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77화 (967/1,794)

템빨 52권 - 4화

‘승산은 충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크 로드와 대악마를 동급으로 평가했다.

오크 로드가 마법에 취약하다고 하나 종합적인 전투력은 대악마와 비등하다고 분석했다.

왜?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입장에선 대악마와 오크 로드 모두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었으니까.

‘보통의 기준’에선 오크 로드와 대악마가 결국 같은 수준이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반면 그리드는 달랐다.

직접 두 마리의 대악마를 레이드한 경험과 Satisfy의 세계관을 꿰뚫고 있는 그의 지식 수준으로 고려해 봤을 때 오크 로드는 대악마보다 한참 아래였다.

뱀파이어처럼 매우 특별한 상위종의 정점이라면 또 모를까, 일개 종의 정점이 지옥의 군주들과 비견된다는 건 스토리상 불가능했다.

수인족 왕 맥스옹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수인이라는 종의 정점인 그는 필시 강력한 존재였지만 결국 그리드와 그리드의 기사들, 그리고 이야루그트의 협공을 감당 못하고 제압당하지 않았던가.

당시 맥스옹과 싸웠던 전력으로 대악마를 레이드한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오크 로드가 어지간한 하이 랭커는 물론이고 네임드 NPC마저 씹어 먹는 실력자일지는 몰라도 대악마와 비교해선 애송이에 불과했다. 당장 피아로나 메르세데스와 일대일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하고 싸워도.’

서사시로 쌓아 올린 초월의 격.

새로운 갓 핸드와 청룡의 부츠.

근래에 급성장한 그리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로, 메르세데스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능력치 면에서는 그들을 따라잡아 가고 있을지 몰라도 전반적인 솜씨가 아직 월등히 밀렸기 때문이다.

주변의 환경을 바꿔 버리는 피아로의 기적적인 농술과 만물을 간파하는 메르세데스의 혜안을 그리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크 로드는 다르다.

이곳에 오기 전 오크 로드가 참전한 전쟁 영상들을 분석해 본 그리드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오크 로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마법에 취약했고, 템빨이 없었으며, 사용하는 스킬의 종류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패턴 분석이 쉬웠다.

물론 스킬 하나하나의 위력만큼은 대악마의 마법을 연상케 만들 정도라(사람들이 오크 로드와 대악마를 동급이라고 분석한 결정적 이유) 위협적이었으나, 그리드는 스스로 움직이며 내구도가 무한인 갓 핸드와 청룡의 부츠로 확정 방어가 가능할뿐더러 회(回)로 반격할 수도 있는 입장이다.

오크 로드가 휘두른 최초의 일격, 그다음 공격, 끝으로 투척 스킬에 이르기까지.

초전을 치르는 동안 그리드가 오크 로드의 공격을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것은 위에 열거한 이유들 덕분이었다.

‘이길 수 있다.’

이겨야 한다.

재차 다짐하는 그리드.

그는 이번 대결에 무척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기왕 오크 로드와 싸우게 된 김에 반드시 이겨서 오크들에게 강자로 인식될 각오였다.

힘이야말로 정의라고 떠드는 오크를 상대로 처음부터 지고 들어갔다간 <판덕공>과 <이족의 왕> 효과를 노리기 힘들 것이기에.

‘이기고, 복종시킨다.’

종의 정점을 애송이 취급하는 건 어디까지나 대악마와 비교했을 때다.

적어도 이 서대륙에서 종의 정점은 최강자 중 하나였다.

대악마는 물론이고 동대륙의 양반, 그리고 어쩌면 신들과도 다툴 수 있는 그리드의 입장에서 실력자는 최대한 많이 섭외하는 편이 좋았으니 오크 로드가 탐날 수밖에 없었다.

화끈하되 정도를 걷는 성격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10합. 나한테 10합만 버티면 살려 주마.”

오크 로드에게 선언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이 순간 그리드는 자신의 본질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었고, 그것은 오크 로드 테루찬에게 어떤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위대한 전사들의 로드인 나를. 사냥감 보듯이 하다니.’

