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22화
‘아니 왜 쓸데없는 소릴 해가지고.’
천지를 발밑에 둘 오만한 청룡의 부츠.
새롭게 제작한 부츠에서 그리드가 느끼는 감상은 ‘완벽’이었다.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최고의 아이템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했다.
굳이 아쉬움을 꼽자면 재구성과 무적 후 복구 옵션의 존재 정도?
부츠의 내구력이 무한인 마당에 내구력 손상 시, 형태 파괴 시 회복하는 특성이 있어봤자 뭐하는가?
애초에 내구력이 손상 될 일도, 형태가 파괴 될 일도 없으니 쓸모없는 옵션이었다.
하지만 재구성은 <베리드의 발굽>이라는 재료가 발생시킨 기능이며 무적 후 복구 옵션은 <두 시대의 주역> 칭호가 발생시킨 기능이다.
탐욕을 재료로 아이템을 만드는 이상 그 2개 옵션의 발생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 셈이었다.
또한 그 2개 옵션이 존재한다고 해서 어떤 손해를 유발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리드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한데.
-자칫 <뇌신> 스킬 때문에 트롤이 될 우려가 있어 보이지만 정말 재수가 없지 않는 이상 걱정할 부분이 아닌 것 같고....
라우엘의 한 마디가 초를 쳤다.
뇌신.
완전한 물리내성을 갖추게 되지만 마법에는 취약해 지는 확률성 스킬.
마법에 강한 적을 상대로 발동했다가는 그대로 골로 가는 수가 있다.
물론 뇌신의 발동 확률 자체가 낮고 디메리트보다는 메리트가 크기 때문에 ‘어지간히 재수 없게 아귀가 맞지 않는 이상’ 뇌신으로 손해 볼 확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썩을.”
그리드는 대체적으로 불운하다.
한 번씩 거대한 행운이 작용하는 것은 불운의 축적이 발생시킨 결과라고 믿게 될 정도로 쓸모없는 부분들에 있어서 재수가 없었다.
‘뇌신 때문에 망하는 상황이 생길 것 같은데....’
그리드가 큰 걱정에 시달렸다.
저주처럼 엄습해온 라우엘의 염려를 계속 곱씹으며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이내.
‘훗.... 그런 뻔한 전개에 또 당할 리 없지.’
신뢰하는 힘에 뒤통수 맞는 전개.
이미 여러 번 겪었다.
대표적으로 브라함의 동화가 있다.
제2회 국가대항전 PvP 결승전 당시.
최후의 패로 브라함을 꺼냈던 그리드는 브라함의 트롤링으로 인해서 크라우젤에게 패배한 바 있다.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으나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뻔한 전개다.
내 운명의 신이 지닌 스토리텔링 능력이 삼류 작가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또 같은 전개가 나올 리 만무했다.
‘물론 위기는 겪을 수 있겠지.’
마법사와 싸울 때 뇌신이 발동하는 경우, 당연히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뇌신의 공격은 마나 번 효과를 발휘한다.
설령 최악의 위기와 직면할지라도 마나 번 능력을 잘 활용해서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킬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잘하면 돼.’
다가오는 행운을 온전히 거머쥐고 불운은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 비로소 능력.
상기하며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부츠를 착용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부츠가 그리드의 외관을 훨씬 더 멋지게 꾸며주었다.
거울 앞에 선 그리드는 만족의 미소를 그렸다.
‘롱부츠로 만들기를 잘했어.’
당연히 더 많은 재료가 소모됐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부츠의 면적이 커진 만큼 보호되는 부위도 커졌고 그만큼 방어력도 상승했으니까.
본래 금속으로 제작하는 롱부츠는 움직임의 불편을 초래하고 속도 저하 등의 부작용을 야기했지만 경도, 강도, 취성 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아다만티움의 특성이 부작용을 차단해버렸다.
“신속한 몸놀림, 흑화.”
이상적인 검을 꺼내며 스킬을 사용한 그리드가 최고 속도 상태에 돌입했다.
플레이어의 최대 이동 속도는 100미터를 5초에 주파하는 수준이었지만 초월의 격을 쌓고 제약을 푼 그리드는 4초 주파가 가능했다. 탐욕, 노에와 비견되는 속도였다.
쿠와앙-!
퍼어엉-!
콰콰쾅-!
그리드가 연병장을 가로지를 때마다 폭음이 발생한다.
휘몰아치는 흙먼지를 꿰뚫고 나부끼는 마기가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어냈다.
“오우야....”
새들조차 지저귀지 않는 이른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오며 투덜거리던 병사들도,
“저게 뭐야....?”
병사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자 하품을 삼키던 기사들도 모두 정신이 번쩍 떠서는 연병장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병장을 전속력으로 주파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왕이었다.
