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 8화
“나! 테루찬은! 쿠륵! 당신을! 섬기겠다!!”
“....!”
“....!”
테루찬의 맹세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오크 로드가 그리드를 섬긴다는 말은 즉, 오크라는 종 자체가 그리드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불공정하오!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작은 펫 한 마리 얻어 보겠답시고 고군분투하는 마당에 그리드는 수천만 오크들의 주인이 된다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느낄 박탈감은 누가 보상할 게요!』
『펫 한 마리 테이밍하는 것보다야 오크 로드와의 대결이 훨씬 더 어려워 보이는데....? 누가 들으면 그리드가 거저먹은 줄 알겠소?』
『말장난 마시오! 논지는 그게 아니잖소! 지금 나는 단 한 명의 플레이어가 너무 큰 권력을 거머쥘 경우 발생할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게요!』
『새삼스럽게 그런 걸 따진다고? 그리드는 이미 수천만 백성을 거느린 왕이외다. 이제와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리게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게 있소?』
『애초에 오크들이 템빨국에 편입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들 또한 이미 거대한 국가를 이루고 있으므로 템빨국이 수용할 여력도 없고요. 수인족의 경우처럼 동맹 관계로 끝날 텐데요.』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수인족과는 경우가 다르오! 수천 만 명의 플레이어가 이미 오크로 종족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시오! 그리드가 오크 로드와의 관계를 이용해서 플레이어들의 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이 말이오!』
『맞습니다. 오크 로드는 절대적인 명령권을 지녔죠. 오크 플레이어들은 전쟁에 참전하라는 로드의 한 마디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었을 정도입니다. 오크 로드가 ‘그리드를 위해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수천만 오크 플레이어들은 그리드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수가 있어요. 그리드가 오크 로드를 통해서 플레이어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부여할 수도 있는 거고요.』
『일개 플레이어가 수천만 플레이어들의 권리를 침해할 것이다? 굉장한 비약이군. 그런 사달이 발생했다간 모든 플레이어가 들고 일어날 텐데 S.A그룹이 가만히 있겠소? 댁들은 S.A그룹이 무슨 동네 구멍가게로 보이오?』
『그러게. 걱정을 너무 사서들 하시네. 심지어 오크 로드의 명령은 퀘스트로 분류되며 플레이어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수? 일단 지켜본 다음 논해도 될 문제점들을 왜 앞장서 언급하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아, 생각해 보니까 제네럴 장하고 리태운, 당신들 중국계 인사셨지? 왜 그토록 흥분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
『여기서 출신이 왜 나오는 게요?』
『중국 정부의 선동으로 수천 만 중국인 플레이어가 오크로 종족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있소? 중국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국인 플레이어를 오크 로드로 만들어서 오크를 지배하는 것이었을 텐데 일이 틀어졌으니 얼마나 배알이 꼴릴까. 이거 이제 어쩌오? 중국에서 그리드를 꺾을 수 있는 인재가 나타나려면 족히 수십 년은 기다려야할 텐데?』
『개소리! 닥치시오!!』
정말 많은 방송들의 분위기가 실시간으로 험악해졌다. 패널끼리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청자들은 세계 각국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침투해 있는지 새삼 깨다는 한편 작금 발생한 사태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오크들의 규칙은 오크 로드를 꺾은 오크가 새로운 로드로 등극하는 거잖아? 그럼 이대로 그리드가 오크 로드로 추대되고 오크를 완전히 수족으로 부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정말 난리 나는 거 아닌가?
-오크로 종변한 사람은 그리드한테 밉보이는 순간 망할듯ㅋㅋ 강제 퀘스트 이상한 거 부여하면 보상이고 나발이고 간에 시간낭비 엄청 클 테니까.
그야말로 온갖 소요가 발생했다.
하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일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그리드는 오크 로드가 되지 않았으니까.
당연하다.
그리드는 오크가 아니었으니 오크 로드가 될 수 없었다.
