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76화 (966/1,794)

템빨 52권 - 3화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매우 낮은 듯....

-그러게.

오크의 행군을 놓고 ‘대악마 이후 최악의 재앙’이라고 떠들며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슬슬 안정을 되찾아갔다.

-대악마 때하고는 확연히 달라.

대악마는 인간을 가축 이하로 취급했었다. 인간을 일방적으로 학대하고 학살하며 조롱했다.

반면 오크는 달랐다.

그들 또한 인류로 분류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

마족과 달리 상식이 통하는 상대였고 대악마처럼 잔인하지도 않았다.

힘이야말로 정의라는 자신들의 사상을 인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에게도 살아갈 영토가 필요하다는 것.

“나는 위대한 전사들을 이끄는 로드, 테루찬! 우리 위대한 전사들에게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 따위는 없다! 쿠륵! 쿠루룩! 순순히 백기를 들고 땅을 바치면 너희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요새도시 하울.

폴드 왕국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는 3만의 정예군이 늘 상주하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들이 병사들을 통솔했고 재능 있는 기사들이 선두에서 침략자를 물리치곤 했다.

그래, 하울의 군대는 용맹무쌍하다.

설령 제국군이 하울을 침략할지언정 그들은 용감히 맞설 것이었다.

폴드 왕가가 제국의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템빨국에 복속한 이유 또한 그들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빌어먹을 놈들. 왜 하필 우리 왕국을 탐내는 거야? 우리 말고 풍요로운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게 말일세. 이런 척박한 땅을 가져서 뭐에다 쓰겠다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모르는 거 아닐까요? 의외로 말이 통하는 상대인 것 같은데 잘 설명하고 달래면 물러나주지 않을까요?”

하울의 군대조차도 오크 대군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최소 2미터의 신장을 자랑하는 검은 피부의 오크 10만 마리가 성벽 아래 득실거리는 모습은 백전노장들에게도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다.

특히 선두의 오크 로드가 내뿜는 패기가 무시무시했다.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꽤 많은 병사들의 바지가 이미 축축이 젖어있었다.

“으음....”

하울의 영주이자 폴드 왕국 무력의 상징.

수천만 수호기사 플레이어들의 우상으로 유명한 ‘베즐 후작’이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대화라. 좋은 방법이군. 성문을 열어라. 내가 직접 나서서 대화를 해보겠다.”

“안 될 말씀이십니다!!”

후작의 부하들이 대경실색했다.

확실히, 오크들은 의외로 신사적이었다. 마치 기사도를 숭배하는 기사 같았다.

그들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길에 지나쳤던 작은 마을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지간한 인간보다 오크가 낫다는 생각을 했었을 정도다.

하지만 연기일 수도 있다.

애초에 적이다.

우리의 사령관이 적진 한복판으로 나서겠다는데 잠자코 있을 바보는 없었다.

“저들이 후작 각하를 해치거나 인질로 잡는 순간 요새는 끝입니다.”

“맞습니다! 부디 신중하소서! 차라리 소장을 내보내주십시오!”

“대화를 요청해놓고 대장은 틀어박혀 숨어있으라? 오크들이 잘도 응하겠군. 제대로 비웃겠어.”

“그냥 항전하시죠! 각하께서 친히 나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놈들은 결국 오크! 몬스터입니다! 대화가 통할 리도 만무합니다!”

“무턱대고 싸우자고?”

“우리에게는 3만의 강병이 있습니다! 성에서 농성하면 능히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왕도에서 급히 원군을 파견했다고 하니 희망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

베즐 후작이 묻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후작의 시선은 성문 위에 꽂혀있는 커다란 창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크 로드 테루찬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부터’ 집어던졌던 창이다.

성벽에 균열을 발생시키고 있는 그것은 수십 명의 기사들이 힘을 합쳐도 뽑아낼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해온 것처럼 깊숙이 박혀있었기에.

“길게 버텨봐야 이틀이다. 저들이 총공세를 시작하는 순간 성벽이 허물어질 것이고 요새는 철저히 짓밟힐 테지. 무의미한 저항으로 희생자를 늘리느니 우선 대화를 시도하는 게 맞다.”

“하지만 후작님께서 봉변을 당하셨다간 그 이틀조차도 버틸 수 없게 됩니다.”

