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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64화 (954/1,794)

템빨 51권 - 13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두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야명석의 빛으로 물든 지하의 통로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드 님...?”

“그리드?”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드의 서사시 사건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Satisfy를 플레이하지 사람들조차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자의 마지막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런....!”

연속으로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를 목도한 십공신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채 활동 중이던 그들이 일제히 경직됐다.

그리드의 서사시는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을 체험할 때만 발동하는 것으로 파악 중인 바.

그리드가 바사라와 함께 황궁으로 떠난 직후 떠오른 월드 메시지는 그리드가 어떤 큰 사건에 휘말렸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황궁의 절대자란 필시 황제를 뜻하는 것일 테니, 황제의 목숨조차 위험한 상황일 정도면 그리드 또한 큰 위기를 겪고 있으리라고 십공신들은 판단했다.

길드창에 라우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드 님의 기사로 등록한 인원은 전원 기사 소환에 대비하십시오.

그리드가 자신의 기사로 임명한 플레이어는 템빨단원 중에서도 극히 소수, 십공신 정도에 불과했다.

라우엘의 권고는 십공신들을 겨냥하고 있는 셈이었다.

&현재 당신들이 어떤 입장에 놓여있든 그리드 님의 부름에 즉각 응하도록 하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드 님의 안위입니다.

라우엘의 경고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모두가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큰 위기에 빠졌다는데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게 당연했다.

긴 시간 동안의 탐사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던 사람도, 한 달에 한 번만 리젠되는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 중이던 사람도,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히든 퀘스트를 진행하던 사람도.

‘그리드, 어서 우리를 소환해라!’

모두가 똑같은 심정으로 그리드의 부름을 기다렸다.

***

절대자의 마지막 뒷모습.

시스템의 서술은 황제의 최후를 암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뜻하는 최후가 죽음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드는 직감했다.

황제는 죽을 것이다.

양반 가람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 아니, 칠악성의 화신이라는 실체가 밝혀진 만큼 가람보다 당연히 더 강할 그랜드마스터.

그리고 제국 신민들에게 수백 년 동안 신격화되어온 건국황제 사하란의 검을 손에 넣고 폭주하는 에단.

그들의 첫 번째 제거 대상인 황제가 그들의 눈앞에 찾아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황제를 말리지 못했다.

메르세데스라는 대리인을 통해서 은근한 교감을 나눠온 두 사람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기에.

그래, 그리드와 황제는 머나먼 타인에 불과했다.

둘 사이에는 강렬한 인연 ‘피아로’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

태생, 환경, 입장부터가 달랐고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둘 사이는 악연에 가까웠다.

단지 개인의 입장만 놓고 보면 그리드에게 있어서 황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황제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눈엣가시였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차라리 옳은 관계였다.

그리드에게는 황제의 발길을 멈춰 세울 권리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한데 왜일까.

그리드는 모종의 슬픔을 느꼈다.

이대로 황제가 죽는 편이 낫다.

그래야 나와 바사라 모두가 살고 바사라가 황제가 될 수 있다.

바사라가 황제가 되어야 모든 게 평탄해진다.

바랐던 것 이상의 화합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드의 이성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지?

왜 이토록 슬플까.

내가 언제부터 황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고?

혼란을 느끼던 그리드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황제 쥬앙데르크.

그는 단어 그대로 절대적인 권력가다.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자신의 허물쯤이야 얼마든지 손쉽게 덮어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세상 모든 미녀를 외면하고 평생 단 한 명의 여자만을 사랑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걸 잃은 옛 친구는 외면하지 않고 도리어 늘 걱정했다.

응당 발밑에 두어야할 타국의 왕에게 은혜를 갚겠답시고 자신의 가장 충직한 기사를 보내버리기도 했고, 모든 걸 잃게 생긴 최후의 순간에도 자식들 걱정이나 하고 있다.

황제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인물인 것이다.

그랜드마스터가 조소했던 것처럼. 에단과 브누아 황자의 비난처럼 무능한 황제였을지는 몰라도.

무지로부터 비롯된 죄악을 범했을지언정.

황제는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타락조차 못하는 바보였다.

그리드가 무의식중에 호감을 품었던 이유다.

