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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83화 (973/1,794)

템빨 52권 - 9화

“갑옷은. 쿠륵. 싫다. 답답하다.”

“평소에만 입고 싸울 때는 벗어.”

“....?”

그럼 굳이 입을 이유가?

그런 뜻이 담긴 눈빛을 보내오는 테루찬을 보면서 그리드는 확신했다.

얘가 쥬드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험험, 헛기침한 그리드가 첨언했다.

“혹시 모를 암습에 대비하라는 거지.”

“필요 없다. 쿠륵. 전사는 비겁한 기습 따위에 당하지 않는다.”

“말 좀 들어라. 충성하겠다며?”

“그것과 이건 별개다! 쿠르륵!”

“.....”

커다란 암석을 통째로 깎아놓은 듯한 테루찬의 근육들.

그것의 팽창을 그리드는 목격한 바 있다.

특히 무기를 투척할 때 사용하는 <철완> 스킬의 전개 때마다 테루찬의 어깨와 팔뚝은 2배 이상 부풀어 올랐었다.

‘그래서 천 갑옷하고 가죽 갑옷을 만든 건데.’

명백히 실패했다.

현재 그리드가 구할 수 있는 천과 가죽으로는 테루찬의 근육이 팽창하는 정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천은 일정량 늘어나다가 탄성의 한계를 맞이하고 찢어져버렸고 가죽은 도리어 테루찬의 근육을 압박해버렸다.

‘싫어하는 거 이해한다. 불편하겠지.’

아니, 불편함을 넘어서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갑옷이 족쇄가 되어서 자신을 해칠 수도 있음을 직감했을 테니까.

‘탐욕의 물량을 충분히 확보하기 전까진 갑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 없겠어.’

탐욕의 탄성은 굉장히 자유롭다.

아다만티움으로부터 계승한 특성이다.

탐욕으로 만든 갑옷은 테루찬의 근육 팽창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그리드는 확신했다.

하지만 당장 탐욕을 써서 갑옷을 만들기엔 무리가 있었다.

탐욕에서 파브라늄과 관련한 특성을 삭제해야 ‘그리드’라는 사용 조건이 사라질 텐데, 광룡 모루와 망치가 딱 원하는 특성만 삭제해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다만티움과 관련한 특성까지 삭제됐다간 기껏 탐욕을 써서 갑옷을 만드는 의미가 사라졌다.

‘지금까지 경험에 따르면 금속의 특성 전부가 삭제될 확률이 매우 높아. 아직은 몇 개 없는 탐욕을 소모해가면서까지 시도할 단계가 아니다.’

우선 광룡 망치와 모루의 개량이 필요하다. 원하는 특성을 취사선택하기가 용이해지게끔.

“자, 받아.”

그리드가 테루찬에게 커다란 천을 던져줬다.

“속옷이야. 갑옷은 안 입더라도 그건 꼭 입고 다녀라.”

현재 테루찬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누렇게 변색 된 헝겊 쪼가리 하나가 전부였다. 간신히 중요 부위만 가리는 수준이었고 뒤에서 보면 단단한 엉덩이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남성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 성적 대상화했다며 일부 남성 단체에서 항의하고 있을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어찌됐든 방어구로서의 가치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반면 그리드가 만든 속옷은 무려 두 자릿수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무려 10이다, 10.

없는 것보단 낫다.

특히 방어력이 퍼센트 단위로 상승하는 테루찬에겐 의외로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원래 입던 것보다 면적이 커서 처음엔 좀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금방 익숙해질 거야. 피부에 최대한 밀착하게끔 만들었으니까 행동에 불편함도 없을 거고.”

“.....”

“아, 너무 달라붙어서 그게 툭 튀어나올 것 같은 건 걱정 마. 멋도 챙길 겸 앞에 천을 덧대놨으니까.”

“.....”

촘촘한 바느질 자국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드가 건네준 속옷은 단지 멋지기만 할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노력과 정성이 담겨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속옷을 바라보던 테루찬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위대한 전사여. 이 갑옷들처럼. 쿠륵. 속옷 또한 당신이 직접 만든 것인가?”

“내가 재주가 좀 많거든.”

“....쿠르륵....”

테루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느 오크들처럼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려졌던 그는 선물을 받는 일 자체가 낯설었다. 하물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입고 다녀야하는 소중한 속옷을 누군가 정성껏 만들어준 일은 처음이었다.

“천이 다 헐때까지. 쿠륵. 매일매일 빨지 않고. 쿠륵. 소중히 입겠다.”

“뭐? 뭔 헛소리야? 여러 벌 만들어줄 테니까 매일 갈아입고 빨아 입어라.”

