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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80화 (970/1,794)

템빨 52권 - 7화

판덕공은 몇 년에 한 번 발동할 정도로 극악의 확률을 자랑한다.

그리드는 판덕공을 그저 염두에만 뒀을 뿐, 실제로 판덕공이 터질 거라고 기대하진 못했었다.

일단 싸워서 이긴 다음 ‘이족에게 큰 호의를 얻는다’, ‘대상이 이족일 경우 호감도 상승 확률 2배’ 효과를 지닌 <이족의 왕> 칭호 효과로 테루찬을 잘 구슬려볼 계획이었다.

한데 판덕공 효과가 발동한 것이다.

‘개꿀이군. 놀 때도 그렇고, 도리어 네임드를 상대로 확률이 오르는 건가?’

<신장> 때문에 치솟았던 열불이 일시에 사그라질 정도로 큰 희열이 그리드를 엄습했다.

하지만.

“이봐! 눈 떠!”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테루찬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드의 맹공도 버텼던 천하의 오크 로드가 몸을 벌벌 떨며 각혈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급기야 테루찬이 혼절하자 질색한 그리드가 품에서 물약을 꺼냈다. 테루찬의 멱살을 붙잡고 일으켜서 강제로 물약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치유 불가라고?’

트롤마냥 회복하던 녀석이 갑자기 왜?

그리드가 이제는 동료가 된 테루찬의 상태창을 불러왔다.

이름:테루찬

나이:19세 성별:남

종족:어스름족 오크

칭호:최강의 전사

*전투가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서 근력과 체력 스탯이 상승합니다. (최대 30퍼센트)

칭호:찬탈자

*‘우두머리’와 싸울 때 공격력, 방어력, 생명력, 회복력이 상승합니다. (최대 20퍼센트)

칭호:불굴의 전사

*일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최대 10회 무효화시킵니다. 10회 모두 누적 시 진원진기를 전부 소진합니다. (누적 초기화는 30일에 한 번)

레벨:500

근력:4,003 체력:6,130

민첩:2,280 지력:320

스킬:[철완(A)]/[힘의 포효(S)]/[본능(S)]/[신념(SS)]

테루찬은 여느 어스름족 오크와 마찬가지로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제국의 감시와 억압을 피해 산속 깊숙이 도망친 어스름족 오크의 터전은 터무니없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테루찬은 홀로 살아남았고, 어스름족 오크는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우리가 겪은 불행을 대물림해선 안 된다.″

주장한 테루찬은 전쟁을 반대하던 전대 오크 로드에게 도전하여 승리했습니다.

로드의 자리를 찬탈한 그의 소망은 새롭게 태어날 아이들의 행복입니다.

“.....”

최강의 전사, 찬탈자, 불굴의 전사.

안 그래도 높은 테루찬의 능력치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칭호들이다.

테루찬이 그리드의 공격을 대부분 허용하고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이라고?’

흉악범처럼 생긴 이 무시무시한 거구가?

나보다 20살은 더 많아 보이는데?

“아니, 젠장!”

지금 그딴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진원진기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에너지.

그것이 고갈되면 초월자라도 죽는다.

테루찬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맞아! 세희한테 부탁을....!’

다급해진 마음에 동생부터 떠올리던 그리드가 이내 석상처럼 굳었다.

칸의 최후를 상기한 것이다.

루비는 칸을 살리지 못했었다.

순리에 따라서 발생하는 죽음은, 제아무리 성녀라도 손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루비는 부를 수 없다.

그 마음 약한 아이는 결국 테루찬을 살리지 못할 테고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썩은 동아줄 붙잡아보겠답시고 동생의 마음에 돌을 얹는 짓.... 못한다.

‘그냥 차라리 나쁜 놈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리드가 죽어가는 테루찬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테루찬이 단순히 흉포한 침략자이며 약탈자였다면.

내 마음은 이처럼 무겁지 않았을 터다.

기껏 판덕공이 터졌는데 아깝게 됐다며 불운이나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테루찬은 악한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서 싸우리라 결심한 녀석이었고, 힘을 숭배하는 주제에 인간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괜히 판덕공이 터지는 바람에 테루찬에 대해서 알게 된 그리드는 무척 괴로웠다.

자신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생긴 테루찬에게 괜한 미안함을 느꼈다. 이런 녀석을 잃게 생겼다는 사실에 안타까웠다.

“씨불.... 염병....”

연신 욕설을 지껄이는 그리드의 귓가로 테루찬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드. 쿠륵.... 당신의 손에.... 죽게.... 되어.... 영....”

“닥쳐!”

그리드가 버럭 소리쳤다.

