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10화
엘프는 심각한 성비의 불균형을 앓고 있다.
긴 수명이 무색하게도 번식력이 떨어졌고 개체수가 무척 적었다. 지상을 통틀어서 가장 숫자가 적은 종족 중 하나였다.
한데.
“검은 것....?”
“너희의 옛 동료 말이야. 그 타락한 계집의 육체가 필요하다.”
“글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현재 엘프들은 그 적은 숫자로 대륙 전역의 숲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
간단하다.
바로 그들이 최상위 포식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밝혀진 바 있듯이, 엘프는 뱀파이어와 마안족을 넘어서는 상위종이다.
그들이 조화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껏 힘을 휘둘렀다면.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기를 되풀이할 때마다 보복을 가했다면.
“인간이여,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당장 숲에서 나가세요.”
“닥치고 검은 것의 행방이나 불어.”
“사살하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상은 인간과 엘프가 양분했으리라.
스파앗-!
거목 위에 몸을 숨긴 채 침입자를 주시하고 있던 다섯 명의 엘프들.
그들이 재차 경고를 무시하는 침입자에게 활을 쏘았다.
망설임 따위 없었다.
키르라는 인간에게 또 한 번 배신당하고 12테 중 하나가 타락한 사건이 엘프들을 일깨웠으니까.
인간과의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엘프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차라리 인간 위에 군림해 우리의 권리와 자연을 수호하겠노라는 것이 엘프족의 새로운 방침이었다.
“인간은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아요.”
엘프들의 목소리가 숲에 메아리친다.
푸푹-! 푸푸푸푸푸푹!!
이미 수십 발의 화살이 녹발 사내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엘프들의 화살에는 바람의 정령의 가호가 깃들어 있었으니 섬전처럼 빨랐다.
“쿨럭....”
피를 토하는 사내.
그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아그너스>라는 이름이 흔들린다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을 기는 그를 수풀에서 튀어나온 수십 마리의 맹수들이 덮쳤다.
물고, 뜯고, 할퀴는 녀석들에 의해서 아그너스의 살점이 찢겨졌고 뼈가 부러졌으며 내장이 파괴됐다.
콸콸 쏟아지는 피가 숲을 붉게 적셨다.
“돌아간다.”
간단하게 침입자를 처치한 엘프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맹수들을 수습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복귀하려다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프잖아.”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침입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목을 돌려 엘프들을 노려보는 그의 입가가 뒤틀렸다.
“너희들이 나무 위에 숨으면 귀찮단 말이지.”
“당신.... 인간이 아니군요.”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다.
죽음으로서 기회를 만든다는 개념은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진 엘프들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로부터 그들은 강력한 거부감을 느꼈다.
콰르르륵-!
엘프들의 흰 피부와 대조되는 새카만 손들이 땅을 꿰뚫고 나왔다.
아그너스의 시야에 보이는 모든 엘프와 짐승들의 발목을 거머쥔 손들은 생명의 정기를 흡수하며 점차 크게 부풀어 올랐고 더 강한 악력을 발휘했다.
“으.... 끄으윽....”
영원한 젊음을 자랑하는 엘프들이 급격히 노화되기 시작했다. 짐승들은 모든 털이 뽑혀나가며 죽어갔다.
반면 아그너스는 모든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죽음의 손들이 엘프와 짐승들로부터 빼앗은 정기를 아그너스에게 옮겨준 덕분이다.
“수명이 긴만큼 오래 버티는군.”
짐승들과 달리 금방 죽지 않는 버티는 엘프들의 모습이 아그너스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제 완전히 노인이 된 엘프들 앞으로 성큼 다가선 그가 한 백발 엘프의 주름 진 목을 낚아챘다.
“머리색을 보아 그 검은 것과 같은 혈통일 테지. 역시 제대로 찾아왔어.”
“끄.... 끄윽....”
“어서 검은 것의 행방을 말해. 그럼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까.”
“....닥치세요.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그럼 이 숲을 모조리 불태워서 찾아내는 수밖에.”
꾸욱....
그대로 엘프를 목 졸라 죽이는 아그너스의 금안에 광기는 없었다.
꿈을 이루기까지 단 한 걸음만을 남겨놓은 그는 종전과 달리 신중하고 침착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잔인해질 수 있었다.
남은 엘프들을 모조리 척살한 그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숲의 중심부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라, 베니야루.”
다크 엘프.
마기를 받아들인 최초의 엘프.