“아니다! 한 번 입으면 안 벗을 거다! 쿠륵! 당신의 성의를! 잊지 않도록!”

“.....”

말 진짜 오지게 안 듣는다.

테루찬의 피부가 보통 오크들의 것처럼 녹색이었다면 청개구리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 같다.

피식 웃은 그리드가 <실패작>의 제작법을 불러왔다.

백호검이나 열망의 무아검의 제작법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실패작이 ‘대검’이기 때문이다.

테루찬은 대도의 사용에 능숙했으니 실패작과의 시너지가 훨씬 더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애초에 그리드는 실패작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고.

‘실패작의 공격력 기댓값은 다른 신검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아.’

그리드가 크라우젤과 함께 창조한 백호검의 설계도.

거기에 표기 된 유니크 등급 백호검의 공격력 기본값은 493~817이다.

우연히 만들고 제작법을 얻은 열망의 무아검.

그것의 유니크 등급 공격력 기본값은 930~1,050이다.

반면 유니크 등급 실패작의 공격력 기본값은 733~1,621이었다.

물론 백호검과 무아검은 한손 검이며, 실패작은 공격성을 극대화시킨 양손 검이라는 근본적 차이점 때문이긴 했지만, 실패작의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푸른 오리하르콘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아다만티움, 블러드 스톤, 사신수의 숨결, 대악마의 부산물 등과 비교해서 가치가 낮은.

비교적 저등급인 재료를 사용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음에도 실패작의 공격력 기댓값은 신검과 비견됐다. 무서운 수준이 아니라 그냥 개사기다.

그로 인해서 ‘터무니없는 사용 조건’이라는 페널티가 발생했고 그렇기에 ‘실패작’인 거지만 테루찬은 <최강의 전사>다.

테루찬은 실패작의 사용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

‘4,000의 30퍼센트면 1,200이니까 테루찬의 전투 중 근력은 최대 5,200까지 상승한다. 맞지?’

혹시 몰라 재차 계산기를 두드려본 그리드가 테루찬에게 당부했다.

“테루찬, 나는 네게 두 개의 무기를 만들어줄 거야. 하나는 그냥 좀 많이 쓸만한 대도고 다른 하나는 굉장히 많이 쓸만한 대검이지.”

“쿠륵?”

“대신 대검은 평소 네 힘으론 휘두르기 힘들 거야. 평소에는 대도를 사용하고 대검은 등에 매고 다니다가 전투 중에 교체해서 써. 무기 교체에 능숙해지게끔 늘 연습하도록 하고.”

“왜 힘들지?”

테루찬이 진짜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강의 전사인 내가 고작 검 한 자루 못 휘두를 거라니?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눈치였다.

“나는. 쿠륵. 거목도 뿌리째 뽑아 휘두를 수 있다. 검 따위. 쿠륵. 쉽게 휘두른다.”

“구조가 조악해서 그런 것 같은데.... 뭐, 직접 써보면 알게 될 거야.”

그리드가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에 여태껏 모아온 탐욕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아, 물론 증식용으로 1개는 남겨놨다.

“제작을 시작해볼까.”

눈을 번뜩인 그리드가 광룡 망치와 모루를 꺼냈다.

갑옷과 경우가 달라 광물의 특성이 삭제돼도 문제가 없었으니 행동에 거침이 없다.

따앙-! 따앙!

제련, 단조, 단련, 담금 등.

능숙한 몸짓으로 일련의 제작 과정을 밟아가는 그리드의 작업 속도는 의외로 빠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보통의 대장장이보다 느렸다.

주조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직접 망치질해서 검의 형태를 잡아갔기 때문이다.

제작법을 보유 중인 아이템을 오토 제작 시 몇 시간 내에 양산할 수 있는 그리드였지만 여전히 중요한 아이템은 수작업을 고수하는 것이다.

더 나은 결과물이 탄생할 가능성을 0.001퍼센트라도 늘릴 수 있다면, 그리드는 자신의 몸과 정신이 혹사당하는 일쯤 개의치 않았으니까.

‘강한 동료가 더 많이 필요하다.’

Satisfy에서 평화란 한시적인 개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게임을 즐기고 있을 20억 플레이어에 의해서 무수히 많은 에피소드가 새롭게 점화하거나 종결을 맞이하는 중일 테니까.

그것은 옆집 철수와 관련 된 작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야탄교와 대악마가 얽힌 심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어떤 에피소드는 반드시 새로운 위기를 동반할 것이다.

현재는 서대륙에 국한 된 게임의 무대가 하루아침에 동대륙까지 확장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드는 그때에 대비할 힘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더 많은 동료를 원했다. 동료들이 강해지길 바랐다.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의 오랜 부재와 십공신들의 이탈을 이해하고 인내할 수 있는 이유다.