내 가족과 조국을 지키겠노라 입대해놓고도 아침마다 앓는 소리 하던 병사들, 한 자루 검과 꺾이지 않는 충절로 이름을 날리겠노라 다짐해놓고도 밤마다 포기할까 고민하던 기사들 모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는 것이다.
그리드가 지난 한 달 동안 대장간에 틀어박힌 채 밤새 일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하께서야말로 가장 피곤하실 텐데....’
‘군에 귀감이 되고자 이른 아침부터 연병장을 달리시다니....’
[병사들의 의욕과 사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미친?’
솔져.
에트날 왕국의 해군 특무대 출신인 그는 코크로 섬 전쟁 당시 극검에게 패배하고 이후 쭉 템빨단에 의탁한 ‘군인’ 플레이어다.
템빨국 건국 과정에서 많은 활약을 펼치고 이후 실력과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아스모펠의 부관으로 승진한 그는 최근 아스모펠의 공백을 채우느라 혈안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아스모펠을 대신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각종 임무를 수행하는 등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다.
일개 플레이어가 아스모펠급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을 발휘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아무리 동료들과 힘을 합쳐도 솔져는 수만 명의 병사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매일 같이 떨어졌고 훈련 효율이 나빠졌다. 왕도 라인하르트의 군대는 답보 상태에 놓여있었다.
한데 이 순간.
“구보 준비 완료!”
“전군! 전방을 향해 함성!!”
“우와아아아아아!!”
“.....”
최근 매사에 의욕 없던 병사들이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떨어졌던 사기가 전쟁 시기처럼 승천해서 하늘을 찔렀다.
단지 그리드가 연병장에 모습 한 번 드러냈다는 이유로 이렇게 된 것이다.
‘역시 특별해.’
힘찬 함성과 함께 연병장을 떠나버리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지켜보던 솔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템빨국.
이제 대륙을 대표할 정도로 커져가고 있는 대국이 여전히 그리드 한 명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이 그는 정말로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져.”
“네!”
감탄하고 있던 솔져가 그리드의 부름을 받고 힘차게 대답했다. 현실에서도 군인 출신인 그는 군기가 정말 바짝 들어있었다.
연병장 한복판에 선 그리드가 손을 까닥였다.
“내려와. 대련 한 번 하자.”
“영광입니다!”
솔져는 망설이지 않았다.
천하의 템빨왕과 대련할 기회를 마다할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설령 몇 합 겨루지 못하고 패배할지 몰라도 큰 배움의 기회다.
“하압!!”
곧바로 대도를 뽑으며 몸을 날린 솔져가 그리드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과연 통합랭킹 5천위권의 실력자답게 만만찮은 기세였다.
그의 공격을.
꽈앙-!
그리드는 무기조차 뽑지 않고 다리를 휘둘러서 막아냈다.
“....!?”
검은 금속의 부츠가 발생시키는 반발력이 자신의 검을 밀쳐내자 당황한 솔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우선 반발력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짧은 시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저 정체불명의 부츠와 충돌하는 일을 피하고 상체를 노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퍼엉-!
“....!?”
갑자기 전광에 휩싸인 그리드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도약이 아닌, 완전한 비행이었다.
<브라함의 부츠>도 없이 말이다.
‘수인족 왕의 눈물을 써서 새로 만든 마법 부츠인가?’
생각이 스쳐감과 동시.
“내리쳐라.”
콰자작-!
그리드가 허공을 한 번 박차자 한 줄기의 벼락이 떨어져 솔져를 덮쳤다.
그것은 말 그대로 벼락.
인간이 반응해서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솔져는 그대로 관통 당했고,
[30,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태이상 ‘감전’에 걸렸습니다!]
“....!?”
무방비해졌다.
그리드는 이미 솔져의 등 뒤로 내려와 있었다.
“수고했어.”
“....넵.”
무기조차 꺼내지 않고.
단지 신발 한 켤레의 성능만으로 5천위권의 랭커를 압도한 그리드.
만약 목격자가 있었다면 이거 버그라고 떠들어댔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리드와 솔져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위력은 지극히 편린에 불과함을.
‘신발 한 켤레만 신은’ 그리드는 한 명의 랭커가 아닌 수십 명의 랭커를 상대했더라도 그들을 농락했을 것이다.
청룡의 부츠가 지닌 유틸성이 그만큼 뛰어났다.
전광으로 비행해서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내리쳐라를 전개, 거기에 다음 공격을 연계하면 거의 대부분의 상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짜릿하구만.’
역시 게임은 템빨이다.
오래간만에 실감한 그리드가 흐뭇해서 웃었다.
그리고 솔져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었다.