그녀의 특별한 육신은 생명의 돌과 결합하여 훌륭한 그릇이 될 것이다....
여러 정보를 근거로 확신한 아그너스가 깊은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메마른 손에는 옛 연인의 초상이 들려있었다.
***
[대련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대련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대련에서 패배....]
그리드 덕분에 특성이 강화되고 새로운 무기까지 얻은 테루찬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했다.
근력과 체력이 올려주는 공격력, 방어력, 생명력 계수가 훌쩍 상승했을 뿐더러 마나 소모 없이 발동하는 ‘5연격’과 ‘절단’, 그리고 ‘분쇄’ 스킬까지 얻었으니 약점을 찾기 힘들 정도다.
“와, 진짜 이기기 힘드네.”
탐욕의 증식도 기다릴 겸, 테루찬이 떠나기 전 대련을 신청한 그리드는 연속적인 패배를 겪었다.
불쾌하냐고?
그럴 리가.
그리드는 너무 기뻐서 만세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강의 적은 아군이 되는 순간 약해진다.’라는 빌어먹을 게임공식이 최초로 깨졌으니까.
그리드는 새로운 동료 테루찬의 뛰어난 실력이 너무 반갑고 감사했다.
‘플레이어든 NPC든 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히겠어.’
수인족 왕 맥스옹이 이미 앞서 증명한 바 있듯이 ‘종의 정점’은 보통의 네임드 NPC보다 높은 레벨을 자랑한다.
실제로 테루찬의 레벨은 무려 500이었다.
테루찬이 ‘착용자보다 레벨이 10 이상 낮은 적에게 공포’를 주는 실패작을 휘두르는 이상 테루찬과 제대로 맞설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세상에 몇 없었다.
‘다만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는 테루찬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군.’
두 사람은 공포에 면역할뿐더러 테루찬의 기술을 모조리 꿰뚫어볼 테니까. 심지어 두 사람은 스탯도 높아서 테루찬의 스탯에 크게 꿀리지 않는다.
물론 ‘오크’라는 종족 특성 상 힘과 체력만큼은 테루찬이 앞서겠지만.
“그만하자.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겠다.”
대자로 뻗은 그리드가 항복을 선언했다.
반면 테루찬은 팔팔했다.
과연 오크 로드답게 지칠 줄을 몰랐다.
“그리드가. 쿠륵. 진심을 다했다면 내가 졌을 것이다.”
“하하, 위로해줄 필요 없어. 난 도리어 너한테 진 게 기쁘다고.”
19살 연하치고 배려심이 깊구나.
생각하며 피식 웃은 그리드가 갓 핸드의 정보를 불러왔다.
<갓 핸드>
등급:신화
내구력:무한
손재주:2,583 근력:1,795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그리드가 <탐욕>을 재료로 창조한 아티팩트입니다.
그리드 본인의 손을 고스란히 본떠 만들었으므로 모든 아이템을 제약 없이 착용, 사용할 수 있고 대장일 또한 가능합니다.
그 경이로운 성능에 놀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탐내고 있습니다.
*주인의 순수 근력과 손재주 수치를 50퍼센트 적용받습니다.
*주인의 ‘고유 스킬’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단, 스킬의 위력은 30퍼센트로 제한되며 스킬 사용 시 주인의 마나를 소모합니다.
하지만 착용한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들은 자원 소모 없이 완벽하게 발현합니다. 버프 스킬의 경우 영향을 주인에게 줍니다.
*고급 대장장이 기술을 마스터하고 있습니다.
*고급 웨폰 마스터리와 실드 마스터리를 마스터하고 있습니다.
*공격 시 높은 확률로 <분쇄> 발동.
*피격 시 높은 확률로 <재구성> 발동.
*지형이 협곡인 장소에서 방어력 10퍼센트 상승.
*지형이 협곡인 장소에서 광역 스킬의 위력이 20퍼센트 상승.
*22위 이하의 대악마와 조우 시 대상의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을 10퍼센트 저하.
*파괴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입을 시 5초 동안 내구력이 최소치로 고정. 이 효과가 끝난 후 내구력 10퍼센트 복구. (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현재 귀속 된 마법이 없습니다.
*사용법에 따라서 이성의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사용 조건:그리드
무게:21
새로운 갓 핸드는 기존의 갓 핸드와 비교해서 성능이 대폭 강화됐다.
그래, 강화됐을 뿐이다.
어떤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당연하다.
갓 핸드는 그리드의 손을 ‘고스란히’ 본떠 만든 아이템이니까.