‘모두와 다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따앙! 따앙!

‘나는 지금의 환경을 연마한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와 승부할 당시 패시브 스킬로 변경 된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과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그 저력을 기반으로 삼은 그리드의 집중력이 극한에 도달했다.

***

[<최강의 전사를 기리는 실패작>을 완성하였습니다!]

“....?”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로 작업에 열중했던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물론 그리드는 훌륭한 결과물의 탄생을 기대했었다.

비록 대부분의 특성이 삭제됐다곤 하지만 명색이 탐욕을 재료로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수식언이 붙어달라는 바람까진 품지 못했었다.

실패작 자체가 결함이 있는 아이템이었으므로 시스템이 완성도를 높게 평가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었다.

한데 수식언이 붙었다.

그것도 테루찬에게 딱 맞는.

<최강의 전사를 기리는 실패작>

등급:유니크(성장형)

내구력:무한

공격력:1,190~2,005 방어력:80

*민첩성 +60

*낮은 확률로 적의 공격을 차단.

*일정 확률로 <5연격> 발동.

*일정 확률로 <절단> 발동.

*스킬 <이등분> 생성.

*공격 시 높은 확률로 <분쇄> 발동.

*착용자보다 레벨이 10 이상 낮은 적에게 공포 효과.

*‘테루찬’이 착용 시 공격력 +20퍼센트.

신에게 깨달음을 준 대장장이 그리드가 부족했던 시절에 만든 실패작을 재해석했습니다.

대검으로 만들어졌지만 검신 특유의 생김새 때문에 절삭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해양의 포식자를 닮은 모습이 적의 공포심을 유발하며, 검등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작은 검날이 방어에 도움을 줍니다.

또한 모든 요소에 테루찬을 향한 배려를 담았습니다.

테루찬은 이 무기와 일체감을 느낄 것입니다.

사용 조건:테루찬. 그리드.

무게:860

“기껏 이빨 털었더니....”

사용 조건이 이런 식으로 변할 줄이야.

거짓말쟁이 되게 생겼다.

19살짜리 꼬맹이(?)한테 귀감이 되도 부족할 판국에 거짓말쟁이라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깊은 밤이다.

초저녁쯤에 작업을 시작했으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

‘....아니군.’

눈앞이 침침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퉁퉁 부어오른 양손에 감각이 없다.

온몸에 흘렸던 땀이 식어가며 한기가 돈다.

스태미나 게이지가 바닥났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테루찬이 있었다.

눈 밑이 퀭하고 뺨이 홀쭉한 것이 병에라도 걸린 것 같다.

“뭐야? 상태가 왜 그래?”

걱정하며 묻는 그리드의 두 손을.

“쿠륵. 당신은 위대한 전사가 아니다.

덥썩, 테루찬의 커다란 두 손이 감쌌다.

“당신은. 쿠륵. 위대한 대장장이가 아니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 앞에.

“당신은.”

테루찬이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위대한 그리드다. 쿠륵.”

테루찬은 대장일에 무지하다.

그래서 그리드의 작업이 아닌 태도를 관찰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격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나를 위해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던 그리드의 모습을.

나를 향한 그의 진실 된 마음을 테루찬은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갑옷. 쿠륵. 입겠다. 불편해도 참고 입겠다.”

“이런....”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이족의 왕의 칭호 효과 덕분일까.

테루찬과의 호감도가 최대치를 달성하고 있었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흐뭇하게 웃은 그리드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테루찬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억지로 입을 필요 없어. 그게 도리어 화가 될 수도 있으니까.”

“싫다. 쿠륵. 입을 거다.”

“아니야. 너한테 맞는 갑옷은 내가 나중에 새로 만들어줄 거야.”

“그때까지. 쿠륵. 오늘 당신이 만들어준 갑옷들. 쿠륵. 입겠다.”

“아니 염병! 말 좀 들어!”

“히끅! 알았다.”

“화, 화내서 미안.”

“쿠륵....”

젠장, 애 앞에서 욕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다니.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그리드였다.

같은 시간, 가우스 왕국의 어느 숲.

“인간이여, 나가세요. 이곳은 우리들 엘프가 수호하는 영토입니다.”

“죽이기 전에 검은 것의 행방이나 말해.”

또 다른 이종족이 녹발 금안의 사내와 조우하고 있었다.

“검은 것....?”

“너희의 옛 동료 말이야. 그 타락한 계집의 육체가 필요하다.”

한 걸음.

서드 클래스 <마계 귀족>을 획득하고 많은 권한을 얻은 아그너스는 옛 연인의 부활까지 단 한 걸음만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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