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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67화 (957/1,794)

템빨 51권 - 16화

“참회? 개소리!!”

유토피아는 없다.

대다수를 만족시키는 상황은 존재할지 몰라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상황은 존재하기 힘들다.

지금, 카심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십공신들은 새로운 제국과의 앞날에 큰 기대감을 품는 반면 카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아수라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 믿어온 레가스조차도 흠칫 놀랄 정도로 카심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너희 제국은 우리의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불길하다 하였다.”

“.....”

“우리의 귀가 크다는 이유로 제국의 동향을 엿듣는 간자라는 누명을 씌웠고, 우리의 팔이 길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 하였다.”

“.....”

“우리의 땅을 침략한 너희 제국의 병사들에게 여성들이 욕보였다. 모든 남성들이 너희 제국의 기사들에게 사지가 잘려 죽었다. 너희 제국 귀족들은 우리의 왕족을 우리 안에 가둔 채 감상했다.”

“.....”

가족과 친구는 물론이고 겨레 모두가 끔찍한 모멸을 겪다가 몰살당했다. 나라가 통째로 사라졌다.

최후의 날을 회상하는 카심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렌할은 그저 침묵했다.

상처 입힌 자는 상처 입은 자를 추량할 수 없는 바.

어떤 말로도 지금의 카심을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2황자 듀란달이 주도했던 네로족 학살 사건은 제국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던 최악의 죄악이니만큼 더욱 그랬다.

카심의 단도가 그렌할의 목을 겨눴다.

“너희들이 섬기는 황족이.”

“.....”

“우리에게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던 황자가.”

“.....”

“우리 왕의 머리를 횃불로 지지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

“참회....? 참회라고!? 죽은 자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건만! 이미 잃은 존엄은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건만....! 네놈들은 이제와 죄책감을 벗겠답시고 이미 죽어 말 못하게 된 자들에게 사죄를 논하는가!!”

“.....”

주륵.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그렌할의 목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독을 품은 카심의 단도가 그렌할의 목을 파고들고 있었다.

“설령 네놈들이 진심이라 할지언정....! 지난 잘못을 반성하며 천년만년 참회할지언정 이미 죽은 자들의 넋을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은 네놈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쿠와앙-!

템빨왕의 알현실은 황제의 알현실과 비교해서 무척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공간이었다. 수십 개의 기둥이 솟아있는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그림자가 존재했고 카심의 능력이 발휘되기에 적합했다.

척-!

처처처처처척!!

독에 중독돼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렌할의 주변을 수십 명의 그림자 병사들이 에워쌌다. 병사들은 하나 같이 창을 손에 쥐고 있었다.

카심이 포효했다.

“나는 네로족의 마지막 생존자, 카심! 제국의 공작이여! 네게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오랜 세월 정을 나눠온 로드와의 의리 때문일까.

의외로 카심은 냉정했다.

오직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서 살아온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는 제국의 수뇌 앞에서 이성을 유지했다.

제국의 사신.

심지어 공작이라는 작위에 있는 그렌할을 일방적으로 해친다면 제국과 템빨국의 관계가 처참하게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고 정정당당한 결투를 신청했다.

얼마 전, 상처 입은 공작들이 템빨국으로 호송됐을 때도 카심이 그들을 해치지 않았던 이유 또한 결국 템빨국 때문이었다.

카심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어느새 10년 이상 로드의 곁을 지켜온 카심 역시 이제는 템빨국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카심....”

카심의 태도가 그리드의 마음을 더욱 더 안타깝게 만드는 그때.

“좋소.”

그렌할이 카심의 결투 신청을 수락했다.

“우리의 결투는 제국이 네로족에게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 템빨국은 일절 관계가 없음을 나의 부하들이 증명할 것이오.”

“전하!!”

그렌할의 부하들이 사색이 되었다.

그림자의 왕 카심이 당대 최고의 어쌔신이라는 사실을 그들이라고 모르겠는가.

그렌할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렌할의 부하들은 그렌할이 대결을 피하길 바랐다.

“네로족의 원한은 2황자가 책임져야할 문제입니다! 전하께서 책임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급기야 초조해진 부하가 소리치자 그렌할이 으름장을 놓았다.

“닥쳐라! 나 또한 황자와 다르지 않았다!”

제국의 이민족 말살정책은 황명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그렌할도 몇 번이나 동참했었다. 굳이 학살을 자행하진 않았으나 그들의 영토를 빼앗고 포로로 삼아왔다.

황명이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네로족 사건은 제국 내에서도 지탄 받았을 정도로 특이한 경우로 2황자 듀란달이 나빴던 것이다....

그런 건 다 핑계다.

그렌할 또한 누군가에겐 원한의 대상이었다. 제2의, 제3의 카심을 만날 때마다 핑계를 대며 책임을 면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한 이는 응당한 책임을 저야 마땅하며, 그래야만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선황께서 이미 보여주지 않았던가.

“나는 제국의 공작 그렌할.”

마나를 운용하여 독을 몰아낸 그렌할이 갑옷을 벗었다.

“그대의 검을 통해 네로족의 원한을 엿보겠다. 앞으로 제국이 걷게 될 참회의 길이 얼마나 두렵고 험한 길인지 깨닫고 제국에 보다 올바른 참회의 길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잘도 지껄이는군! 네놈에게 염치가 있다면 순순히 죽어라!”

카심이 일갈하자 수십 명의 그림자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찔렀다.

선회하며 대부분의 공격을 회피하고 검으로 쳐내는 그렌할이었지만 수십 개의 공격 모두를 피하진 못하고 상체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들은 그렌할을 더욱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츠카카칵-!