어쩌면 그리드는 그에게 동질감마저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절대자의 최후는 속죄의 길을 걷는 순례자였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응당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를 희생하였다.]

“오늘날 짐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귀감이 되리라.”

황좌를 위협받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들의 습격을 피해 도망쳐왔던 황제는 비뚤어진 황관을 똑바로 고쳐 썼다. 아들이 벤 어깨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붉게 물들인 망토에 묻은 흙은 털어냈다.

사랑하는 아리아떼의 뺨을 감쌌던 손에 검을 쥐었고, 의지했던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에 방패를 쥐었다.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던 얼굴에는 이제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어둠마저 거둬내는 의지가 그의 눈빛에는 담겨있었다.

어느새 알현실과 이어진 출구 앞에 선 황제가 끝으로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후 사하란의 황제가 될 이들은 짐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오.”

나를 통해서 배울 것이다.

황좌란 당연히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시야가 매몰되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순간 멀어지게 된다.

‘어리석은 황제 쥬앙데르크’를 교훈 삼은 후대의 황제들은 늘 경각심을 품고 현명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은 황제가 출구를 열었다.

그러자 동시에 사하란의 적기가 밀려오며 비밀 통로의 내부를 붉게 밝혔다.

“황제여!!”

짐승처럼 울부짖는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신음했으나 쓰러지는 기척은 없었다.

황제와 두 기둥, 에단과 마장기단, 그랜드마스터와 적기사단.

그들 모두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고 있었기에 굳건히 버텼다.

[절대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겨주지 못할 것임을.]

“폐하!!”

바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너무 빠르다.

그녀까지 위험에 휩쓸릴 것이다.

초조해진 그리드가 알현실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바사라여! 반드시 살아남아 제국의 치세를 인도하라!”

진원진기를 끌어낸 것일까.

황제의 적기가 여태껏 보지 못한 수준으로 폭사하더니 에단의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동시에.

우당탕탕!

바사라의 가녀린 몸이 그리드 일행이 있는 통로 안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절대자는 끝끝내 자신을 희생하였다. 자신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겨내진 못할지언정 몇 대에 걸쳐서 고인 채 썩어가던 제국의 역사에 파문을 일으켜주길 바랐다.]

[두 번 다시는 자신 같은 죄인이 탄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리석은 한 명의 절대자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릴 수 있음을 알아서였다.]

“바사라 공!”

그리드와 공작들이 급히 바사라를 부축했다.

출구가 닫히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친 바사라가 급히 달려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굳게 닫혀버린 문에 매달린 그녀가 오열했다.

“폐하....!!”

바사라의 뇌리에 수십 년 전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어린 쥬앙데르크의 밝은 미소.

어떤 이들에게는 속없다고 비난 받았던 사촌의 그 해맑은 미소가 바사라는 좋았었다.

결코 물들지 않을 백지 같은 아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미소를 잃었고 슬픔과 분노에 물들어갔었다.

나는 왜 그를 돌봐주지 못했는가....

그의 아들이 그의 심장에 칼을 겨누기까지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가....

[절대자의 열망이 하나의 역사를 끝낸다.]

[그는, 절대자를 통해서 목격했다.]

[가장 높이 선 자의 책임이 새로운 천 년 역사를 인도하는 장면을 보았다.]

[한 시대의 끝을 보았다.]

[마지막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선 그는 개인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서사가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느꼈다.]

.....

....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서사시의 두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월드 메시지가 끝났다.

푸화하하학-!

소름 돋도록 끔찍한 파육음이 출구 너머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비명과 금속음, 파열음이 점차 잦아지더니 불길한 침묵이 찾아왔다.

“폐하.....”

바깥 상황을 짐작한 공작들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사라는 숨 죽여 오열했고, 이를 악 문 피아로는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그리드의 시야에는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사시의 두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역사, <천년 제국의 탄생>이 당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천년 제국 역사의 일부가 바로 당신이기도 합니다.]

[서사시 완성 효과로 사하란 황실과의 관계가 특별해졌습니다.]

[사하란 황실은 대대로 당신을 각별하게 여길 것입니다.]