괘씸하다.

인간과 오크는 엄연히 다른 종족이며, 저마다 재주가 다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강함을 강요하지 않으며, 인간의 나약함을 비웃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생각을 지닌 테루찬은 인간을 존중하되 가엽게 여겨 왔다.

이해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

즉, 약하고 불쌍한 존재라고 인식해 왔다.

테루찬의 기준에서 그리드의 태도는 선을 넘는 것이다.

“눈빛이. 쿠륵. 오만하다.”

본인을 템빨왕이라 밝힌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는 테루찬의 안광이 흉흉해졌다.

제아무리 테루찬이 명예를 중시하는 전사라고 해도 결국 오크인 바.

오크라는 종족은 인간과 비교해서 본능을 우선하므로 인내심이 형편없다.

존중과 자비에도 정도가 있지, 연약한 종족이 한 가닥 실력을 믿고 이를 드러내는 꼴을 용납하지 못했다.

“당장 머리를 조아려라. 그리하면. 쿠륵. 살려 주겠다. 쿠르륵.”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민머리에 핏대까지 세우며 종용하는 테루찬에게 그리드가 피식 웃어 주었다.

“자비를 베푸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쿠륵!! 무례하다!!”

폭발한 테루찬이 신사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오크의 흉포함과 전사의 패기를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족쇄를 풀어냈다는 뜻이다.

테루찬은 더욱 강해졌다.

아니, 온전해졌다.

고오오오오오-!!

양어깨 폭이 족히 1미터 50센티미터는 될 듯한 테루찬의 주변으로 흑빛인지 잿빛인지 모를 어스름한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투기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근력, 체력, 민첩성이 총 50퍼센트 상승합니다.]

이미 테루찬과 마주한 순간부터 반응했던 그리드의 투기는 순식간에 최대치에 도달했다.

자색과 적색의 빛이 그리드의 주변을 고요히 휘몰아치자 테루찬의 눈에 이채가 실렸다.

“쿠륵! 전설로 들었던……!”

영웅왕.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인간.

당시의 오크 로드조차 숭배했다는 <검성 뮐러>를 상징하는 기운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테루찬이 뒤늦게 긴장했다.

눈앞의 상대, 인간이라고 해서 나약하다 여기면 안 됨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 버렸다.

“초연화(超聯花).”

테루찬이 흥분한 틈을 노린 그리드는 이미 검무를 완성시켜 놓았다.

쏴아아아아아-

10만 오크가 검게 물들이고 있는 평야 위로 수만 송이의 푸른 꽃잎이 나부낀다.

오크들의 짙은 피부가 발생시킨 어둠이 불시에 거둬지며 전장 전체가 일순 환해졌다.

-아…….

도원향이 저럴까.

삭막했던 전장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되자 시청자들의 넋이 나갔다. 10만 오크 대군조차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반면 테루찬은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그가 오크들에게 외쳤다.

“쿠륵! 이를 악물어라!!”

동시에.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꽃잎의 비를 돌파하고 날아온 40줄기의 검기가 테루찬을 덮쳤다.

수만 송이의 꽃잎이 일제히 오크 대군을 폭격했다.

스카카칵!

꽃잎에 베이며 움찔거리는 오크 대군을 날카로운 바람들이 휩쓸고 지나간다.

콰자자자자작!!

또 그 사이로 무한에 가깝게 연계되는 전격의 줄기가 이어졌다.

<초연화(超聯花)>

3개의 검무를 하나의 경지로 승화시켰습니다.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200퍼센트의 위력을 발휘하는 검기 40개를 발사하고, 이때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을 <표적>으로 삼아 표식을 남깁니다.

표식당 2개의 검기가 추가로 발생하며, 추가된 검기는 각자의 표적을 목표로 날아갑니다. 검기는 물리 공격력 122퍼센트+마법 공격력 20퍼센트의 피해를 입힙니다.

