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17화
“영우 씨, 저하고 데이트하기 싫다고 했었죠?”
그렌할이 돌아간 후.
유라가 기운 없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챈 그리드가 황급히 손사래 쳤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야하니까 싫다는 거였지. 유라 너하고 데이트하는 게 싫다고 말한 적은 없어.”
“그게 그거 아닌가?”
눈치 없어 보일 정도로 순진한 반트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른 십공신들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유라는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웨이브 넣어 끝이 말린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은 그녀는 푸른 해변 배경의 화보집 속 아이돌을 연상시켰다. 청량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뜨거운 날씨가 잊어질 정도로 기분이 좋다.
“왜, 왜 그래?”
이 미모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다.
유라가 몇 초 동안이나 빤히 바라보자 얼굴을 붉힌 그리드가 먼저 시선을 피했고.
“이제야 이해하겠어요.”
덩달아 얼굴을 붉힌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늘 뒤쳐져온 이유요.”
“....?”
“데이트, 당분간 그만 해요.”
“응....?”
“저는 더 강해질 거예요.”
유라는 한 자리 수 랭커다. 그녀의 게임 플레이 시간은 ‘당연히’ 매일 한도를 소진했다. 남는 시간조차도 최적의 컨디션 유지와 정보 수집에 할애할 정도로 그녀의 Satisfy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특별한 게 아니다.
랭커들은 물론이고 Satisfy를 통해서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 혹은 Satisfy 자체를 즐기는 골수 유저들도 마찬가지로 하루 중 대부분을 Satisfy에 투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똑같이 투자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능률을 내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랭커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라는 생각했다.
그리드처럼 되기 위해서는 뇌가 깨어있는 시간 전부를 Satisfy에 집중해야 한다고.
좋아하는 남자와 오늘은 뭘 할까 고민하며 두근거리는 행위가 얼마나 큰 사치였는지를 깨달았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지옥문을 여는 유라에게 그리드가 소리쳤다.
“오해하지 마!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네게는 운이 따랐던 거다.
그리드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듣는 게 싫었었다.
내가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행운 덕분이라고?
세상에 나처럼 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딴 개소리를....
지금의 내 위치는 순전히 내 노력으로 이룬 결과다.
그리드는 그렇게 믿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행운을 운운하는 네티즌이나 전문가들에게 증오심마저 느끼며 치를 떨었다. 그들이 내 노력과 업적을 비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많은 것을 이룬 지금에서야 그리드는 비로소 인지했다.
운이 따라줬던 게 맞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타고난 것도, Satisfy가 출시된 것도, 파그마의 기서를 얻었던 것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내가 누린 행운이다.
이제 그리드는 쉽게 인정했다.
운빨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들어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유라와 나의 격차?
노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순전히 행운이 찾아온 횟수의 차이다.
그리드는 주장했으나.
“행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유라는 부정했다.
“누구에게나 운은 따라요. 하지만 기껏 찾아온 운을 제대로 붙잡고 활용하는 사람이 드물 뿐이죠.”
유라는 그리드의 운빨조차도 능력이며 기술이라 하였다.
“당신을 보고 알게 됐어요. 저는 아마 무수히 많은 행운을 놓쳐왔을 거예요. 매사에 당신만큼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혹은 당신과 달리 포기한 일도 많았을 테니까요.”
포기보다는 타협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유라는 굳이 포장하지 않았다.
어떤 고난과 역경과도 우직하게 맞서온 그리드 앞에서 타협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도 부끄러웠다.
유라의 몸이 지옥문을 넘기 시작했다.
“적어도 당신에게 짐은 되지 않는 사람이 되서 돌아올 게요.”
그것이 신호였다.
“나도 간다.”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나중에 보자. 연락은 꾸준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리드, 제발 별 탈 없어야 해?”
라우엘을 제외한 십공신 전원이 그리드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 같이 짙은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리드의 등을 바라보기보다 그리드가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다들 왜....”
꽤 긴 이별이 될 것이다....
직감한 그리드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의 발전이 동료들에게 소외감을 줬던 건 아닐지를 고민했다.
그에게 크리스가 콧방귀를 뀌어보였다.
“잊었어? 우리의 목표도 한때는 지존이었다.”
“.....”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퇴물이 될 수는 없잖아?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는데 최소한의 자격은 증명해야지. 안 그래?”
“크리스....”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더 강해져 있어라. 돌아오자마자 대련 신청 걸 테니까 바짝 긴장하고 있으라고.”
유라와 페이커를 제외한 십공신 전원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그들 모두가 영주의 권리를 반납함으로서 스스로 영토를 포기했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족쇄를 끊어낸 셈이다.
수많은 책임을 벗어던진 십공신들은 앞으로 개인의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집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말했다.
“그리드 님이 걱정해야할 정도로 나약한 분들이 아닙니다. 이참에 그리드 님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내 일...?”
“그야 당연히 대장일이죠. 그리고.”
힐끔, 라우엘의 시선이 집무실 바깥으로 향했다.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카심을 숙소로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의 로드였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셔도 좋지 않을까요?”
라우엘은 당부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로드 왕자가 15세가 되기까지 채 4년도 남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부디 많은 정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15세가 되는 순간 로드는 온갖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대륙급 천재.
로드는 시스템 공인의 초네임드 인재였지만 끝까지 템빨국의 전력으로 남아있어 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할 수도 있었고, 제국의 황자들처럼 자칫 비뚤어질 수도 있었다.
부모의 역할이 큰 것이다.
***
“아이구, 우리 로드! 우쭈! 우쭈쭈쭈!!”