‘로드를 꺾은 자가 로드가 된다.’라는 로드 선출 규칙은 같은 오크들 사이에서나 적용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나, 테루찬은! 쿠륵! 위대한 전사 그리드에게 앞으로 영원히 충성할 것이다! 쿠륵! 이것은 로드로서가 아닌 나 개인의 맹세! 불만은 허락지 않는다!”
그리드에게 복종하는 것은 ‘어스름족 오크’가 아닌 ‘테루찬’임을 테루찬 본인이 못박아버림으로서 사람들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테루찬의 의도는 오크 내부의 반발을 잠재우려는 것이었지만 플레이어들의 불안과 반발심까지 억눌러버린 셈이다.
‘다행이군.’
라우엘은 내심 안도했다.
오크는 무서운 번식력을 자랑하는 바.
만약 그들이 템빨국에 편입됐다간 템빨국은 심각한 재정난을 피할 수 없었다.
피아로와 휴렌트를 비롯한 최고의 농부들이 있어봤자 오크들은 오로지 육식만을 즐겼으니 그들의 배를 채워줄 수 없었고, 또한 템빨국의 영토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오크 인구를 수용하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더군다나 힘을 숭상하는 오크들의 특성 상 기존의 백성들과 충돌을 빚을 부분이 많았는데 그 모든 책임과 문제를 회피하고 필요할 때만 테루찬과 테루찬의 측근들을 부릴 수 있게 됐다.
매우 이상적인 결과인 셈이다.
다만 거기까진 생각 못한 그리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오크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어?’
이런 젠장.
치를 떠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달랬다.
“오크 로드는 세습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일 당장 로드가 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으며 로드가 바뀔 때마다 템빨국과 오크의 관계는 크게 바뀌겠죠. 새로운 로드가 전하께 반역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오크를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건 많은 위험을 동반하는 행위입니다.”
“흠.... 아쉬워하지 말라는 거지?”
“네, 지금이 딱 좋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질투와 경계도 피할 수 있으니 안심해도 되고.”
“그래, 이해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가 테루찬에게 제안했다.
“네가 진심으로 내게 충성하겠다면 나하고 계약하자.”
“쿠륵. 계약? 충성은 맹목적인 것. 계약은 이상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음.”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잠시 궁리해보던 그리드가 <이족의 왕> 칭호를 발동시켰다.
<계약> 시스템이 활성화됐다.
<계약>
대상이 이족일 경우 계약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계약한 대상은 ‘각성’하여 종족 특성이 강화됩니다.
당신은 계약 대상의 종족 특성 중 일부를 습득합니다.
당신은 한 번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
단, 상대방은 언제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이때 당신이 습득했던 종족 특성은 사라집니다.
또한 계약 대상이 사망 시에도 계약은 파기되며 당신이 습득했던 종족 특성은 사라집니다.
두 경우 모두 계약 가능 횟수가 복구되지 않습니다.
하오와 계약한 그리드에게 이제 남은 계약 횟수는 2개에 불과했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
신중하게 고민해봤기에, 그리드는 테루찬과의 계약을 결심했다.
근력, 체력 스탯의 계수를 올려주는 오크의 종족 특성이 그리드는 무척 탐났으니까.
[어스름족 오크 로드 ‘테루찬’을 계약의 대상으로 지목하셨습니다. 대상에게 ‘종족을 초월하는 친애의 맹세’를 나눌 것을 제안합니다.]
[대상이 계약에 응할 시, 대상의 격이 상승하고 모든 특성이 강화됩니다. 또한 당신에게 어스름족 오크의 특성 중 일부가 개화합니다.]
[대상은 언제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대상이 계약 파기 시 당신이 얻었던 어스름족 오크의 특성은 상실합니다.]
그리드의 시야에 온갖 알림창이 떠올랐고....
“쿠르륵....”
계약의 내용을 확인한 테루찬은 말을 잃었다.
계약 조건이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쯤, 그가 아무리 바보라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쿠륵. 위대한 전사여. 나를 이토록. 신뢰하는가.”