갓 핸드의 본질은 그리드의 손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있었으니 어떤 변화를 줄 이유가 없었다. 변화를 주는 순간 갓 핸드는 갓 핸드가 아니게 된다.
‘본질을 흐려선 안 되지.’
그리드는 헥세타이아가 갓 핸드를 탐내고 있다는 문장을 몇 번이고 흐뭇하게 되새겼다.
자신의 손을 고스란히 재현했을 뿐인 아이템을 신조차 탐내고 있다는 점이 그는 무척 뿌듯했다.
신화.
다름 아닌 신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음이 실감이 난다고 할까.
‘신화가 되면 정말로 신이 되는 건가?’
과거에는 이런 식의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신의 실체를 알게 된 지금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Satisfy에서 신이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닌 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플레이어 또한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드는 생각해보면서 고민했다.
‘갓 핸드의 수량을 늘리고 싶은데.’
갓 핸드를 일일이 컨트롤하는 건 4개가 한계다.
하지만 갓 핸드는 애초에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아이템이다.
굳이 일일이 컨트롤할 필요 없이 방치해도 충분히 도움이 됐다.
‘100개쯤 만들면 무적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
밸런스.
그놈의 밸런스를 핑계로 어떤 페널티가 발생할 게 뻔하다.
몇 개의 갓 핸드를 보유할 수 있을지는 직접 만들어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좋아, 일단 투구를 만든 다음 한동안 갓 핸드만 생산해보자.’
그리드는 여전히 ‘퇴화형 아이템’ <고깔투구>를 사용 중이다. 사신의 숨결도 남았겠다, 찝찝해서라도 빨리 투구를 바꾸고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탐욕을 증식시킨 다음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그때까지 수인족 왕의 눈물의 사용처나 결정해볼까? 아니, 역시 이대로 보관하는 편이 좋을지도.’
수인족 왕의 눈물.
기존에는 갓 핸드에 <매직 미사일>을 귀속하는 용도로 사용했었지만 현재 그리드의 지력은 3천을 초과하고 있다.
세컨드 클래스 <대마법사>가 <지공>으로 바뀌지만 않았어도 진즉에 <파이어 볼>을 익혔을 그리드 입장에선 조금 다른 희망을 품어보고 싶었다.
‘브라함이 깨어나면 내 지력이 오른 거 보고 새로운 마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으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이대로 보관하는 게.....’
수인족 왕의 눈물은 정말로 희귀한 아이템이다.
안 그래도 5개월에 하나밖에 못 구했는데 최근에는 1년에 하나만 구할 수 있었다.
수인족 왕 맥스옹이 눈물을 흘리는 횟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왕으로서 자각을 갖춘 그는 이미 죽은 딸을 그리워하며 울 시간에 백성을 보살피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아쉽지만 좋은 일이지. 음, 눈물은 역시 놔두자. 일단 대충 쓰다가 분해하면 그만이지만 분해 과정에서 손상 될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되니까.’
새로운 마법 습득.
브라함이 깨어나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리드는 희망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지력이 상승할수록 브라함의 영혼이 회복됐으니 언젠간 반드시 브라함이 깨어날 거라고 믿었으니까.
‘좋아, 이런 고민할 시간에 사냥을 하자. 브라함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렙업 해야지.’
결심한 그리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봐.”
“....?!”
기척도 없이 웬 소녀가 나타났다.
용맹무쌍한 테루찬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존재감을 내뿜는 소녀.
드래곤 새끼.
전문 용어로 해츨링이라고 불리는 네펠리나의 등장이었다.
“이,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꼬이는 그리드였다.
눈살을 찌푸린 네펠리나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종족들의 활동과 대행자를 내세운 거악의 태도가 그녀를 자극했다.”
“네?”
잠꼬댄가?
네펠리나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고 그리드는 어리둥절했다.
“깊이 잠들어있던 존재.”
“.....?”
“뱀파이어의 왕을 자처해도 좋을 여자 말이다.”
“....!!”
“아무래도 그녀가 속세에 흥미를 품은 듯하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차원이 다른 절대자가 갑자기 언급되자 그리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네펠리나가 경고했다.
“나는 지금의 보금자리를 잃고 싶지 않구나. 너는 그녀를 잘 달래야할 것이다.”
그걸로 끝이었다.
네펠리나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이 자리를 떠나버렸고 덩그러니 남겨진 그리드는 한동안 석상처럼 굳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