠 내로 멸망할 테니까.

마리로즈의 강함은 상위 대악마아와 비견될 수준.

차라리 우군으로 적합하다.

“땀 냄새가 너무 심한데요. 안 씻으십니까?”

오늘의 대장일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그리드.

겨드랑이에 코를 박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목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코를 막고 있는 라우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씻어서 냄새가 날아가면 마리로즈가 나를 못 알아볼까봐.”

“흐음.... 마리로즈가 그리워하는 냄새가 과연 정말로 전하의 냄새일까요?”

“....?”

“마리로즈와 만날 당시 전하께서는 말락서스의 망토를 입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깨어난 이유도 망토에 배어있는 혈향 때문이었고요.”

“.....”

“그 짙은 혈향에 가려져있었을 전하의 체취를 그녀가 그리워한다는 건 다소 억지 같습니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냄새는 전하의 체취가 아니라 말락서스의 망토에 배어있는 혈향일 테죠.”

일리가 있다.

그럼, 마리로즈가 은인으로 여기며 호감을 품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말락서스의 망토인 셈인가?

그리드가 당황하자 라우엘이 후훗 웃었다.

“농담입니다. 전하께서 말락서스의 망토를 입는 건 사냥터에서 몹몰이를 할 때뿐이잖습니까? 데미안 님과 제드노스 님의 몸에 배인 그리운 냄새란 당연히 전하의 체취를 뜻하는 게 맞겠죠.”

“이런 젠장. 식겁했잖아. 왜 안 어울리게 농담이야?”

“경각심을 심어드리기 위함이지요. 마리로즈를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라고요.”

“....?”

“너무 거대한 존재입니다. 감당할 수 없어요. 전하께서는 그녀와 얽히는 일 자체가 없어야 좋을 겁니다.”

의외다.

마리로즈의 등장에 누구보다 들뜰 사람이 라우엘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부정적일 이유가 있어? 처음엔 적이었던 브라함과 놀조차도 지금은 우리의 동료가 된 상황이야. 반면 마리로즈는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이고 있으니 쉽게 동료가 돼줄 것 같은데?”

“브라함과 놀은 결여되어 있었죠.”

“....?”

“그들은 강하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무의식중에 의지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전하의 배려와 애정이 통하는 대상이었던 것이죠. 반면 마리로즈는 어떻습니까? 브라함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완전한 존재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아쉬울 게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애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가 추측하기로 그녀가 전하께 보이는 호의는 호감보다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일 겁니다. 자신의 봉인을 풀었을 뿐더러 매혹에도 걸리지 않았으니 제법 신기한 인간이다, 라는 느낌으로 전하를 인지하고 있겠죠.”

“....”

“그녀가 전하와 조우하고 전하께 품었던 호기심을 해소하는 순간 호의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곧바로 돌변하겠죠. 전하를 그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어요.”

“아니, 그건 너무 극단적....”

“그녀가 펜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제드노스의 증언을 토대로 생각해봤습니다. 그녀는 타인을 배려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아요. 잔인하고 난폭한 여성입니다.”

“.....”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몰되지 마시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여태까지 전하께서 만나왔던 다른 직계들과 다릅니다. 요행을 바랄 상대가 아니에요.”

요행.

그리드는 그 말이 크게 와 닿았다.

브라함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놀을 동료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행운 덕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잘 알아들었어.”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몸에 밴 땀 냄새가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비누로 온 몸을 빡빡 문지른 다음 물로 몇 번이나 헹궜다.

체취를 지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라우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리로즈가 숲으로 이동한 의도는 엘프와 만나기 위함일 터.’

고작 소꿉놀이나 하자고 엘프를 만나는 건 아닐 것이다.

애초에 마족과 엘프는 서로에게 반감을 느끼므로 마리로즈는 엘프와 충돌할 공산이 컸다.

‘난감하군.’

라우엘은 엘프를 유용한 정치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보가 템빨국과 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게 손실을 끼치고 있었으니 엘프들의 활동을 지지해주고 싶은 것이 라우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한데 마리로즈가 엘프들의 행보에 초를 치게 생긴 것이다.

라우엘은 간절히 바랐다.

‘하늘에서 대악마라도 떨어지게 해주세요.’

마리로즈의 시선을 끌 정도의 대사건이 발생하기를.

***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마계 군주의 자격을 갖춘 당신은 죽음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생명력이 최소치로 고정되며 죽지 않습니다. 종족이 언데드로 변합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른쪽 팔이 부러졌습니다!]

“빌어먹을 것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왼쪽 발목이 부러졌습니다!]

“빌어먹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목이 돌아갔습니다!]

“빌어먹....!”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두개골이 박살났습니다!]

언데드는 죽음과 고통을 초월하는 종족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신체 내구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

파손에 대한 면역이 매우 떨어진다.

[신체가 완전히 손상되어 기능이 정지됩니다.]

[당신의 영혼이 바알의 안식처에 보관 중인 새로운 육신으로 전송됩니다.]

[전송 과정에서 영혼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38.1퍼센트의 경험치를 잃었습니다.]

[아이템 <섭혼의 망토>를 잃었습니다.]

“빌어먹을!!”

벌써 나흘째, 매일 죽고 있다.

심지어 어제까진 하루 2번씩 사망하고 접속 제한 페널티까지 얻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그너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새로운 육신으로 부활한 그가 배양실을 뛰쳐나와 다시 인계로 향하는 포탈을 여는 그때.

“한심하도다. 위대하신 바알 전하께 그토록 많은 힘을 얻고도 고작 엘프 한 마리 감당 못하는 게냐. 인간의 나약한 천성은 어딜 가지 않는구나.”