추가 검기 2회에 모두 적중당하는 대상에게는 표식 1개가 추가로 발생합니다. 최대 5개의 표식을 중첩 가능.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검기 소모:3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20분

★디텍트 포스와 윈드 커터, 라이트닝 효과 적용

마나 소모:3,600

‘시야’ 범위 광역기의 위용이라는 것이다.

미리 <전광>을 전개, 비행 상태에 있던 그리드의 시야는 전장의 상당 부분을 담고 있었고, 그 여파로 수만 마리의 오크가 동시에 상처를 입게 됐다.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올라 있는 그리드에게 테루찬이 일갈했다.

“쿠륵! 나와의 승부에 집중해라!!”

각자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일대일 승부 중이다.

한데 내게 집중하지 않고 내 군대를 한 번에 상대할 것처럼 까불다니?

연이어 표출되는 그리드의 오만한 태도가 테루찬을 크게 자극했다.

기껏 식혔던 머리에 다시 열을 올리며 눈이 뒤집힌 그가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40줄기의 검기에 얻어맞았다고는 믿기지 않게도, 그의 두껍고 단단한 피부는 거의 멀쩡한 상태였다.

‘확실히 대단하군.’

오크 로드의 외침에 즉각 반응하여 이를 악물었던 오크 대군은 꽃잎과 바람에 베이고 전격에 지져졌음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고, 오크 로드 본인은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초연화의 공격력 대부분을 감당했다.

오크.

여태껏 별 볼 일 없는 몬스터로 취급했던 그들 중에 이토록 훌륭한 전사들이 있었을 줄은 솔직히 상상치 못했었다.

내심 감탄한 그리드가 허공에 뜬 채로 다음 검무의 보폭을 밟았다.

“화(花).”

<검호 파그마의 검무>를 얻었던 시점부터 그리드에게는 강적을 상대하는 공식이 생겼다.

일단 화의 연계를 통해 표식을 최대한 중첩시킨 후.

“연살화극(聯殺花極).”

최강의 4융합 검무로 이론상 가능한 최대치의 데미지를 뽑아내는 것.

심지어 현재 그리드가 사용 중인 무기는 벨리알의 지팡이+열망의 무아검이다.

<벨리알의 지팡이+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

등급:신화(초월)

…중략…….

*지력 30퍼센트 상승

*마법 공격력 40퍼센트 상승

*화염 속성 공격력 30퍼센트 추가

*암흑 속성 공격력 30퍼센트 추가

*전격 속성 공격력 15퍼센트 추가

*공격 시 일정 확률로 화염(大) 방출

*공격 시 낮은 확률로 환각 발동

*공격 시 낮은 확률로 붉은 벼락 소환

★공격 시 일정 확률로 검은 불꽃 폭발

*마법 캐스팅 속도 30퍼센트 상승

*3가지 종류의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 가능. 단, 숙련이 요구됨.

*화염 마법과 암흑 마법 동시 캐스팅 성공 시, 각 마법의 위력이 200퍼센트 증가

*마법을 캐스팅할 때마다 5,000의 데미지를 흡수하는 실드가 자동 생성. 실드를 타격하는 대상은 상태 이상 공포와 슬로우에 걸립니다.

★화염 방출, 환각 발동, 붉은 벼락 소환, 검은 불꽃 폭발 등의 옵션이 발동할 경우 마법을 캐스팅한 것으로 간주

*마법 치명타 확률 20퍼센트 상승. 마법 치명타 데미지 150퍼센트 상승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은 개별일 때보다 조금씩 떨어진다. 합체 과정에서 검과 지팡이가 각자의 형태를 잃은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여파다.

또한 옵션에도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단 하나.

*마법을 캐스팅할 때마다 5,000의 데미지를 흡수하는 실드가 자동 생성. 실드를 타격하는 대상은 상태 이상 공포와 슬로우에 걸립니다.

