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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66화 (956/1,794)

템빨 51권 - 15화

그리드는 피아로와 함께 템빨국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멀쩡한 귀환 주문서와 워프 시설을 놔두고 굳이 도보를 선택한 이유는 피아로를 향한 배려다.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뤄진 황제의 최후가 피아로를 방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피아로.....’

벌써 며칠 째 아무 말 없이 걷는 피아로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둡고 초췌했다. 종종 화를 참지 못하고 포효하며 질주하는 그를 뒤쫓을 때면, 그리드는 심장보다 마음이 괴로웠다.

피아로가 두 번 다시는 웃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리드는 그런 불안감마저 느꼈다.

모순되게도, 여태까지 피아로가 버텨올 수 있었던 이유는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동료와 가족을 잃고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아로가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황제를 향한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밤마다 황제의 목을 베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한데 기껏 만난 황제에게 복수하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는커녕 저주조차 퍼붓지 못했다.

황제는 멋대로 죽어버렸다.

내가 아닌 다른 놈에게.

“큭....! 크아아아아악!!”

또 다시 발작이 시작됐다.

그리드가 건네주는 육포를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씹어 삼킨 피아로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도끼눈을 떴다. 그리고 성난 황소마냥 발을 쾅쾅 구른 후 포효하며 질주했다.

험한 능선도, 바다처럼 큰 강도, 쏟아지는 폭우와 흉포한 몬스터 무리들도 그를 감히 제지하지 못했다.

어느새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피아로는 계속, 계속 고함을 내지르며 쉬지 않고 몇 개의 산을 넘었고 그를 뒤쫓는 그리드는 점차 지쳐갔다. 스태미나가 고갈되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자연경....’

제국의 공작들이 자연경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자연의 기운을 흡수하는 특성이 피아로의 체력을 쉽게 고갈시키지 않았다.

아직 초입에 불과하다 했는데 이 정도라니....

“허억, 헉....! 허윽....”

스태미나 게이지가 붉게 점멸한다.

몸이 통째로 심해에 잠긴 듯하다.

호흡이 힘들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시야조차 흐려진다.

가장 힘든 점은, 피아로가 느끼고 있을 절망과 분노를 분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라우엘처럼 생각이 깊었다면.

후로이처럼 뛰어난 언변을 지녔다면.

극검 같은 재치나 레가스 같은 순수함이 있었다면.

피아로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

“템빨....코...ㄴ....”

이런 분위기에 말 불러서 뺨을 핥게 만든다?

그럴 순 없다는 생각에 템빨콘 소환을 자제해왔지만 이대로는 죽게 생겼다.

내가 여기서 죽었다간 안 그래도 정서가 불안한 피아로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우려가 있다.

판단한 그리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환 주문을 외치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기사 ‘피아로’가 극한의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경지에 눈 떴습니다!]

[기사 ‘피아로’의 <자연경> 스킬이 초급 단계를 넘어서 중급에 진입하였습니다!]

“....!”

그것은 마치 만물의 축복.

강과 바다, 산과 숲, 하늘과 땅.

세상 모든 자연이 어느새 땀에 젖어있는 피아로에게 자신의 정기를 나눠주었다.

이어서.

[당신의 육감이 공간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스파앙-!

“....?!”

피아로에게 한참 뒤쳐져있던 그리드는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던 피아로의 등이 바로 코앞에 있음을 자각했다.

‘설마 이게?’

[공간이라는 개념에 덜 구애 받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렴풋합니다.]

초월자의 격이 상승하면서 생긴 효과를 상기한 그리드의 뇌리로 몇 가지 기억이 스쳤다.

공간 자체를 접어버리듯이 목표에게 순식간에 도달했던 절대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양반 가람은 순보라 했다.

일종의 축지법인 그것을, 지금 이 순간 그리드가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격을 계속 쌓다보면 스킬화 되는 건가?’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그리드였지만 기쁨은 희미했다.

지금 그의 정신은 온통 피아로에게 쏠려있었으니까.

급기야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는 그에게.

“전하.”

피아로가 고개를 돌렸다.

격정에 찼던 음성과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던 눈동자가 모두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드리웠던 깊은 어둠도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제 손으로 황제를 처단하지 못한 것은 심히 아쉬운 바이나.”

