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14화
[대제국 사하란의 19대 황제 쥬앙데르크가 서거하였습니다.]
[바사라 공작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바사라 공작령 소속 플레이어 전원 ‘새 황제의 축복’ 버프를 받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경험치 획득률이 5퍼센트 상승하고 사망 시 페널티가 50퍼센트 줄어듭니다.]
바사라의 황위 계승은 놀라울 만큼 수월하게 이뤄졌다.
그렌할과 모르이즈 두 공작이 황제의 유지를 입증했으므로 황자들이 쉽게 현실을 수긍했다?
1황자 롤랑은 그랬다.
너무 수동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황제를 따랐었고 권력욕이 적었던 그는 부친의 뜻을 존중하고 바사라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롤랑을 다음 황제로 만들고자 많은 투자를 감행했던 귀족들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반발을 일으키기도 애매했다.
선황의 뜻을 어길 명분이 부족했을 뿐더러 세 공작들의 권세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바사라의 인품은 매우 훌륭하고 현명하기까지 했으니 그녀가 황제가 된다고 해서 자신들을 해코지할 걱정도 없다는 판단이었다.
반면 2황자 듀란달과 그를 추종하던 세력은 커다란 반감을 보였다.
황제의 아들들이 두 눈 뜨고 살아있는데 황위계승서열 순위에서 밀리는 바사라가 황제가 된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물론, 그들의 외침은 금방 잦아들었다.
이미 세 공작들의 3만 기마대가 황도를 장악한 상태였고 듀란달의 세력만으로는 그들과 충돌하는데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1황자 롤랑이 협조해줬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롤랑은 이미 바사라를 지지하고 있었으니 낭패였다.
‘하나밖에 없는 형님이 호구라 답이 없군.’
듀란달은 남은 권력자들과의 접촉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는데 이견은 없습니다.”
에단의 변절을 목격하고 이변을 예상, 영지로부터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창성 레이첼.
듀란달의 몇 남지 않은 희망이었던 그녀조차도 바사라를 지지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마음이 급해진 듀란달은 영원의 탑을 찾아갔다.
한데.
“누가 황제가 되든 상관없소.”
협력해달라는 듀란달의 요청을 받은 마법왕 골드히트는 냉소할 뿐이었다.
골드히트가 제국을 섬기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제국이 영원의 탑에 적극적으로 원조하겠노라 서약했기 때문.
그는 단지 <강화 마법>을 재현하겠노라는 자신의 원대한 꿈이 중요할 뿐이었지 하찮은 황위 문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새로운 황제가 머리가 텅텅 비어서 탑의 일에 개입하거나 원조를 끊어버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혹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다른 나라로 이주해버리면 그만이다.
대부분의 왕국들이 영원의 탑의 힘과 기술을 필요로 했으니 갈 곳이야 많았다.
“이런 괘씸한 놈들을 보았나! 아아! 황실에 진정으로 충성하는 충신은 정녕 없단 말인가!!”
듀란달은 한탄했다.
황제와 황후의 아들.
자신이야말로 적법한 황위계승자건만 요직에 앉은 놈들이 죄다 바사라를 지지하거나 사태를 방관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 그자가 복귀할 때가 되지 않았나?”
발만 구르던 듀란달은 마지막 희망을 떠올렸다.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반역.
마법왕 골드히트는 방관.
‘죽지 않는’ 마갑 첸슬러는 최후의 전투에서 행방불명.
선황의 그림자였던 베인은 최후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몰락한 다섯 기둥 중에서도 이번 사태와 전혀 무관했던 단 한 명.
바로 카일이었다.
황명을 받들어 무신의 유적지를 탐사하고자 떠났던 그는 듀란달에게 남은 마지막 등불이었다.
다섯 기둥 중에서 가장 약했던 그를 선황께서 괜히 총애하였겠는가?
필시 성장 기대치가 높거나 첸슬러처럼 훌륭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는 반드시 나를 지지해줄 것이며 훗날을 도모할 반석이 되어 주리라.
판단한 듀란달은 와신상담했다.
선황께서 붕어하실 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사병을 이끌고 와 황도를 장악한 바사라.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한 그녀를 듀란달은 반드시 황위에서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카일과 함께 훗날을 도모할 계획을 짰다.