★화염 방출, 환각 발동, 붉은 벼락 소환, 검은 불꽃 폭발 등의 옵션이 발동할 경우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으로 간주

이 미친 사기 옵션이 그리드를 반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물며 상대방이 마법에 취약한 오크였기 때문에 효과가 더욱더 컸다.

“쿠륵……!?”

허공을 연신 박차고 도약하던 도중 연살화극에 베이고 큰 상처를 입은 테루찬.

전대 오크 로드와의 대결 이후 최초로 피부가 벗겨지고 살갗이 잘려 나간 그가 더 큰 투지를 불태우며 역공을 가했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템빨왕을 감싸는 반투명한 보호막.

괴력으로 찢어발기고, 고함을 질러 날려 봐도 잠시뿐.

템빨왕이 검무를 추거나 검은 불꽃을 폭발시킬 때마다 재생성되며 스스로 움직이는 4개의 손과 함께 주인을 보호한다.

안 그래도 단단한 갑옷과 요상한 부츠를 무장하고 있는 주제에 철두철미하게 몸을 지킨다.

“등껍질에! 쿠륵! 숨은! 쿠르륵! 거북이 같구나!!”

크게 조롱해 보지만 테루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보호막을 파괴할 때마다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고 공포심이 피어오른 까닭이다.

물론 테루찬은 종의 정점답게 ‘다수의 상태 이상 면역, 혹은 빠르게 회복 가능’이라는 보정을 받고 있었고, 성격상 공포에 완전히 저항했다. 둔화 수치 또한 낮게 적용받았다.

하지만.

“놈……!”

퍼펑-! 펑!!

“역시……! 마법사……!”

퍼엉……!

허공에 떠오른 채로 대도를 휘두르는 테루찬의 공격 속도는 조금이지만 확실히 느려졌다.

시청자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둔화에 불과하다 해도 초월의 격을 쌓은 그리드에겐 크게 다가왔다.

푸욱-!

테루찬의 대도에 강타당하고 경직된 갓 핸드들 사이로 창인지, 지팡이인지, 검인지 모를 무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것에 명치를 정통으로 찔린 테루찬은 미동조차 안 했다.

“간지럽다……!”

타고난 육체에 급소란 없었으니까.

테루찬은 자신의 피부와 근육이 갑옷보다 단단하다고 믿었다.

그 어떤 도검도 침범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피부와 근육을 단련시켰다고 자부해 왔다.

인간과 비교하면 조악한 도구나 사용해 왔던 오크가 템빨을 이해할 리 만무한 것이다.

“…쿨럭!?”

콧방귀 뀌던 테루찬의 입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의아해서 시선을 내려다본 그는 자신의 명치를 찔렀던 그리드의 무기가 그대로 피부를 파고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깜짝 놀란 테루찬이 발악적으로 대도를 휘둘렀다.

어느새 슬로우를 극복해 벼락같은 속도가 폭발했기에 그리드는 반사적으로 스킬을 전개했다.

“흑화.”

콰아아아앙-!

최대 속도 도달.

그리드의 몸이 점차 뇌광에 휩싸였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테루찬의 공격들을 회피하면서 검무를 밟은 그가 서늘히 읊었다.

“초연살극(超聯殺極).”

푸푹-!

푸푸푸푸푸푹!!

“…크억!”

전사가 비명을 지르다니.

더없는 수치다.

이를 가는 테루찬의 암석 같은 거구가 지상으로 추락한다.

그리드는 그를 굳이 뒤쫓지 않았다.

백열하는 상태로, 허공에 뒷짐 지고 선 채 발을 한 번 구를 뿐이었다.

“내리쳐라.”

콰릉-!

천둥 번개와 함께 하늘이 갈라졌다.

거대하고 푸른 용이 그리드의 등 뒤로 강림했다.

드래곤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

그 정체불명의 괴물이 동반한 번개들이 그리드의 발밑 전장을 모조리 휩쓸었다.

그러자.

‘한 번, 두 번, 세 번…….’

테루찬이 황급히 셈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드와 몇 합을 겨뤘는지 계산해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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