“저들이 내 목을 치는 순간 요새를 버리고 왕도로 퇴각해라. 샤이닝 전하께서 즉시 사태를 헤아리시고 너희들을 품어주실 것이다.”

“저희보고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비겁한 겁쟁이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물론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있겠지. 하지만 이날의 선택이 조국을 지키는 유일할 길이었음을 조만간 모두가 알게 될 터이니 괘념치 마라. 조국을 위해서 치욕을 견뎌라.”

“각하!!”

사람들은 더 이상 베즐 후작을 말리지 못했다. 부하들이 몸으로 만든 장벽을 힘까지 써서 돌파한 그가 직접 성문을 열고 성 밖에 나갔다.

“이런....!”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귀족들과 기사들이 다급히 성벽 위로 달려갔다.

오크 로드 테루찬과 대면하고 있는 베즐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버티고, 지키는데 특화 된 수호기사.

그중에서도 정점인 베즐 후작의 몸집은 무척 커서 거인 같았지만 오크들 사이에서는 도리어 왜소하게 느껴졌다. 특히 테루찬과 비교하면 어린 아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이 요새의 책임자이자 폴드 왕국의 후작위에 있는 베즐이라고 하오. 오크 로드 테루찬이여, 당신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소.”

“쿠륵. 크르륵. 말하라.”

테루찬은 무척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적진 한가운데 홀로 뛰어든 가냘픈 인간의 용기가 그는 매우 기특했다.

“우리 폴드 왕국의 영토는 대륙에서도 가장 척박하기로 유명하오. 그 흔한 산과 강도 드물고 바다도 없소. 오크가 굳이 정복해봤자 영양가가 없는 것이오.”

“그러니 다른 왕국을 침략해라? 쿠륵.”

“....부디 물러나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이오.”

폴드 왕국에서 출몰하는 몬스터의 종류와 숫자는 다른 왕국과 비교해서 월등히 많다.

지난 세월 동안 늘 선봉에서 싸웠던 베른 후작은 수만 마리 몬스터의 숨통을 끊어왔다.

여태껏 몬스터로 여겨왔던 오크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 베른 후작으로서는 무척 낯설고 힘든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체 망설이지 않았다.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폴드 왕국은 정복할 가치조차 없는 나라. 부디 물러나주시길 간청 드리오.”

조국을 폄하하는 일.

제아무리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목이 있다 해도 용서받지 못할 중죄다.

특히 베른 후작은 평생 조국을 위해서 싸워온 인물이니만큼 더욱 큰 자책감과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오크들이 물러나주길 바라는 그의 입장에선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복할 가치조차 없는 나라.

그것은 세간의 평가이기도 했으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테루찬이 큭큭 웃었다.

“우리 전사들에게 있어선 폴드 왕국의 영토야말로 최고의 터전임을 모르는군.”

“....?”

베즐 후작은 오크의 ‘무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속세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그들이 아무 것도 몰라서 폴드 왕국을 침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화가 통할 거라고 믿었던 근거다.

이곳을 정복해봤자 얻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오크들이 순순히 물러나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폴드 왕국의 영토야말로 최고의 터전이라니?

당황하는 베즐 후작에게 테루찬이 씨익 웃어보였다.

어떤 맹수의 것보다도 커다란 어금니가 위협적이다.

“쿠륵. 우리는 몬스터를 사냥함으로서 단련하고 허기를 채운다.”

“....!”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쿠륵. 쿠르륵. 폴드 왕국이야말로 우리의 터전으로 적합한 것이지.”

이런 낭패가.

기껏 엿봤던 희망이 헛된 꿈이었음을 깨달은 베즐 후작이 심호흡하며 충격을 달랬다.

동시에 빠르게 판단했다.

당장 돌아가서 병사들을 이끌고 퇴각해야한다고.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폴드 왕국 전역의 군대가 왕도로 집결해 농성하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도 금방 꺾였다.

‘저건....!’

퇴각은 불가다.

붉은 점 표범.

몬스터를 사냥할 정도로 강력하고 말보다 몇 배나 빠른 맹수 수천 마리가 오크들에게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표범대를 발견한 베즐 후작의 시선이 떨리는 것을 엿본 테루찬이 자비를 내렸다.

“용기가 가상한 인간이여.”

“....?”

“내 앞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쿠륵. 그 위풍이 넘치는 태도로 보아 그대 또한 전사일 터. 쿠르륵. 전사를 예우하는 의미에서 그대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

기회!