헛된 계획이었다.
“왜 돌아오지 않는 게냐....”
무신의 유적지에서 어떤 변고라도 당한 것일까.
카일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예정일이 훨씬 초과됐음에도 불구하고 황도로 돌아오질 않았다.
듀란달은 초조해졌다. 황좌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
서사시의 등장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목격했던 ‘절대자’의 정체가 무엇이며, 새로운 천 년 역사란 과연 어떤 시대를 말하는가를 놓고 토론을 펼쳤다.
각국 모든 방송사들이 관련 프로그램을 급히 편성했을 정도였으니 ‘전문가’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온갖 분야의 지식인들은 오늘도 역시 방송 패널로 참가해 쏠쏠한 용돈벌이가 가능해졌다.
『그리드의 첫 번째 서사시는 대악마와 마주했을 때 써내려졌었죠. 세계관에서 큰 위치에 있는 존재와 얽혔을 때 비로소 발동하는 것이 서사시라는 시스템인 겁니다. 이번 서사시에 등장한 ‘절대자’ 또한 최소 대악마와 동급의 존재일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죠.』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사시에 등장한 절대자의 정체가 바로 양반 중 하나일 거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정보겠지만, 양반이란 동대륙을 지배하는 ‘환국’의 주민을 지칭하는 말로 그들은 영원에 가까운 수명과 절대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드가 양반 중 한 명의 최후를 목격함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는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즉, 양반의 죽음이 Satisfy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며 앞으로는 동대륙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게 되리란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죠.』
『그렇군요. 하면 영원에 가까운 수명과 절대적인 무력을 지닌 양반에게 최후를 선사할 정도로 강력했던 양반의 원죄는 대체 무엇일까요?』
『현재 시점에서는 그리드만이 알고 있겠죠. 뭐.... 앞으로 여러 에피소드가 진행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실컷 떠들던 전문가들이 입을 다물었다.
스튜디오 바깥의 스탭이 그들에게 어떤 사실을 전달한 까닭이었다.
마침 화면에는 자막이 떠오르고 있었다.
<속보> 사하란 제국의 황제 쥬앙데르크 사망. 4황자 에단의 반역이 주요했던 것으로 추정.
<속보> 차기 황제로 바사라 공작이 즉위.
『험험....』
밝혀진 정황 상, 절대자의 정체는 양반이 아니라 황제였다.
자신들의 추측이 틀리자 당황한 패널들이 헛기침을 뱉었다. 누군가는 귀까지 빨갛게 붉혔다.
분석을 내놓자마자 오답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어지간히 두꺼운 철판을 낯짝에 깔지 않은 이상에야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쟤들은 왜 맨날 틀리냐.
-저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들을 고용하는 방송사들이 문제임.ㅋㅋ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모셔다가 왜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는 거냐고~ 돈지랄도 저런 돈지랄이 없어요.
-전문가들 무시 ㄴㄴ 그리드 얽혀있는 사건 분석할 때만 저렇게 틀리는 거지 평소에는 분석 잘함.
-갓리드....
-아니, 그래서 결론이 뭔데? 새로운 천 년 역사라는 게 앞으로 제국이 써내려갈 역사를 말하는 거였음?
-그렇죠. 기존까지의 황실을 무능했던 것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황실은 겁나 세고 유능해서 제국이 지존되는 전개로 흘러가는 듯.
-근데 그거랑 그리드가 뭔 상관임?
-진심;; 그리드 대체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얼마 전까진 제국이랑 전쟁하더니 대악마 잡을 때는 공작들이랑 편먹고 이번에는 또 황실이랑 엮여버리네;;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가 이해가 안 됨. 제국이 멋대로 템빨국 침략해서 크게 손해 입히고 개고생하게 만든 게 고작 몇 달 전인데 분하지도 않나? 대체 왜 제국이랑 어울리는 거임?
-무서우니까 똥꼬 빠는 거죠.... 아무리 그리드라도 제국을 무슨 수로 감당하겠음? 베리드랑 싸울 때 공작들 봤죠? 공작 둘만 있어도 그리드 그냥 쌈 싸먹을 정도로 강함. 아무래도 그리드가 뒤에서 제국한테 아첨하고 다니는 것 같음.