“.....”

“....제게 고개 숙였던 황제의 모습을 목격한 두 눈을 도려내고 싶고, 염치없는 사죄를 듣게 된 두 귀를 잘라내고 싶으나.”

“.....”

“어쨌든 황제는 죽었습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깊은 능선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이 피아로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어주었다.

“저의 과거는 끝입니다.”

“....피아로.”

햇살 때문일까.

담담하게 말해나가는 피아로의 얼굴이 밝고 따스해 보인다.

“앞으로 저는 전하와 함께 미래를 살아가겠습니다.”

[당신의 기사 ‘피아로’와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는 깊은 유대를 느낍니다.]

[새로운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유대>

현재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대상 목록.

★피아로★

유대 레벨 1.

함께 있을 시 모든 능력치 1퍼센트 상승.

유대 대상의 생명력이 위험 수위에 놓일 경우 감지 가능.

시름에 빠진 이를 위해 몇날 며칠이고 말없이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마음이야 어찌됐든,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라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만사를 제쳐두고 피아로의 곁을 지켰다.

왕으로서의 책무도, 경제적인 활동도, 지존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어떤 계산에 의거한 행동이 아닌, 단지 그러고 싶어서였다. 피아로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비록 위로의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마음이 피아로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고마워.... 정말.... 정말로 고마워.”

드디어 마음의 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된 그리드가 안도하며 웃었다.

동시에 울었다.

내가 칸을 더 소중하게 여겼더라면.

칸과 더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면 그와도 유대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마지막 길에 최소한 고통만큼은 없지 않았을까.

‘젠장, 이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건데.’

그리드는 부모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어서 아이린, 로드, 세희와 친구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고 브라함, 아스모펠, 메르세데스도 그리워졌다.

‘다들 잘 지내는 건가?’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는 꾸준히 서신을 보내오고 있었다.

누구를 발견하여 설득했으며, 누군가는 끝내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들은 무사하며 현재 위치는 어디라는 등.

최대한 많은 정보를 그리드에게 전달했지만 역시 눈에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었다. 힘든 상황들은 감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브라함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영혼이 파괴된 여파로 희미해진 존재감이 회복 될 기미가 없다.

“기왕 자는 김에 푹 자고 꼭 회복해요.”

이제는 습관이 된 혼잣말.

브라함에게 말하며, 템빨콘과 피아로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회복한 그리드는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

“꽤 큰 위기를 겪어놓고도 혼.자.서. 무사히 잘 돌아와서 참 다행이네?”

“그러게. 걱정한 우리가 바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도감이 드네.”

오래간만에 라인하르트로 돌아온 그리드는 아이린과 로드부터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서슬 퍼렇게 날 선 십공신들이었다.

“힘내요.”

으르렁 거리는 십공신들에게 둘러싸인 그리드의 귓가로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많이도 큰 로드와 함께 복도 귀퉁이에 선 그녀는 작은 주먹을 불끈 말아 쥔 채 그리드를 응원하고 있었다.

십공신들의 분노를 짐작하는 눈치였다.

히든 퀘스트 진행 중 전설의 궁사 포비아의 망령과 조우, 궁술 대결을 펼치려던 직전 서사시를 목격하고 퀘스트를 포기했던 지슈카가 밝게 웃었다.

“혹시 지렁이 한 마리가 귓속으로 들어갔어? 잠깐 뇌가 이상한 각도로 움직여서 기사 소환 스킬 잊어버렸니?”

“.....”

해맑게 웃으면서 잘도 끔찍한 소리를....

당황한 그리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유라가 성큼 다가왔다.

벨리알의 죽음 이후 주인을 잃고 폐허가 된 32지옥.

수년에 걸쳐서 그곳을 완벽하게 탐사하고 소멸시키는데 성공한 유라는 33지옥으로 이동, 33위 대악마의 4천왕과 대면했었다.

지옥에서만큼은 4차 전직 전 그리드만큼 강한 그녀는 4천왕 중 3명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마지막 남은 1명을 사살하기 직전 서사시를 목격, 즉시 인계로 귀환했었다.

“영우 씨, 우리 이번 주 데이트 때 놀이공원 가요.”

“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놀이기구 못 탄다고.