안 그래도 괴로운 마당에 더 괴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는 테루찬을 살릴만한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바로 <백도>다.

복용 시 모든 생명력과 상태이상이 회복되는 아이템.

도원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초특급 히든 아이템이며, 평생 1회만 복용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고려해봤을 때.

백도는 소모된 진원진기마저 회복시켜주는 비약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것을 선뜻 꺼내지 못했다.

테루찬의 가치가 낮아서?

아니다.

가치로만 놓고 보면 테루찬은 기대 이상이었다.

놀과 나란히 전장의 선두에 설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특히 그랜드마스터나 양반 같은 강적을 상대할 때는 놀보다 테루찬의 활약이 클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안 돼. 못 줘.’

그리드에게는 이미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아이린, 로드, 피아로, 그리고 브라함.

위험천만한 황궁에서 피아로를 소환했던 시점부터, 그리드는 그들 중 누군가에게 백도를 넘기리라 이미 다짐했었다.

나 때문에 당장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테루찬에겐 정말로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미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테루찬의 목숨이 지닌 무게는 차원이 다르다.

“영광.... 쿠륵....”

“닥치라고!!”

썩을, 이게 아닌데.

상황이 이렇게 불쾌해질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었다.

폴드 왕국도 구할 겸 겸사겸사 오크 로드도 회유해보자, 딱 그 정도 마음가짐으로 이곳을 찾아왔었다.

한데 이딴 일을 겪다니 기분 참 뭣 같다.

꾸욱....

괴로운 표정의 그리드가 답답한 가슴을 움켜쥘 때였다.

“템빨왕 전하!!”

누군가가 달려와 소리쳤다.

베즐 후작이었다.

저 멀리, 평야를 가로질러 돌격해오는 10만 오크 대군을 눈으로 가리킨 그가 재촉했다.

“왕을 잃은 저들이 폭주할 것입니다! 어서 피하셔야합니다!!”

그리드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10합의 약속’을 깨고 테루찬을 농락했을 때.

베즐 후작은 잠시 그리드를 의심했었다.

샤이닝 왕자가 그리드를 신처럼 찬양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리드의 억지에 세뇌당해서는 아닐지 걱정했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리드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테루찬과의 대결을 강행한 이유, 테루찬과 ‘검의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음을.

전투 내내 테루찬은 고양되어 있었고 그리드와 공방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희열과 존경을 표했으니까. 그리드와 그대로 친구라도 될 기세였다.

그렇다.

그리드는 테루찬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중해준 것이다.

무(武)를 예찬하는 어스름족 오크를 포악하다, 저열하다 비웃지 않고 교감했다.

실로 큰 그릇을 지닌 자....

그의 의도는 테루찬을 설득함으로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을 테지만 일이 틀어졌다.

테루찬은 죽어가고 있었고 분노한 오크 대군은 그리드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제가 시간을 버는 동안 서두르십시오!”

찌그러진 방패를 곧추세운 베즐 후작이 10만의 오크 대군을 홀로 마주보았다.

“베즐 후작님!!”

“각하! 피하지 않고 뭐하시는 겁니까!!”

하울 요새의 기사들이 분주해졌다.

누군가는 당장 성문을 열라고 지시했고 누군가는 이미 성벽에서 뛰어내려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베즐 후작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이었다.

베즐 후작의 사자후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전군, 퇴각하라!! 템빨왕 전하를 모시고 반드시 무사히 왕도까지 피신하라!!”

“각하!”

“명령이다!!”

“....!”

베즐 후작에게 달려오던 기사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존경하는 상관의 마지막 명령을, 그들은 도무지 어길 수가 없었다.

그리드와 눈이 마주친 어떤 노년의 기사가 소리쳤다.

“전하! 어서 이리 오십시오! 베즐 후작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소서!”

‘개뿔.’

쯧, 혀를 찬 그리드가 기사의 외침을 무시하며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엇....!”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던 4개의 갓 핸드가 일제히 날아가 베즐 후작의 사지를 붙잡았다.

“전하!?”

당황한 베즐 후작이 눈앞의 오크 대군과 그리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크군 선두와의 거리가 이제 채 200미터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대들을 돕고자 이곳에 온 거지 목숨을 구걸하러 온 게 아니다.”

“전하....!”

베즐 후작의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드가 기사들이 있는 장소까지 그를 집어던진 까닭이다.

점차 호흡이 희미해져가는 테루찬 곁에 우뚝 선 그리드가 오크 대군을 마주했다.

단단하고 검은 피부를 지닌 거구의 오크 10만 마리가 돌격해오는 모습은 거대한 암석의 파도를 연상시켰다.

