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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79화 (969/1,794)

템빨 52권 - 6화

20억 Satisfy 플레이어.

그들의 뇌리에는 공통적으로 각인 된 기억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그리드의 강함.

그중에서도 ‘공격력’이다.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성격 나쁘게 생긴 동양인 하나가 세상에 최초로 등장한 그날을.

국가대항전에 난입해 랭커들을 몰살시킨 그가 대악마를 토벌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무수한 강자들을 잿빛으로 산화시켜온 그리드의 독보적인 공격력은 20억 플레이어들에게 새로운 기준과 목표를 제시했을 정도이다.

한데 오크 로드 테루찬은.

“나는! 쿠륵! 승리를! 원한다!!”

대악마조차 위축시켰던 그리드의 검무를 몇 번이나 허용하고도 굳건히 버텼다.

쓰러지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포기 따위 모른다는 듯 넝마가 된 몸으로 그리드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10만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끝까지 1대1 승부를 고집하다니.

답답할 정도로 미련하고 멍청했다.

하지만 테루찬을 비웃는 사람은 적었다.

예절과 명예를 중시하는 그의 태도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쩌정-! 콰쾅!!

청룡.

뉴스 속보에 따르면 ‘동대륙의 사방신’ 중 하나라는 그것을 소환한 직후.

콰자자작!!

테루찬의 호기에 호응하듯 지상으로 강림한 그리드는 여태껏 보지 못한 속도와 움직임을 구사했다.

공격력과 방어력을 위시하여 상대방과 맞섰던 종전과 달리 경쾌하게 움직이며 전투의 우위를 점했다.

특히 발재간이 압권이었다.

검무의 보법을 셀 수 없이 밟아오며 숙달된 것인지 유난히 하반신을 잘 쓰는 모습이었다.

“쿠륵....!”

그리드가 일자로 세우는 다리에 테루찬의 대도가 가로막혔고,

터엉-!

정체불명의 반발력으로 인해 밀려나는 테루찬을 뒤쫓는 그리드의 속도는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

쩌저저정-!!

공격해오는 적을 차징하고 추격, 일격을 가한 뒤 다시 물러서는.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갓 핸드의 비호를 받는 그리드의 전투법은 한 마디로 치사하고 얄궂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지옥 같을.

한 마디로 잘 싸운다는 뜻이다.

누가 저자의 컨트롤 솜씨를 비웃었던가....

아직은 부족했던 시절의 그리드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그들은 점차 그리드에게 빠져들었다.

테루찬이 매력적인 성격으로 대중의 호감을 사는 반면 그리드는 항거하지 못할 마력으로 대중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런 젠장! 좀 가까이에서 보여주지!!

한창 전투에 집중하던 시청자들이 험한 욕설을 뱉기 시작했다.

그리드와 테루찬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포착을 놓치고, 그리드와 테루찬의 충돌이 너무 파괴적이라 발생하는 후폭풍을 감당 못해 흔들리거나 날아가는 등.

시청자들에게 충분한 상황 전달을 못하고 멀미만 유발하던 각국 방송사의 카메라들이 급기야 원거리 촬영을 선택한 까닭이다.

그 탓에 거대한 전장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리드와 테루찬의 모습은 점처럼 작아졌다.

전반적인 전투의 흐름을 읽기엔 좋아졌지만 두 사람의 표정과 호흡을 느낄 수 없으니 생동감이 크게 떨어졌다.

-카메라맨들이 너무 무능하네. 카메라가 흔들려서 문제면 직접 가까이 가서 눈으로 보고 송출할 것이지. 쯧.

-스트리머들이 지금 그 짓 하다가 죽어나가고 있는 거 모름?

-위험한 만큼 도전을 해야죠. 제대로만 찍으면 조회수 대박 올릴 수 있을 기횐데.

-이미 대부분의 카메라맨들이 도전 중일 듯. 그중 99.9퍼센트가 오크 때문에 접근도 못하거나 폭발에 휩쓸려 죽어서 문제겠지만.

-어차피 이 상태로 녹화해두면 나중에 확대해서 볼 수 있는데 뭐가 걱정임? 걍 여물고 보셈.

-여물은 댁이 끼니마다 잡수시는 게 여물이고요.

방송사나 개인 방송인들이 인증 후 요청 시, S.A그룹은 그들과 계약을 맺고 각종 방송용 아이템을 지급해준다.

Satisfy 관련 방송이 그토록 많은 이유다.

대표적인 예로 드론 카메라가 있다.

NPC들이 인지할 수 없는 형태를 지닌 그것은 빠르게 하늘을 날며 Satisfy의 상황을 방송으로 송출해줬다.

하지만 크기가 워낙 작은 탓에 충격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지금처럼 과격한 현장에선 기능이 제한되었다.