초등학생 때 바이킹 타다가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던 사람이 바로 나라고.

이미 한 번 말한 적 있을 텐....

따지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싱글벙글 미소 짓는 유라의 입가가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목격한 까닭이었다.

“주군께서 저를 신용하지 못하시는 이유는 모두 제가 약한 탓이겠지요! 죽음으로 사죄하겠나이다!”

검을 꺼낸 후로이는 할복하려 하고 있었고.

“야, 임마! 네가 일본인이냐!?”

연신 투덜거리던 극검은 갑자기 분노의 대상을 후로이로 옮겨 고래고래 소리쳤다.

씁쓸한 미소를 그린 레가스는 뭔가를 혼자 수긍한 눈치였다.

“그랬군요.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신용하지 못하고 결국 의지조차 못하게 된 지경에 이르신 거군요....”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리드가 의지할 사람은 랭킹 2위인 나 정도밖에 없겠지.”

폰이 콧방귀 뀌었다.

“그리드가 너는 불렀냐? 너나 우리나 거기서 거기지.”

“.....”

페이커는 평소처럼 침묵했고, 반트너는 방패나 가발 득템한 거 없냐고 질문해온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물건은 가져오셨겠죠?”

라우엘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블랙 미스릴 가지러 가셨던 거잖아요?”

“그, 그게....”

그리드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궁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한 후 자신이 왜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는지 이유를 밝혔다.

“분위기가 그런데 차마 블랙 미스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

“.....”

다들 현장의 분위기를 상상해봤다.

황제가 스스로를 불사르고 새 시대를 연 현장.

황자들이 오열하고 모두가 엄숙해진 가운데 그리드가 물건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겠군요.”

결국 라우엘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걱정했다.

“이거 자칫하다간 일정이 엄청 미뤄질 수도 있겠는데요?”

바사라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존재가 되었다.

시스템 공인의 새 시대를 맞이한 제국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될 터였고 그 모든 과정을 바사라가 주도하게 될 테니까.

그리드와의 약속을 잠시 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드의 광물 창조 시점이 미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새로운 광물을 창조하고 싶으실 텐데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일단 참아봐야지 어쩌겠어. 정 안 되겠으면 서신 한통 보내던가 해야지.”

바로 그때였다.

“전하!”

이제는 선임기사가 된 로이먼.

여전히 남장하고 다니는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보고했다.

“지금 성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국의 공작 그렌할이 입성 요청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한창 바쁠 시국에 친히 찾아오다니?

놀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알현실로 모셔라.”

잠시 후.

옥좌에 앉은 그리드에게 공손히 읍한 그렌할 공작이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황제 폐하의 성의입니다.”

[<블랙 미스릴> 10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

“....!”

그리드와 십공신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렌할은 다시 한 번 깊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하란 황실은 템빨왕 전하께 입은 은혜를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템빨국의 적이 즉 제국의 적이며, 제국은 온갖 풍파로부터 템빨국을 지키는 댐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황궁 내에 템빨왕 전하를 위한 궁전을 별도로 마련해 놓았으니 언제라도 방문해 주시면 기쁠 거라고 하셨습니다.”

“.....”

“템빨왕 전하, 제국의 동맹 요청을 받아주시겠나이까? 동맹 파기 권한은 오직 템빨국에게만 있을 것이옵니다.”

그렌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리드도 물론 기뻤다. 꿈에 그리던 결과보다 훨씬 다 이상적인 결과를 이루게 되었으니 가슴이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천장을 올려보았다.

카심의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그렌할 공작 또한 처음부터 카심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제국의 공작들에게는 기척을 읽힐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카심이 밝힌 바 있듯이, 공작들의 실력은 카심보다 한 수 위였다.

그렌할의 말이 이어졌다.

“제국은 변할 것입니다. 무력은 오직 권리를 수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며, 대륙의 모든 인종과 화합하여 공생하는 길을 모색해갈 것입니다. 생긴 게 다르다는 이유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통치의 간편함을 이유로 다른 민족을 짓밟고, 배척하고, 착취하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제국은 기존의 제국이 멸망시켰던 무수히 많은 민족들에게 영원토록 참회할 것입니다.”

카심을 향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듣다 못한 카심이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붉게 충혈 된 그의 두 눈이 그렌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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