누군가의 조롱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꽈득, 이를 간 아그너스가 고개를 돌리자 왕관을 쓴 커다란 개구리가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생김새.

하지만 <체파르데아>라는 녀석의 이름은 흑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많은 힘을 줘? 고작 사령술이나 알려준 주제에 생색내지 말라고 전해라.”

체파르데아는 바알의 4천왕 중 하나.

혓바닥 한 번만 슬쩍 내밀어도 아그너스를 죽일 수 있는 지옥의 최강자 중 하나다.

하지만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아그너스는 체파르데아에게 겁먹지 않고 도리어 으르렁거렸다.

웃기지도 않는 촌극에 개굴, 개굴, 울음을 토해낸 체파르데아가 턱을 부풀렸다.

“네가 무능하기 때문이다. 본래 바알 전하와 계약하는 자는 절대적인 검술과 마법, 그리고 만물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얻게 마련이건만 네놈은 역량이 부족해 그 축복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지.”

“비린내 나니까 닥쳐.”

개구리 따위나 상대하면서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어서 인계로 돌아가 다크 엘프에게 재차 도전해야한다.

또 종적을 감춰버리면 찾기 힘들어질 테니.

체파르데아를 무시한 아그너스가 포탈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휘리릭-!

체파르데아의 기다란 혀가 날아와 아그너스의 코앞에 멈췄다.

돌돌말린 혀의 끝에는 낡은 서책 한 권이 매달려 있었다.

“나태의 서다.”

“....?”

“시건방진 추방자의 후손들이 네게 접근할 게야. 그때 그 책을 펼치면 놈들은 꼼짝없이 관짝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지.”

“추방자의 후손?”

“뱀파이어 말이다. 네놈이 엘프에게 짓밟히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당해서야 바알 전하의 체면이 훼손되므로 놈들에겐 결코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알았느냐?”

“흥.”

콧방귀 뀐 아그너스가 나태의 서를 받아 챙겼다. 개구리는 싫었지만 준다는 걸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야탄교 소속 플레이어 전원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다.

잠에서 깨어난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를 다시 봉인하라는 내용의 퀘스트였다.

등급이 SSS+로 표기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난이도의 퀘스트였으나, 야탄교 소속 플레이어의 숫자는 무려 5백만인 바.

퀘스트가 알려주는 행선지로 이동 중인 야탄교 신도들의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퀘스트 등급이 아무리 높아봤자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모인 이상 실패할 리 없다는 게 그들의 확신이었다.

“뱀파이어도 마족이잖아요? 실제로 레베카 교단과도 적대하고 있고요. 그럼 우리와 같은 편 아닌가요? 왜 그녀를 봉인해야하는 거죠?”

흑마술사 랭킹 1위이자 여덟 번째 야탄의 종.

대악마 소환 때마다 개입하여 큰 이익을 취해왔던 플레이어 ‘로제’는 이제 한 손에 꼽히는 강자로 거듭난 상태였다.

템빨왕 그리드를 비롯한 최고 실력자 5명을 제외하면 누구를 상대해도 질 자신이 없을 정도.

로제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던 야탄의 네 번째 종, 프로도였다.

교황청 습격 도중 사망한 실베나스의 후임인 그는 고작 아그너스에게 당한 실베나스보단 훨씬 더 강했다.

“뱀파이어는 추방자 베리아체의 후손. 악신 야탄께 적의를 품고 있는 괘씸한 일족이다. 그들의 수장은 필히 처단함이 옳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레베카 교단이 나설 텐데요? 차라리 레베카 교단이 그녀를 봉인하게끔 유도하는 편이 일거양득 아닌가요?”

“아직까지도 템플러의 지지를 못 받고 있는 현 교황은 반푼이나 다름없지. 놈에게는 마리로즈를 봉인할 능력이 없다.”

“....?”

그 반푼이에게 당한 게 바로 우리입니다만?

이거, 혹시 못 깨는 퀘스트 아니야?

‘세계관의 대격변에 야탄교의 멸망도 포함되는 건가?’

눈치 빠른 로제가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일단 전선에서 이탈해야한다고 판단했지만 공교롭게도 늦고 말았다.

이미 그녀는 커다란 숲 앞에 당도해 있었으니까.

“가자.”

프로도가 로제를 비롯한 야탄교 플레이어들을 재촉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적색 갑주를 무장한 기사들이 나타나 야탄교 신도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적기사단?”

제국의 기사들이 왜 이곳 가우스 왕국령에?

당황하는 야탄교 신도들의 시야로.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적으로 간주하고 처단하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기사단의 중심에 선 사내.

그는 플레이어였고 아이디는 ‘지발’이었다.

로제가 자신보다 위라고 판단하는 5명의 최상위 플레이어 중 하나.

바로 마장기의 주인 말이다.

“당신이 왜....?”

“나의 새로운 주인께서 귀한 손님을 영접하고 계셔서 말이지.”

새로운 주인의 정체가 그랜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지발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레베카교와 야탄교, 그리고 바알의 4천왕과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마리로즈의 출현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물론 그리드에게도....

“낭군님, 오늘따라 향수 냄새가 너무 진하시군요? 마치 다른 여자의 냄새를 지우려고 노력하신 흔적 같아요.”

“아이린, 오해하지 마시오. 여기엔 다 이유가 있소.”

“오해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하께서 수천 명의 첩을 거느린다 하실지언정 존중하고 지지할 테니까요.”

“아니, 어차피 한 달에 한 번밖에 못하는데 무슨 수천 명.... 응? 아이린? 어디 가시오? 아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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