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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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2권 - 1화
개벽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했다.
찾아가는 숲마다 엘프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해변마다 둘러선 갑인들이 씨름하며 놀았다. 어느 산에는 강아지 귀를 단 야인들이 나타나 상인들에게 장난 쳤고 온 마을 곳곳에 오크들이 서성였다.
이종족들과 함께하는 일상을 상상해본 사람이 세상천지에 몇이나 될까?
평소 열심히 웹소설과 만화를 탐독해온 지적인 플레이어들은 쉽게 적응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변화에 큰 혼란을 겪었다. 말로만 들었던. 혹은 말로도 듣지 못했던 이종족들의 출현에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혼란은 잠시일 뿐, 사람들은 변화에 금방 적응했다.
누군가는 이종족과 협력해 새로운 기회를 엿보았고, 누군가는 이종족의 일원이 되기를 선택했으며, 또 누군가는 이종족의 순수함을 이용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종족을 몬스터처럼 사냥하고 거래하는 족속들도 발생했다.
이종족이고 나발이고 간에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 라는 결론이 단기간 내에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 템빨국은 새 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어이, 거기! 무거운 짐은 오크들한테 부탁하라고!”
“척후는 야인들에게 맡겨라! 그들의 후각이 우리의 눈을 월등히 앞선다!”
편견 없는 사회.
출신, 신분, 종족과 관계없이 능력만 있다면. 혹은 열정만 있다면 기회를 주고 합당한 보상을 내리는 것이 바로 템빨국이 제시한 사회였고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템빨왕 그리드가 불합리를 겪어본 인물이기에 그의 사상이 템빨국을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 라고, 혹자는 평했으나 진실은 요원하다.
차별과 조롱을 겪던 시절의 ‘찌질이 그리드’는 현재의 그리드와 너무 큰 괴리감을 주었으니까.
옛날 그리드는 이랬다, 옛날 그리드는 저랬다.
누군가가 실컷 떠들어 봤자 사람들은 크게 실감할 수가 없었다. 정작 과거의 그리드를 논하는 사람들 본인부터가 지금 내가 진실을 말하는 건지 거짓을 말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엘프들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야?”
템빨궁 회의실.
어떤 안건이 있을 때마다 십공신들이 모여 의논했던 장소다.
늘 왁자지껄했던 이곳도 이제는 적적하다.
커다란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사람, 그리드와 라우엘 단 둘뿐이었다.
“네, 여전히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각 숲의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인간들과 마찰을 빚을 뿐, 인간과 협력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까지 신뢰 못하는 건 좀 섭섭한데....”
그리드는 엘프가 겪어온 고통을 알고 있다.
그들은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폭력보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들에게 탐스럽고 만만한 먹잇감으로 낙인 찍혀왔다. 긴 역사 동안 그들이 겪은 희생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플레이어조차도 그들을 노예로 삼으려고 시도한 바 있다.
한때 상왕이라고 칭송 받았던 키르 말이다.
그로부터 엘프들을 구원한 인물이 다름 아닌 그리드였고.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씁쓸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엘프는 상처 입은 종족. 그들이 전하를 신뢰할지언정 전하의 백성들까지 신뢰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나마 템빨국 영내에 있는 숲에는 얼씬도 안 한다는 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의리인 것이겠죠.”
“시간이 약이 되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근데 엘프의 개체는 상당히 적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들이 대륙 전역의 숲을 지배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해?”
“엘프족 자체가 상위종인데다 각 부족을 이끄는 ‘테’들의 무위가 굉장하니까요. 그리고 숲의 짐승들이 그들에게 호의적이라고 하네요. 수백, 수천 마리의 짐승들이 엘프들의 명령에 따라서 숲을 침략하는 인간들을 공격하기 때문에 각국의 군대와 플레이어들은 숲을 탈환하지 못하는 실정이랍니다.”
“하긴, 엘프들이 키르에게 당했던 것도 야탄의 정수 때문이지 본래 그들은 무척 강했어. 더군다나 정령도 있고 말이야.”
한 손에 꼽히는 최상위 랭커들조차도 12테는 감당 못할 것이다.
전투 공간이 ‘숲’인 이상 그리드도 주의해야할 정도로 테들은 강력했다.
엘프의 개체가 비록 소수일지언정 각지의 숲을 점령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제국이 나선다면 이야기가 바뀌겠지만 말이다.
“제국의 입장은 어때?”
“제아무리 엘프들이라도 제국령은 침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국이 굳이 나설 명분이 없으므로 제국과 엘프 간의 충돌은 없겠죠. 덕분에 우리와 제국만 노났습니다.”
“....?”
“템빨국과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숲을 이용할 수 없게 됐잖습니까. 숲에 있는 광산들이 가동을 멈추게 되었고 벌목, 수렵, 채집 등 온갖 경제활동에 지장이 생겼습니다.”
“그 말은....?”
“광물과 목재, 약초, 가죽 등의 거래품목들의 시세가 급등하고 있는 것이죠. 이미 눈치 빠른 플레이어들은 엘프들의 활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해당 품목들을 사재기 해놨다는 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개인의 경제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보다 제가 한 발 더 빨리 움직여서 물품들을 사재기 해놨고요.”
“템빨국과 제국의 숲들은 모두 정상 가동 중인 상태에서 말이지?”
“네.”
“....미쳤군.”
그렇지 않아도 템빨국과 제국은 무구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대장장이 NPC를 거느리고 육성해온 제국과 수천 명의 대장장이 플레이어, 그리고 고급, 장인급 대장장이 NPC들을 대거 거느린 템빨국.