해일처럼 밀려드는 그림자 병사들을 헤치고 나아가 카심에게 도달한 그렌할이 외쳤다.

“나의 죽음은 참회가 되지 않는다! 나를 대신하게 될 자가 참회의 길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불행일지니!”

“....!”

“나는, 살아서 책임지겠다!”

콰쾅-!

콰차차차차착!!

알현실이 순식간에 개판이 되었다.

모든 그림자를 넘나들며 은신, 기습하는 카심과 그를 상회하는 속도와 파괴력으로 그림자를 부셔나가는 그렌할의 전투는 건물이 무너지는 걸 걱정해야할 정도로 과격했다.

탁. 타탓.

행정관 라빗이 주판을 두드린다. 카심과 그렌할에게 수리비용을 물고자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눈앞에 펼쳐지는 전투를 목격하는 십공신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슈카와 극검은 욕설마저 뇌까렸다.

카심을 금방 압도하기 시작하는 제국 공작의 온전한 실력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본인들의 실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여태까지는 ‘플레이어의 한계’를 핑계 삼아 네임드 NPC와의 격차를 순순히 수긍해왔으나.

‘그리드는 공작들만큼이나 강해졌어.’

그리드가 또 다시 증명했다.

플레이어에게 한계란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의 나약함은 단지 노력의 부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드에게 도움도 안 될 만큼 약해.’

‘그런 주제에 그리드가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고 서운해 했다니.’

‘염치도 없지.’

십공신들은 깨달았다.

우리는 그리드를 걱정할 입장이 아니다.

이제 우리의 걱정은 무의미할 정도로 그리드와의 실력 차이가 커졌다.

그리드를 걱정할 시간조차도 나 자신에게 투자해야만 그 격차를 좁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꽈악....

템빨국을 건국했던 시점부터 개인의 무력을 포기한 라우엘.

그 한 명을 제외한 십공신들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들 모두가 빨리 더 강해져야한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콰자작!

승부의 행방이 정해지고 있었다.

생명력이 3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지자 종전과 비할 바 없이 강해진 그렌할이 그림자로 빚어진 수십 자루의 창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있었다.

흩어진 그림자 조각들이 제자리로 되돌아갔고 넝마가 된 카심은 주저앉고 말았다.

쿨럭, 피를 토한 카심이 원통해 땅을 치며 말했다.

“죽여라.”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에 복수하겠다고?

정녕 허황된 꿈이었다.

내 마음은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템빨국에 매혹될 정도로 나약했고, 내 힘은 제국은커녕 공작 하나에게도 닿지 못할 정도로 미천했다.

이참에 속 편히 죽어버리는 게 낫다.

비참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카심에게 그렌할이 말해왔다.

“살아남으시오.”

“네놈 따위가 나를 동정하지 마라.”

“동정이 아니오. 제국이 올바른 참회의 길을 걷는지 감시해주길 바랄 뿐이오.”

“....큭큭, 답답하구나. 네놈들이 천년만년 참회해봤자 무의미하다고 말했을 텐데?”

“감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제국 또한 알고 있소.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위도 아니오.”

“....?”

“제국은 단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원할 뿐이오. 제2의, 제3의 네로족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

“끝까지 살아남아 제국을 감시해주시오. 우리가 경각심을 잃지 않도록 그대가 경고해주시오. 그리고 제국이 네로족에게 저지른 악행은.... 정말.... 정말로 가슴 깊이 사죄하는 바이오.”

이제는 조금쯤 전해지지 않을까.

무릎 꿇은 그렌할이 카심에게 깊이 고개 숙이며 사죄했다.

“....나는.”

검고 큰 카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렌할의 태도를 통해서 제국의 진심을 엿본 그는 허망해졌다. 모든 의욕을 한 순간에 상실하며 몸에서 진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직감한다.

나는, 다시 설 수 없을 것이다.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마저도 깊은 수심에 가라앉는다.

넋이 나간 카심의 동공이 멍하니 천장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사부님!!”

빨리 아버지의 일이 끝나길 바라며 알현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드.

카심의 첫 번째 제자이자 유일한 친구인 어린 왕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시든 식물처럼 쓰러져가는 카심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사부님, 저랑 살아요!!”

“.....”

“제가 사부님을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그것은 천하에 유일한 재능의 직감인가.

아니면 단지 오랫동안 카심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눈치 챌 수 있던 것인가.

그리드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던 카심의 이변을 즉시 간파한 로드의 외침이 수심 깊이 가라앉고 있던 카심의 영혼을 다시 뭍으로 끌어올렸다.

어머니를 닮아 맑고 푸른 로드의 눈동자가 카심의 얼굴을 담았다.

“사부님은 네로족의 마지막 생존자잖아요! 사부님이 죽으면 네로족도 사라지는 거잖아요!”

“.....”

“저랑 같이 오래오래 살아요! 네로족이 다시 부흥할 때까지 제가 사부님하고 함께 힘낼게요!”

“....왕자여.”

로드의 체온이 차갑게 식어가던 카심의 마음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오직 복수만이 내 존재의 이유라고 믿어왔던 카심은 이제 알게 됐다.

내 삶은 헛되지 않았음을.

정녕 헛된 삶이었다면, 이토록 훌륭한 친구를 곁에 두지 못했을 테니까.

숨죽여 고개를 끄덕이는 카심의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그제야 안심하며 옥좌에 주저앉았다.

새로운 시대가 구시대의 망령들을 치유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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