[서사시 완성 효과로 ‘새 시대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을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 달성 보상으로 새로운 칭호 <두 시대의 주역>을 얻었습니다.]

<두 시대의 주역>

쉽게 죽는 사람이었다면 여러 시대를 목격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절대 쉽게 죽지 않습니다.

불굴 효과 강화.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하였습니다.]

[대형 서사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추가로 상승하였습니다.]

[상위종 중 일부가 당신보다 하위종으로 판정 받습니다. 하위종에게는 입는 피해량이 감소하고 공격 시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덜 구애 받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렴풋합니다.]

[신위 스탯이 2 올랐습니다.]

“.....”

그리드가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두려울 정도로 강해보였던 공작들이 이제는 조금 편하게 느껴졌다.

우습게 보인다는 게 아니다.

그리드는 단지 무력의 차이로 대상을 평가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말 그대로 편하다는 거다.

이제는 가람을 만나도 크게 위축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담력만큼이나 실력도 성장했느냐면 그건 아니지만.

“전하....?”

피아로가 움찔 놀랐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본 공작들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드의 고요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들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그랜드마스터를 처음 봤을 때와 닮은 불가해였다.

그리드의 청각과 육감이 바깥의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다.

“원군이 오는군. 에단의 힘도 미약해가고 있으니 우리도 나갑시다.”

“잠시...!”

그렌할이 그리드를 말리려고 했다.

그랜드마스터는 아직 건재할 게 아닌가.

그의 죽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껏 숨어있었는데 이제와 나갔다가 어떤 봉변을 겪을지 모를 일이다.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그렌할은 생각했지만 그를 무시한 그리드는 이미 출구를 열고 있었다.

본래 황제의 적기에만 반응해서 열렸던 석벽.

하지만 이제는 황제가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충격에 휩쓸려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손쉽게 열려버린다.

“......”

온통 피로 물든 알현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랜드마스터와 적기사단, 마장기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고 황제와 첸슬러, 베인 또한 보이지 않았다.

“마침 잘 왔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하란의 검은 그랜드마스터가 수거해간 것일까.

검 대신 황관을 손에 쥔 에단이 황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강한 힘을 사용한 여파일 터.

독에 중독된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황명.... 이다.”

쿨럭, 쿨럭.

각혈한 에단이 꺼져가는 눈빛으로 공작들에게 명했다.

“내 어미.... 어머니를....”

에단의 마지막 바람은 전해지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관을 머리 위에 얹으려다 실패한 그는 결국 잿빛으로 산화해갔다.

뒤늦게.

“아바마마!! 아바마마!!”

“폐하!!”

1황자 롤랑과 2황자 듀란달이 알현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변고를 눈치 챈 즉시 병력을 모았던 것인지, 나름 많은 병사를 이끌고 온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불민한 소자를....! 소자를 죽여주소서! 죽여주소서어!!”

텅 빈 황좌.

피에 젖은 채 바닥을 뒹구는 관을 발견한 롤랑이 달려가 그것을 품에 안고 오열했다.

듀란달은 그저 멍한 표정이었다.

뒷일은 바사라와 공작들의 몫이다.

피아로에게 돌아가자고 눈짓한 그리드가 그전에 잠시 바사라 앞에 서서 말했다.

“황자들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진 말아달라고 선황께서 부탁하셨소.”

“아끼고 보듬어주어도 부족할 분들이에요.”

“.....”

에단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이런 태도라니.

첫인상은 차갑고 냉정해 보였는데, 알면 알수록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다.

미소지은 그리드가 알현실을 떠났다.

“조만간 큰 선물을 들고 찾아뵐게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전하!”

점점 멀어지는 그리드에게 바사라와 공작들이 크게 인사해왔다.

황자들의 반응은 아랑곳 않는 눈치였다.

척!

바사라가 규합해 왔던 것일까.

어느새 황궁에 진입해 있던 공작들의 3만 기병대가 그리드와 피아로에게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3만 명이 한 몸처럼 동시에 올리는 경례 소리가 다시 파랗게 물든 하늘 높이까지 울려 퍼졌다.

Satisfy 오픈과 함께 존재해왔던 서대륙의 지존이 사라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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