라우엘은 그리드가 로드를 조심스럽게 대해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로드의 미래?
로드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새끼를 예뻐해 주고 싶을 뿐이다.
“우리 강아지 그동안 잘 지냈어?”
매일 같이 땡볕에서 굴러도 타지 않는 흰 피부가 부드럽다.
로드의 말랑말랑한 뺨과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는 그리드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십공신들이 떠나자 찾아온 공허조차 달래지는 기분이다.
로드도 마냥 싫지 않은 눈치였다.
벌써 11살이 됐으니 사춘기가 찾아오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늘 곁을 비우는 아버지를, 어린 소년은 기특하게도 원망하기보다 이해하며 동경하고 있었다.
“어마마마의 말씀을 잘 듣도록 노력하고 밥도 잘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지냈어요.”
“그래, 정말 잘했다. 그리고....”
찰랑이는 흑발, 푸르고 큰 눈동자, 오뚝 솟은 코, 살짝 치켜져 올라간 입매.
부모의 이목구비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섞어놓은 생김새다.
보면 볼수록 예쁜 로드를 꽉 끌어안은 그리드가 로드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카심을 달랜 것은 정말 큰 공이었다. 네가 카심을 살렸어.”
“소자의 스승님이고 소자의 벗입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니 칭찬하지 마세요.”
로드가 의젓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은 몰라도 자신의 인연은 소중히 대해야하는 법이지.”
“루비 이모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대하라고 하셨어요.”
“그렇긴 하지.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인연이니까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지. 힘든 사람을 보면 돕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드 님이 저런 말을?
“쿨럭, 쿨럭!!”
제드노스와 라엘라를 비롯한 템빨단 초창기 멤버들.
떠난 십공신들을 대신해서 각 영지의 차기 영주로 임명 된 그들이 마침 그리드의 집무실로 찾아왔다가 놀라 사례에 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한 그리드가 로드를 목말 태우고 창가로 다가갔다.
도시의 전경이 펼쳐지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막 잘해주진 말고. 그럼 호구 잡.... 아니, 너무 일방적인 도움을 주다보면 상대방을 나태하게 만들 수도 있고 너 자신을 지치게 만드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네, 아바마마. 소자 이해했사옵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듣는다.
각 분야의 스승들이 로드를 칭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쁨을 넘어서 감격한 그리드가 신나서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대장간으로 갈 참이다. 함께 가서 구경하지 않겠느냐?”
당연히 좋다고 따라올 줄 알았다.
한데....
“소자, 아바마마의 작업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공교롭게도 선약이 있어요.”
“선약? 누구랑?”
“여자친구요.”
“.....”
레베카의 딸 후보 출신 미소녀 군단을 말하는 건가.
하나의 몸으로 수백 명의 여자친구를 상대하려니 바쁠 수밖에 없겠지.
매일 같이 온갖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여자친구들과의 데이트까지 잊지 않고 챙기는 로드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조금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그리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약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재밌게 놀다 오너라.”
“넵. 아바마마께서 배움을 주신대로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오겠습니다.”
“....그, 그래. 근데 오늘은 누구랑 데이트하는 건데?”
그리드는 로드의 여자 친구 중에서도 몇 명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예쁜 애들 중에서도 유난히 예쁘고 심성이 고운 애들이 10명 정도 됐었는데 혹시 그중 하나가 아닐까?
어쩌면 미래의 며느리가 될 수도 있는 상대를 미리 알아두려 하는 그리드에게 로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을 꺼냈다.
“수애 누나요.”
“이런 미친!!”
그리드의 머릿속에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당 못한 그가 재차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어서! 어서 가라!!”
바람의 장벽을 전개, 그리드와 로드의 공간을 분리시킨 제드노스가 로드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곧 그리드의 입에서 튀어나올 험한 말들이 어린 소년의 귀와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을 제드노스는 원치 않았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한 로드가 집무실을 떠났고.
“XX!! 이런 뭣 같은 경우가!!”
제드노스가 바람마법을 거두자마자 그리드의 욕이 집무실을 뒤집어놓았다.
그리드가 제드노스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수애가 얼마나 예쁘고 착하고 훌륭한 여자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변태라고!!”
“켁.... 켁켁....”
“그 변태가 어째서 한동안 잠잠한가 싶었는데 내 아들에게 마수를 뻗쳤던 거였어?! 엉?!”
“켁...! 켁켁!!”
“저토록 어리고 순수한 아이에게 그 여자는 대체 무슨 짓을....!!”
“오.... 오애....”
“뭐? 오예? 오예는 개뿔!”
“해.... 오해라고....”
질식사.
최악의 죽음을 경험할 뻔했던 제드노스가 간신히 풀려났다.
못 본 새 무식할 정도로 강해진 그리드의 근력에 혀를 내두른 그가 설명했다.
“수애는 로드를 자식처럼, 조카처럼 보살펴 왔습니다. 페이커가 말하기를 로드가 온갖 교육에 시달리느라 정신적으로 지쳤을 때 그녀가 보살펴준 것을 계기로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하더군요.”
“....아.”
Satisfy에는 막장 스토리가 많다.
아침 드라마나 고대 신화의 내용을 연상시킬 정도로 개막장이었다.
그래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니란다.
하긴 아무리 막장이라도 변태 성인 여자가 꼬맹이 건드리는 스토리가 나오는 건 너무 심하다.
안도한 그리드가 머릿속에 떠올랐던 온갖 더러운 상상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8개 영지의 새로운 영주로 임명 된 동료들에게 앞으로 고생해달라고 부탁한 뒤 대장간으로 향했다.
드디어 광물을 창조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