그 두 개 국가가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아이템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었고 특히 ‘고위급 아이템의 시세’는 템빨국이 정한다고 봐도 무방한 실정이었다.
한데 거기에 온갖 자원들까지 독점하게 생겼으니 경제시장 자체가 템빨국과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돈이 지닌 힘을 고려해 봤을 때, 어쩌면 세상은 사람들이 체감하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하게 될지 모른다.
템빨국과 제국이 서대륙 전체를 양분하는 시대까지 머지않았을 수도 있다.
“.....”
“두려우십니까?”
기뻐하기는커녕 딱딱하게 굳는 그리드의 표정을 엿본 라우엘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그리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거 알아? 나는 아직도 내 나라를 전부 둘러보지 못했어.”
“.....”
“요렐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위치해 있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는지, 또한 인구는 몇 명이며 특산품은 무엇인지 모두 종이쪼가리를 통해서 전달 받고는 있지만 내 두 눈으로 직접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런 도시가, 마을이 무려 수백 개야. 이런 내게 지금보다 수십 배는 더 큰 영토가 쥐어진다고? 수백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섬기게 된다고?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황제로 즉위하셔서 여러 왕을 책봉하고 그들과 책임을 나누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하란 황실도 전하의 황위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건 더 무서운데.”
동료들은 신뢰한다.
다만 동료들의 곁에 꼬이게 될 날파리들이 걱정이다.
예를 들어 십공신들을 왕으로 책봉할 경우.
그들은 각자의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곁에 두게 될 것이고 개중에는 반드시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들이 존재할 것이다.
템빨국, 템빨단은 서서히 오염될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리드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란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리드가 솔직히 털어놓자 라우엘이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황제의 재목은 아니시군요.”
“알아줘서 고마워. 내게 역량이 있었다면 이런 사소한 걱정들 따위 애초에 하지도 않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사람이야. 황제라는 자리는 내가 감당 못해.”
너무 겸손한 평가다.
얼마 전 샤이닝 왕자에게 실패작을 하사한 사건만 봐도 그리드는 정말 많은 부분을 살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그리드의 입장을 순순히 수긍해주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한다는 건 온갖 부작용을 일으키게 마련이니까.
또한 그리드가 지금보다 몇 배나 커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사람은 못 된다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럼 전하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템빨국을 착실히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키워놓고 지존의 자리를 유지하는 게 목표십니까?”
“흐음.... 얼마 전까지는 그랬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어.”
“....?”
“지존은 과정이자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
“신들의 실체, 칠악성과 쫓겨난 신들, 양반과 환국, 파그마와 대악마.”
Satisfy의 근간이 되는 에피소드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싶다. 그리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지.”
“.....”
라우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재물, 명예, 권력.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목표가 지금의 그리드에게는 시시한 2차원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드의 사고는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라우엘의 생각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에는 뭐, 은퇴해서 작은 대장간이라도 하나 운영하면 좋을 것 같고. 치매 예방을 위해서라도 소일거리 정도는 해야 되잖아?”
“하하.... 그것 참 즐거운 말년이겠군요. 모든 걸 이루고 은퇴한 뒤에도 매일 작은 충족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마음이 편하고 재밌겠어요.”
“바로 그거야.”
“대장간은 어디에 차리실 생각인데요?”
장소를 묻는 게 아니라 차원을 묻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현실과 Satisfy, 2개의 차원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리드가 히죽 웃었다.
“그야 당연히 둘 다지.”
***
[바이올렛 왕국이 멸망하였습니다.]
[바이올렛 왕국 소속이었던 플레이어들의 신분이 ‘난민’으로 바뀝니다. 난민은 스태미나 하락 속도와 입는 피해량이 증가하며....]
[어스름족 오크의 왕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위대한 오크 로드 ‘우루찬’의 포효가 대륙을 뒤흔듭니다!]
예정 된 역사가 완성됐다.
무서운 회복속도와 번식력을 자랑하는 오크대군의 침공 앞에서 바이올렛 왕국은 채 3달을 버티지 못했다. 여러 국가가 파견했던 원군들도 큰 도움이 못 됐다는 뜻이다.
새로운 왕국의 탄생.
수백 년 만에 등장한 이종족의 국가는 많은 승자를 배출했다.
종족을 오크로 바꾸고 바이올렛과의 전쟁에서 공헌도를 쌓은 플레이어들이 <투사>라는 새로운 클래스를 개방하거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하는 등의 보상을 얻은 것이다.
“오크들의 물량공세 앞에서는 제국이나 템빨국도 난처할 것 같은데?”
여론이 술렁였다.
템빨국과 제국이 양분할 줄 알았던 서대륙의 패권을 어스름족 오크가 위협할 것으로 분석했다.
한데 의외로.
“잠잠하군.....”
오크들은 세력 확대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손에 넣은 영토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어떤 사고가 터지기 전까진 말이다.
[오크 로드 ‘우루찬’이 대결에서 패배, 사망하였습니다!]
[대결에서 승리한 ‘테루찬’이 새로운 오크 로드로 등극하였습니다!]
[테루찬이 선언합니다!]
“우리! 오크는! 더 큰 영토를 원한다!! 쿠룩! 쿠루룩!”
새로운 지도자의 뜻에 따라 오크들의 진격이 개시됐다.
여러 왕국이 지속적인 침략과 약탈을 당하기 시작했고 개중에는 폴드 왕국도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