‘개떼네.’

오크족 회유는 실패다.

테루찬과 싸우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스킬과 자원을 소비했으므로 상태도 엉망이다.

이대로 도망치는 것이 옳다.

그리드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크 군단의 선두에 있는 붉은 점 표범들 때문이었다.

수천 마리의 표범들이 등에 오크를 태운 채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기마의 속도를 월등히 초월했다.

이대로 그리드가 떠날 경우 하울 요새의 병사들은 저 표범대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거나 궤멸할 것이 분명했다.

기껏 원군으로 달려온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드는 상기했다.

자신의 첫 번째 목적은 폴드 왕국의 수호임을.

“씨불.... 와라!!”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해소할 수단도 필요하던 참이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적군에게 열망의 무아검을 겨눈 그리드가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욕설은 작게 중얼거리는 수준으로 카메라를 의식했다.

1대 10만의 대치.

여기서 한 명이 그리드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사람들은 별 관심종자가 다 있다며 콧방귀 뀌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이기에 시청자들은 비웃지 않고 집중했다.

노에와 랜디, 티라멧과 템빨골들이 그리드의 곁으로 튀어나왔고 갓 핸드가 주작궁으로 변했으며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파직-!

<전격 마기의 폭풍>이 선두의 표범대를 휩쓸려하는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표범들이 일제히 달리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선다 싶더니 오크들이 표범에서 뛰어내렸다. 수천의 오크 전사가 검도 뽑지 않고 그리드 앞으로 달려와 부복했다.

“쿠륵! 위대한 전사여!”

“....?”

“우리는! 로드의 시신을! 쿠륵! 원한다!!”

“.....”

그리드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오크의 방침을 결정 짓는 건 오직 로드.

로드가 죽게 생긴 이상 오크들은 굳이 전쟁을 강행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오크 로드를 선출해야했고 새로운 방침에 따라야했다.

또한 ‘전사’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리드와 테루찬의 승부는 정당한 것이었으므로 그리드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도 품지 않았다.

‘....바사라.’

이들을 해방시킨 당신의 안목은 옳았다.

이들은, 짐승이 아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오크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데려가라.”

“고맙다. 쿠륵.”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예의를 표한 오크들이 테루찬을 부축해 표범 위에 태웠다. 피부가 파랗게 질린 채 입을 다문 테루찬은 이제 거의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

“....?”

하늘에 빛이 번쩍였다.

매스 텔레포트가 일으키는 현상.

그리드와 오크들 모두 놀라서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대현자 스틱세이와 라우엘이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급히 지면에 안착한 라우엘이 품에서 어떤 과일을 꺼냈다.

하얀 복숭아.

백도였다.

“너....!”

깜짝 놀란 그리드가 라우엘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맹수의 것처럼 커다란 테루찬의 입을 억지로 벌린 라우엘이 그 안에 백도를 쑤셔 넣었다.

“상황은 모두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것뿐이군요.”

“아니, 너 미쳤어?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렇게 함부로....!”

“백도의 가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자에게 투자하는 거죠.”

“네가 먹어야....!”

“제가 먹는 건 너무 큰 사치죠. 아시다시피 이제 전 퇴물이지 않습니까?”

“그거야 나 때문에 바빠서 그런 거잖아! 언젠간 너도 다시....!”

“아니요. 제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고, 저는 이 길을 벗어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템빨국의 재상으로서 전하를 보좌할 것이므로 이런 사치품은 필요 없습니다.”

백도의 효과로는 레벨과 관계없이 경험치를 올려주는 것도 있었다.

고레벨 플레이어일수록 천문학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아이템인 셈이다.

그것을, 라우엘은 포기했다.

굉장히 큰 결심이 필요했으리라는 사실을 그리드가 모를 리 없다.

라우엘은 자신을 명백히 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 덕분에.....

“쿠륵....!”

숨이 멎어가던 테루찬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오크들까지 휘둥그레졌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위대한 전사....! 생명의 은인....! 나! 테루찬은! 쿠륵! 당신을! 섬기겠다!!”

테루찬은 맹세했다.

그리드가 정녕 생명의 은인이 맞는가....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었지만, 어찌됐든 그리드는 강력한 부하를 새롭게 얻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박새날입니다.

전편에 그리드의 레벨이 400으로 표기됐으나 무저갱 탐사 보상으로 403이 맞습니다.

누락된 부분 알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모든 독자님들께 깊이 사죄드립니다.

무저갱 탐사 보상과 관련한 내용들은 다음 주 연재분에서 레쉬와 함께 서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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