희망을 잃은 채 꺼져가던 베즐 후작의 눈동자에 다시금 빛이 깃들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할 판국에 오크 로드가 직접 기회를 준다하니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부디 부탁드리오!”

다급히 외치는 베즐 후작에게 테루찬이 제안한 것은.

“나와 싸워라.”

결투였다.

심지어 베즐 후작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의 결투.

“나, 위대한 오크 로드 테루찬과 10합 이상을 겨룬다면. 쿠륵. 쿠르륵. 그대를 전사로서 존중하고 순순히 물러나도록 하겠다. 쿠륵.”

“....!”

베즐 후작은 믿기지 않았다.

자신과 싸워 이겨보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10합을 겨루기만 하면 군대를 물려주겠다고?

너무 유리한 내용인지라 도리어 의심이 든다.

경계하는 베즐 후작을 테루찬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를 따르는 전사들이 지켜보고 있고 너희 인간들이 지켜보고 있다. 크륵. 이 자리에서. 쿠르륵. 내가 거짓을 지껄인다면. 쿠륵. 나는 명예를 잃고 로드의 자리에서 추방될 것이다.”

신뢰해도 좋다는 뜻.

생각해본 베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제안에 응하겠소. 부디 약속을 잊지 말아주시오.”

썩은 동아줄일지언정 붙잡는 수밖에 없다.

이 동아줄을 붙잡지 않으면 결국 기다리는 건 파멸뿐이다.

결의를 다진 베즐 후작이 방패와 검을 꺼냈다.

불퇴의 기사.

타국의 기사들에게 존경 받는 것은 물론이고 수천 만 수호기사 플레이어들조차 우상으로 꼽는 그가 자세를 잡자 오크들이 크게 술렁였다.

몸 전체를 방패로 가린 채 검을 역수로 쥔 그가 내뿜는 기세가 상당했던 까닭이다.

도무지 공격할 틈이 안 보였다. 억지로 공격해봤자 가로막히고 반격당할 것 같았다.

테루찬이 대소를 터뜨렸다.

“역시! 내 예상대로 뛰어난 전사로구나! 크하하하하!!”

저녁과 새벽의 사이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피부가 판금보다 두껍다.

꿈틀거리는 근육들은 바위를 통째로 갖다 박은 것처럼 우람하다.

수박을 한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에 가득한 굳은살들은 그가 단지 타고난 힘에 의존하는 짐승이 아니라 단련을 거듭해온 전사임을 증명한다.

오크 로드 테루찬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가 베즐 후작을 압박했다.

하지만 베즐 후작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 또한 역전의 용사.

가장 약한 나라에서 태어난 그는 언제나 불리한 싸움만 해왔다.

강한 적에게 버티거나 물리치는 방법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와라!’

이를 악 문 베즐 후작이 온갖 방어 스킬을 전개했다.

하나하나가 플레이어의 궁극기와 견주는 스킬 7개.

‘저중 하나만 배울 수 있어도 최강의 탱커가 될 것이다.’라고 수호기사 플레이어들이 말하곤 하는 베즐 후작의 성명절기들이 베즐 후작을 수백 년 간 뿌리내린 거목처럼 만들어주었다.

그의 방패 위로.

꽈아아아아아앙-!

테루찬의 대도가 꽂혔다.

그리고.....

“쿨럭....!”

베즐 후작의 몸이 100미터 바깥까지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가, 각하!!”

하울 요새의 3만 병사들이 경악했고.

-존나 세....

전 세계 시청자들과 네티즌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수호기사들이 궁극적 목표라고 알려진 베즐 후작이 단 일격에 허물어지는 모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테루찬은 제자리에 선 채 베즐 후작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제 고작 1합이다. 쿠륵.”

“끄.... 끄윽....”

간신히 몸을 일으킨 베즐 후작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방패를 지지대 삼아 서서 테루찬에게 검을 겨눴다.

방어가 무의미할 정도로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하는 상대.

그를 상대로 10합의 겨루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공격밖에 방법이 없음을 그는 단 일격에 깨달은 것이다.

물론, 방법은 먹히지 않았다.

쩌엉-!

콰자작!!

베즐 후작의 검이 테루찬에게 닿기도 전에 반월을 그리는 테루찬의 대도가 베즐 후작을 강타했다.

1회, 2회, 3회.