-그러다가 운 좋게 황제 죽는 모습 보고 서사시 얻고?
-원래 운빨 X망겜이자너~
화면 속 패널들은 어색하게 침묵하는 반면 시청자들의 채팅은 활발하게 떠오를 때였다.
<속보> 새 황제 바사라, 플레이어 그리드를 제국의 은인으로 천명. 사하란 황실은 앞으로 영원히 템빨 왕실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 선포. 제국의 모든 귀족과 황족이 모인 즉위식 현장에서 “템빨국의 적을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라.”고 발언.
-.....
화면에 새로운 속보가 떠올랐고 채팅창 또한 조용해졌다.
뒤늦게 누군가의 채팅이 떠올랐다.
-님들 그냥 다 닥치셈.
***
야탄교가 황비 마리와 4황자 에단을 이용했다. 사악하고 비열한 술수로 그들을 현혹하여 황실을 장악하고 서대륙을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위대하신 선황 쥬앙데르크와 템빨왕 그리드가 그들의 계획을 간파하고 저지했다.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바사라가 발표한 내용이다.
반역의 주체를 본래 제국의 주적이었던 야탄교로 만들어버림으로서 마리와 에단의 죄를 줄였고 이는 민심의 혼란을 억제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그랜드마스터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랜드마스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신민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사하란 황실이 그랜드마스터를 공표하는 일은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것이었다.
그랜드마스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안위보다 그랜드마스터와의 약속을 우선순위에 뒀던 건국황제 사하란의 불충까지 공개해야했으니까.
“아니요.”
천상궁.
그랜드마스터가 머물렀던 장소는 이름부터가 오만하고 불순했다. 황제가 아닌 자신이야말로 지존이라고 천명하는 듯한 이름이었다.
이제 주인을 잃은 그곳을 철거하고 앞으로의 제국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신하들은 주장했으나.
“그대로 두세요.”
황제 바사라는 도리어 천상궁을 보존하라고 명했다.
왜?
신하들은 당황했다.
제국의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천상궁을 없애지 않는 황제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렌할과 모르이즈, 그리고 레이첼 3명의 공작들은 이유를 짐작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주 웃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곳은 그리드 님을 위해서 놔둘 거예요.”
어찌됐든 그랜드마스터는 황실의 조력자였다. 그를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그가 제국을 세웠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드도 마찬가지다.
템빨왕 그리드는 새로운 황실의 조력자였고 그가 없었다면 새로운 제국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상궁.
황실의 수호자를 위해서 세웠던 이곳은, 앞으로 새로운 주인의 쉼터로 존재하리라.
“버몬트 재상.”
“예, 폐하.”
“지금 즉시 템빨왕께 선물을 보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소신이 충분한 예우를 갖춰서 재물을 준비하도록.....”
“보고에 있는 블랙 미스릴 중 절반을 보내시면 됩니다.”
“예?”
버몬트는 물론이고 귀족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 공작들조차도 입을 떡하니 벌렸다.
블랙 미스릴은 황제의 힘과 직결되는 것이다.
황실이 수백 년 동안 축적해온 블랙 미스릴 중 절반을 선물로 보낸다?
그건 보답의 수준이 아니라 희생이다. 어쩌면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아, 아니 될 말씀입니다! 폐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공작들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바사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분께 드릴 보답으로는 이마저도 부족해요. 당장 출발하세요. 아니, 아니에요.”
재차 명령하던 바사라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것이라 보고 안도했다.
근데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기는 개뿔.
한 술 더 떴다.
“제가 직접 찾아뵈어야겠어요.”
“소신이 가겠나이다.”
보다 못한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바사라를 말렸다.
바사라가 황제로 즉위하고 며칠도 되지 않아 자리를 비우는 것은 큰 문제이기도 했고, 그리드와 만나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바사라는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
황제가 된 이후.
주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겠노라는 의지에서인지 늘 눈을 뜨고 다니는 바사라의 미모는 실로 대단했다. 크고 맑은 눈동자가 그녀의 고운 얼굴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들었다. 한데 그녀가 그 예쁜 얼굴로 뺨을 부풀리자 신분과 나이를 잊게 만들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귀족들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