그래서 바니바니 등의 인기 방송인들은 직접 현장을 발로 뛰었다.

그들은 자신이 두 눈으로 보는 광경을 직접 방송에 송출함으로서 시청자들에게 높은 현장감과 확실한 정보를 제공했다. 카메라와 비교해서 대상에게 근접하기 어렵다는 한계점은 직업을 암살자 계열로 선택함으로서 극복하는 편이다.

-어....?

아쉬움을 느끼며 불만을 토로하던 시청자들이 일제히 두 눈을 크게 뜨며 방송에 집중했다.

그리드가 플라이 마법을 전개했던 시점부터.

아니, 플라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방법으로 하늘에 떠올랐던 시점부터 그리드의 주변에 맴돌기 시작했던 전류들이 이제는 완전히 하얗게 작열하고 있었다.

뇌광.

마치 그리드 본인이 번개가 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착시가....

──!

『....!?』

시청자 채팅창을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가 조용해졌다. 전 세계 인터넷이 동시에 끊긴 것처럼 게시글과 채팅창의 갱신이 멈췄다.

각 방송 해설진과 전문가들 또한 침묵했다.

번쩍임과 함께 사라졌던 그리드가 테루찬의 거구를 꿰뚫고 등장하더니,

──콰르르르르릉!!

한 발 늦게 천둥소리가 울렸고, 테루찬의 가슴으로부터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컥....! 쿨럭!!”

태산처럼 우뚝 섰던 거구가 흔들린다.

전문가들이 ‘플레이어의 최대 속도를 넘어선 것 같다.’고 분석 중인 그리드의 속도를 끈질기게 추적하던 두 눈이 갈 곳을 잃는다.

하지만.

“나는....! 전사! 쿠륵! 로드이기에 앞서 전사다!! 쿠르륵! 나는! 싸운다!!”

손은 여전히 대도를 놓치지 않았다.

포효한 테루찬이 허공에 마구잡이로 대도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문득.

콰작-!

등 뒤를 노리고 돌진해오는 그리드를 포착하고 회전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그리드의 속도가 번개처럼 빨라보였던 것은 연출로 말미암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뇌신>Lv.1

조건부 발동 패시브

청룡의 기운과 동화합니다.

최대 속도에 도달 시 낮은 확률로 신체가 번개로 변합니다. 이때 모든 공격이 전격속성으로 변경되고 대상을 타격할 때마다 마나를 대량으로 불태웁니다. (대상 총 마나의 10퍼센트)

모든 물리공격에 면역하지만 마법공격에는 방어력, 저항력이 적용되지 않은 2배의 피해를 입습니다. 또한 이동하는 경로에 지력의 10배에 해당하는 피해를 주는 전류를 남깁니다. 전류 지속 2초.

속도가 하락할 때까지 해제되지 않으며 최대 속도에서 벗어날 시 즉시 해제 됩니다.

*뇌신 상태에서 사망 시 청룡의 분노를 삽니다.

*신화급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뇌신이라는 스킬에는 속도 상승 버프가 없다.

다만 ‘번개가 됐다.’는 설정값에 의해서 모습이 밝게 백열하고 효과음이 뒤늦게 발생하는 연출 효과를 얻기 때문에 대상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테루찬과 시청자들은 그리드가 정말로 번개처럼 빨라졌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일 뿐.

서걱-!

종의 정점답게 금방 본질을 간파한 테루찬의 거센 반격이 쏟아졌다.

백열하는 그리드의 몸을 거대한 대도가 베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헐.

-위험한 거 아닌가?

멈춰있던 채팅창이 다시 빠르게 갱신됐다.

몇 년의 세월 동안 그리드를 지켜봐온 시청자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드에게 정이 들어 있었다.

반면 테루찬은 이제야 막 알게 된 상대다.

하물며 플레이어도 아니다.

테루찬에게 큰 매력과 호감을 느껴봤자 그리드가 그에게 패배하길 바라는 사람은 적다는 뜻이다.

-오예, 그리드 죽는다.

-속이 다 시원하네.

물론 사람이 다 똑같은 건 아닌지라 여전히 그리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은 쾌재를 불렀으나....

-....??

그들의 환호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테루찬의 대도가 그리드를 무채 썰듯이 베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리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륵?”

이것은 환영인가?

나는 이미 어떤 주술에 당한 것인가?

그리드를 몇 번이나 베어 봐도 감촉이 없자 테루찬은 당황했다. 초조해져서 더 빠르게 대도를 휘둘러 봤지만 그리드는 마치 연못에 비치는 달처럼 벨 수 없었다.

“킁! 킁킁!!”

테루찬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코를 벌렁거렸다. 그리드의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고자 그의 체취를 맡는데 열중했다.

“.....!”