거기까지는 간신히 방패로 막아내는 베즐 후작이었으나 곧 정신이 혼미해져서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전쟁 방송을 시청 중인 전 세계 모든 탱커들이 회의감을 느꼈다.

궁극의 탱커조차 버티지 못하는 공격력이 존재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누가 탱커가 되기를 자처했겠는가.

그렇다.

오크 로드 테루찬의 힘은 탱커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고 이는 상식의 파괴였다.

테루찬의 존재감이 대악마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한편.

“끅.... 끄으윽....”

베즐 후작은 테루찬과 채 5합도 겨루지 못한 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종(種)의 정점 앞에서 그는 태어나 최초의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았고, 폴드 왕국의 힘으로는 멸망에 맞설 수 없음을 눈치 채며 절망했다.

테루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회를. 쿠륵. 놓쳤군. 훌륭한 인간 전사여. 쿠르륵. 돌아가라. 그리고 부하들과 함께 두려움에 떨면서 기다려라. 쿠룩. 우리의 진군을.”

“.....”

베즐 후작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대로 상처 입은 몸으로 돌아가 병사들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할지 그는 두려웠다.

나의 패배로 말미암아 곤두박질쳤을 병사들의 사기를 어찌 달래야할까....

무슨 염치로 병사들에게 함께 싸우자 외칠까....

상처 입은 몸을 추스르는 베즐 후작의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파앗-!

하늘에서 한 줄기 섬광이 떨어지더니 한 사내가 나타났다.

흑발을 나부끼는 그는, 머리에 왕관을 얹고 있었다.

오크 로드 테루찬과 베즐 후작은 물론이고 현장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너는. 뭐냐?”

테루찬이 물었다.

수억 명 시청자 모두가 들려올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템빨왕.”

“....왕?”

테루찬의 눈빛에 호승심이 깃들었다.

템빨왕이라는 자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경위가 무엇인지, 그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왕은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을지가 그는 알고 싶을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다는 듯이 씰룩이는 테루찬의 어깨를 엿본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덤벼.”

대답은 없었다.

테루찬의 어깨가 크게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길이 2미터가 넘는 대도가 그리드의 가슴으로 날아가 꽂혔다.

-아....

각국 방송 채팅창이 시청자들의 탄식으로 물들었다.

최고의 탱커가 방패로 막아도 소용없던 공격.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그것을 막아낼 방법은 요원하다는 게 사람들의 분석이었다.

그리드가 한발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그래서 오크 로드의 힘을 엿볼 수만 있었다면 이런 불의의 습격을 허용하지 않았을 테고 승부가 시시하게 끝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생각하며 아쉬워하던 시청자들이 뒤늦게 충격적인 광경을 엿봤다.

4개의 흑금색 손.

언젠가부터 등장하지 않았던 그리드의 옛 상징물 <갓 핸드>가 테루찬의 대도를 가로막고 있는 광경이었다.

“재밌는. 쿠륵. 장난감이군!”

힘껏 대도를 휘둘러 갓 핸드를 뿌리친 테루찬이 그리드를 재차 공격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궤도로 파고든 대도가 그리드의 하단에 꽂혔다.

한데.

“....!?”

물러난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테루찬이었다.

어떤 알 수 없는 반발력이 발생해서 테루찬의 대도를 튕겨낸 까닭이었다.

“마법사. 인가?”

“대장장인데?”

“....?”

파직-!

뇌전이 그리드를 감쌌다.

둥실, 허공에 떠오른 그리드가 자신보다 머리 2개는 큰 테루찬과 시선을 나란히 맞췄다.

“10합. 나한테 10합만 버티면 살려주마.”

“....?”

인간은 미친놈도 왕이 될 수 있는 건가?

진지한 의문에 휩싸인 테루찬이 처음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대도를 풍차처럼 회전시킨 후 투척하여 대상을 갑옷 째로 꿰뚫는. ‘방어력을 100퍼센트 무시하는’ 그야말로 최강의 공격 스킬이었다.

한데 그것이....

휘리릭-!

푹!!

역으로 되돌아와 테루찬의 가슴을 꿰뚫었다.

“....쿠륵.”

왜일까.

테루찬은 즐겁기보다 매우 화가 났다.

오랫동안 고대해온 호적수를 만난 거 같긴 한데, 어째 기쁘기보다는 짜증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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