선뜻 응하지 못하는 테루찬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나를 신뢰하잖아? 그럼 나도 너를 신뢰해야지.”
“....좋다! 쿠륵!”
[대상이 계약을 수락하였습니다!!]
[계약 보상으로 어스름족 오크의 특성 중 하나를 랜덤으로 습득합니다!]
[....놀라운 행운이 작용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체력’ 능력치 계수가 1.8배 증가합니다!]
[체력 1당 생명력 상승률이 30에서 54로 상향 조정 됩니다! 체력 1당 방어력 상승률이 1.2에서 2.1로 상향 조정 됩니다!]
[오크 로드 테루찬과의 호감도가 20 상승하였습니다.]
‘좋았어!!’
오크로 종족을 바꾼 플레이어들은 온갖 희생을 치러야했다
인간의 미적 관점에선 다소 흉측하게 느껴지는 외모로 살아가야했고 지력 계수에서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 어떤 페널티도 없이 오크의 혜택 중 일부를 누리게 된 것이다.
특히 공격력에 아쉬움이 적고 <최초의 왕>칭호 효과 등으로 인해 생명력이 높을수록 큰 효과를 보는 그리드 입장에서 체력 능력치의 계수 상승은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테루찬! 감동했다! 쿠륵! 위대한 전사여!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라! 쿠륵! 언제라도 달려가겠다!!”
“일단 며칠 템빨국에 머물다가 가. 새로운 무기와 갑옷부터 만들어줄 테니까.”
“쿠륵! 좋다! 고맙다! 전사들이여! 너희들은 먼저 귀환하라! 쿠륵!”
“쿠륵! 쿠르륵!!”
하울 요새 주변의 평야를 가득 둘러쌌던 10만 오크 대군이 일제히 물러났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광경을 연상시킬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베즐 후작과 병사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장 며칠 내로 우리 왕국을 멸망시킬 기세였던 오크 대군이 거짓말처럼 물러나다니....
그리드가 일으킨 기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그들이지만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그들에게 그리드가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또 봅시다. 샤이닝 왕자에게 안부 전해주고.”
“아, 예! 다시 뵙게 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나이다!!”
“충!!”
베즐 후작과 3만의 군대가 일제히 경례했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존경만이 가득했다.
***
<충격! 수천만 중화민족이 그리드의 수중에 떨어지다!>
<어스름족 오크, 그리드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 어려워....>
중국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중국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은 그리드가 그들은 황당하고 괘씸했다.
급기야 화풀이라도 하듯, 중국인민해방군은 ‘실수’라는 명목 하에 대한민국의 영공을 침범했다. 중국의 전투기 2대가 대한민국 공군의 경고를 무시하고 동해를 멋대로 누비다가 사라졌다.
명백한 무력시위였다.
별것 아닌 소국의 국민 따위가 그만 좀 설치라는 경고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서 그리드를 고립시키려는 의도도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날.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수십 개 국가에게 철저히 비난 받았다. 특히 미국과 유럽 연합, 그리고 인도는 평화를 위협하는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에 있어선 안 된다며 온갖 규제를 거론했다.
S.A그룹의 힘이었다.
세계경제의 주체가 된 Satisfy를 개발하고 서비스 중인 S.A그룹의 힘은 기업이 아닌 국가의 수준에 이른 바, 온갖 선진국들과 교류하고 거래하며 그들과 좋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임철호 회장은 S.A그룹의 본사가 위치한 대한민국을 위협한 중국의 무례를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며, 여러 국가의 협력을 등에 업고 온갖 방법으로 중국에 보복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중국에 세웠던 캡슐 공장의 가동조차 멈춰버리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중국 정부가 부랴부랴 성명에 나섰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례를 범한 것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맹세했다.
그리드의 행보를 지켜보며 닭발에 소주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임철호 회장이 사실은 세계 제일의 거물인 것이다.
그리드에겐 ‘고깔모자 쓰고 내 생일파티에 참석해서 할아버지’쯤으로 인식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