테루찬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눈앞의 환영으로부터 그리드의 체취가 진동했기에.

그렇다.

환영 따위가 아니었다.

마침.

“십만대군.”

물리 공격을 무시한다는 뇌신의 특성을 이용, 테루찬의 맹공이 쏟아지는 찰나동안 신위로 인해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됐던 <아이템 합체> 스킬을 다시 시전한 그리드는 벨리알의 지팡이+열망의 무아검으로 또 다른 궁극기를 시전 중이었다.

“학살검.”

무패왕 마드라의 검술이다.

스파파파파파파파파팟-!!

증폭 된 뇌전을 품은 30회의 베기가 테루찬을 덮쳤다.

마치 서른 명의 검사가 동시에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시간차 없는 베기였다.

극한의 무도를 추구해온 테루찬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묘리가 ‘열화판’ 십만대적검에 담겨있었다.

“놀랍다...!”

순수하게 감탄하며, 맞서기보다는 방어하는 편이 옳다고 판단한 테루찬이 황급히 피부를 강화시켜봤으나.

“....!?”

스킬이 발동이 안 됐다.

<번개의 화신> 패시브 효과를 얻고 있는 그리드와 싸우는 내내 마나가 불타버렸으니 당연했다.

꽈광-! 꽝!!

테루찬이 30회의 베기 중 정확히 8회의 베기를 파쇄시켰다.

순전히 육체능력만으로, 대도 한 자루로 거둔 성과였다.

스킬을.

심지어 무패왕의 스킬을 평타로 무력화시킨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리드는 납득했다.

이름:그리드

레벨:403

생명력:152,540 마나:41,844 검기:1,200

근력:3,590(+480) 체력:2,197(+800)

민첩:3,190(+430) 지력:2,657(+830)

손재주:5,167(+980) 끈기:1,632(+430)

평정:1,188(+430) 불굴:1,423(+540)

위엄:2,096(+430) 통찰력:1,986(+430)

용기:1,242(+430) 정치력:181(+430)

악마력:31,590

행운:631

신위:7

잔여 능력치 포인트:590

상태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각종 칭호 효과까지 더한 그리드의 현재 총 근력은 4천을 초과하고 있다. 400레벨 달성 후 근력의 공격력 계수가 상승한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또한 그리드는 공격력을 추가시켜주는 특수 스탯 <용기>를 대량으로 확보한 이례적 인물임과 동시에 투기 축적으로 인한 능력치 상승효과를 누렸다.

거기에 추가로 +4까지 강화 된 열망의 무아검을 무기로 사용했다.

결론적으로, 그리드의 종합 공격력은 어지간한 필드 보스급인 셈이다.

하물며 전설급 스킬까지 대거 구사할 수 있었으니 보스 몬스터 이상의 공격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게 정확했다.

한데 테루찬은 그리드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겨뤘다.

아이템이라고는 낡아빠진 대도 한 자루가 전부인 몸으로 말이다.

종의 정점으로서 시스템 보정을 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순수 육체능력이 그리드를 넘어선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그가 평타로 스킬을 무력화시킨다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슬슬 한계를 맞이하는 듯하다.

십만대군 학살검에 난도질당하고 눈에 띄게 초췌해진 테루찬의 호흡이 매우 거칠었다.

싸움의 끝이 다가오는 것이다.

[<흑화>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최대 속도에서 벗어나 <뇌신> 상태가 해제됩니다.]

스르륵.

마기와 뇌광이 거두어진다.

최초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리드가 땀과 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잘생긴 이마와 함께 위로 솟구쳐 날카로운 눈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드는 본래 모습 그대로 마왕 토벌전에 출전했어야한다. 그래야 더욱 더 짙은 마왕의 위용을 뽐냈을 것이다.’

한 유명 헐리웃배우가 SNS에 남겼던 글귀다.

억 단위 좋아요를 받고 너무 기뻐 공중제비를 돌다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후일담이 있지만 뭐, 중요한 부분이 아니니 생략하도록 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전사의 얼굴....!”

그리드의 사나운 외모가 테루찬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이다.

[칭호 <판덕공>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

판덕공은 몬스터 사냥 시 일정 확률로 발동하는 효과다.

즉, 대상을 일단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어야했다.

한데 왜 지금 이 타이밍에 판덕공이...?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화들짝 놀랐다.

테루찬이 두 눈 뜬 채로 기절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아무리 스킬을 퍼부어도 10분의 2가량을 유지하던 그의 생명력이 빠르게 소실되고 있었다.

“이봐! 눈 떠!! 죽지 말라고!!”

-....그냥 편히 가게 놔두지.

-그리드가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뜬 듯....

죽어라 패놓은 주제에 이제 와서 죽지 말라니?

죽어가는 오크 로드의 멱살을 붙잡고 흔드는 그리드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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