템빨단에 가입하겠노라 결심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한 칭찬이었다.
***
바이올렛 왕국의 요청에 응한 왕국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연합군 결성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고립 된 바이올렛 왕국은 어스름족 오크의 침공을 홀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고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각종 매체를 통해 어스름족 오크의 강함이 전파됨에 따라서 오크로 종족을 변경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급기야 수세에 몰린 바이올렛 왕국이 대륙 각지에 원군을 요청했다.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터이니 부디 우리 왕국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공문이 템빨국에도 도착했다.
물론 템빨국은 요청을 거부했다.
가우스 왕국을 비롯한 템빨국 인근의 왕국들 또한 요청을 거부했다.
템빨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할지 모를 마당에 타국을 도울 여력이 그들에겐 없었다.
반면 템빨국과 멀리 떨어진 국가들은 대부분 바이올렛 왕국에 원군을 파견했다.
세력을 키우고 싶은 그들의 입장에선 바이올렛 왕국이 제시한 대가가 탐났던 것이다.
폴드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토지가 황폐하고 자원이 적어서 가난한 폴드 왕국은 끊임없이 출몰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단련 된 30만 장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군대를 파견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겐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럼 저희도 원군을 보내지 않겠나이다.”
폴드 왕국 또한 바이올렛 왕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폴드 왕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템빨국을 섬겨온 바.
템빨국의 의지가 곧 그들의 의지였다.
“통신구로 대화하면 될 일을 뭐 굳이 찾아와서.”
폴드 왕국의 1왕자 샤이닝.
템빨국의 뜻에 답하고자 친히 템빨국까지 달려온 그를 앞에 앉힌 그리드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표정은 흐뭇했다.
그리드는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태도가 변하지 않고 예의가 바른 샤이닝 왕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샤이닝 왕자는 ‘야탄교의 교황청 습격 사건’에서 목숨을 걸고 아이린과 로드를 지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 핑계로 전하의 용안을 뵙고 좋지 않습니까. 변함없이 강녕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고 기쁩니다.”
너스레를 떠는 샤이닝 왕자는 약간 격양 된 상태였다.
제국을 변화시킨 인물.
템빨왕 그리드는 샤이닝 왕자의 우상이었다.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말 한 번 예쁘게 하는군. 찾아온 김에 왕비와 왕자도 만나보도록 해. 두 사람 다 기뻐할 거야.”
“영광입나이다.”
“잠깐.”
공손히 읍한 후 물러나려는 샤이닝 왕자를 그리드가 불러 세웠다.
폴드 왕국이 비록 최빈국이라고는 하나 ‘강병을 거느렸다.’는 설정을 지닌 국가.
이미 차세대 국왕으로 내정 된 샤이닝 왕자 또한 네임드 NPC였다.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
“선물이다.”
“....!!”
바다가 없는 나라.
척박한 폴드 왕국에서는 볼 수 없는 ‘상어’의 모습을 본 따 만든 투명한 푸른 대검.
다름 아닌 <실패작>을 건네받은 샤이닝 왕자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10년 넘게 써온 검이야.”
기형적인 사용 조건을 지닌 지라 동료들에게 선물하기는 무리가 있다.
충분한 푸른 오리하르콘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과거와 비교해서 대장장이 기술이 크게 발전한 지금의 내가 실패작을 만든다면 기존의 실패작보다 월등히 뛰어난 결과물이 탄생할 것이다.
....라는 사실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리드는 샤이닝 왕자에게 최대한 생색낼 수 있게끔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
“지금의 네가 그 검을 다루긴 힘들 거다. 하지만 다룰 수만 있게 되면 크게 강해질 테지. 앞으로 당분간은 그 검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단련하도록 해.”
“저, 전하....”
“왕비와 왕자를 지켜줬던 의리와 희생에 대한 보답이야.”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찌 저 따위가 이런 선물을 받....”
“잔말 말고 가져가.”
“.....”
속국이란, 오로지 종주국에 복종하며 착취당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기존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폴드 왕국과 템빨국의 관계는 어떤가.
템빨국을 섬기기 시작한 이래 폴드 왕국은 쭉 받기만 해왔다.
템빨국 덕분에 제국으로부터 지켜졌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되었으며 왕실이 평안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 순간 또 새로운 선물을 받았다.
대대로 왕실의 가보로 삼아도 될 명검이.
템빨왕의 상징 중 하나가 샤이닝 왕자의 손에 쥐어졌다.
“....전하께서 주신 은혜들, 영원토록 잊지 않고 갚아나갈 것입니다.”
감격해서 한동안 말문을 닫고 있던 샤이닝 왕자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다짐해보였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작은 호의가 또 하나의 영원한 우방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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