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63화 (953/1,794)

황궁의 설계도는 총 19장이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중심부 설계도에는 가장 높은 기술력이 응집돼 있습니다.

최고의 건축 기술을 전수하는 기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습득 효과:장인급 건축 마스터리 스킬 개방. 황궁 구조 이해도 10퍼센트 상승. 역사적인 건축물 제작 확률 영구적으로 대폭 상승.

습득 조건:건축가

무게:0.1

‘엉!?’

칠악성.

사하란.

쫓겨난 신들.

그랜드마스터의 정체와 염원을 알게 된 이후, 범람하는 정보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던 그리드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1미터 간격으로 설치 된 야명석이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는 거대한 통로의 내부가 시야에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곳은 본래 황제만 알고 있어야할 장소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해야하는 장소였다.

황제가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는 건.... 의미가 무척 크다.

‘신뢰하는군....’

단지 한 번 목숨을 구해줬다고 쌓을 수 있는 수준의 신뢰가 아니다.

피아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았던 황제는, 아마 그때부터 내게 큰 감사를 느끼며 나를 은인 취급 해왔을 것이다.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어준 것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피아로가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정처 없이 떠돌며 죽음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며 익숙해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폐인처럼 지냈거나 진즉에 객사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 또한 피아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는데.’

황제의 마음을 읽은 그리드의 기분이 씁쓸해졌다.

피아로가 그리드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사람 구실을 못했을 것처럼, 그리드 또한 피아로를 만나지 못했다면 사람 구실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컨트롤 솜씨는 젬병이었을 테고 온갖 위기를 극복하지도 못했겠지.

그래, 나는 피아로의 일방적인 은인이 아니다.

피아로 또한 나의 은인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큰 용기를 얻었으며 귀감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함께하는 것이 당연한 친구다.

그렇기에.

‘....피아로 당신도 내 부당한 명령을 군소리 없이 따라준 건가.’

피아로를 향한 황제의 마음이야 어찌됐든.

피아로의 입장에서 황제는 백 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철전지 원수다.

피아로의 가족과 동료들을 해치고 피아로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황제였으니까.

하지만 피아로는 분노를 삼켰다.

당장 황제에게 달려가 그를 해치고 싶었을 터인데도 참고 그리드의 명령을 받들어 도리어 황제를 구했다.

내색은 안 했어도 속으로는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을지.

피아로의 심정을 헤아려본 그리드가 큰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다.

‘카심에게도 미안하군.’

전대 란스티어의 제자이자 도란의 친구이며 로드와 페이커의 스승.

네로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카심 역시 제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인물이다.

그는 가족과 동료, 친구들은 물론이고 민족과 문화 전체를 제국에게 말살 당했다.

피아로의 원한은 사악한 황비와 어리석은 황제에게, 아스모펠의 원한은 황비와 야탄교에게 국한 된 것과 달리 카심은 제국 자체를 증오했다.

과거의 그리드는 카심의 입장을 이용했다.

카심을 완전히 회유하기 위해서 제국에게 복수하겠노라 다짐해 보였었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해서 변해왔다.

지금의 그리드는 제국과 적대하기보다 화합을 노리고 있다.

당장은 카심이 그리드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중이었지만 언제 인내심이 바닥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국과의 화합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카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 황제가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 될 문제도 아니고....’

제국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모를까, 카심은 결코 제국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제국이 바뀌지 않는다면.

카심의 증오가 고스란히 유지된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깊이 생각해보는 그리드의 기분이 한창 우울해지고 있을 때였다.

“으윽....”

황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로부터 힘을 흡수한 사하란의 검.

신화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 그것을 전력으로 휘두른 에단과 합을 나눴다가 혼절했던 피아로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피아로!”

“피아로 공!”

그리드와 공작들이 피아로를 부축했다.

반면 황제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에게는 피아로를 건사할 자격도, 용기도 없었기에.

“전하.... 무사하십니까....”

“당연하다.”

욱씬.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리드의 안위부터 살피는 피아로의 모습이 황제의 심장을 옥죄였다.

뜨거운 충정과 무한한 애정이 담긴 저 눈빛.

본래는 나를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타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무사히 살아남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했건만, 이제와 서운한 걸 보니 나라는 놈도 참 염치가 없다.

너무나도 당연히 황좌에 올라 모든 것을 누려왔기에 이토록 이기적이게 된 것인가.....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낀 황제가 피아로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무지와 만용 탓에 모든 것을 잃은 사내.

그를, 황제는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는 남의 것이 된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황제의 귓가로.

“폐하, 소인이 목숨을 걸고 감히 청하옵니다.”

마갑 첸슬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랜드마스터에게 입은 상처가 꽤 컸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차디찬 바닥 위로 두 무릎을 꿇었다.

“피아로 공께 사죄하십시오.”

첸슬러는 마지막 충신이다.

쥬앙데르크가 황제가 아니게 되어도 쥬앙데르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첸슬러였다.

그러므로 그는 감히 조언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지존이십니다. 누구도 감히 폐하를 처벌할 수 없으니 더욱 더 스스로에게 엄격하셔야합니다. 자신이 범한 죄에 스스로 책임을 지십시오. 피아로 공께 용서를 얻고 미래를 여소서.”

피아로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었던 황제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었는지, 피아로의 가족들을 숙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황제가 며칠 밤을 지새웠는지, 피아로가 사실은 누명을 썼던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황제의 심정이 어땠는지.

첸슬러는 늘 곁에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더욱 더 황제의 등을 떠밀었다.

피아로에게 용서를 구해야지만 황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

황제는 망설였다.

그의 마음이야 당연히 당장 피아로에게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하지만 단지 몇 마디 사죄의 말로 피아로의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피아로는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피아로였어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황후 아리아떼를 잃은 충격에 눈앞이 어두워졌었다.... 라는 것은 그랜드마스터의 말대로 결국 핑계일 뿐이다.

어떤 핑계로도 친구를 믿지 못하고 배신한 행위는 용서받지 못한다.

“.....”

용서받지 못할 것이므로, 사죄를 올리는 행위는 즉 피아로와의 관계가 단절됨을 뜻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황제는 끝내 피아로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이 끔찍한 현실을.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죄를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폐하....”

첸슬러는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바라고 있었다.

황제가 피아로에게 용서 받지 못할지언정.

도리어 저주 받을지언정 자신의 과오에 당당히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길 바랐다.

그래야만 황제가 더 나은 군주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작금 황실이 맞이한 혼란에 종지부를 찍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황제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첸슬러는 안타까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진 않았다.

범한 죄의 크기가 클수록 마주하기 힘든 법이니, 첸슬러는 황제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렸다.

한편 피아로 또한 황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숨죽이고 있는 황제의 익숙한 기척을.

그날의 사건 이후 매 순간마다 증오해왔던 배신자를 피아로는 철저히 외면했다.

혹시 황제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저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시선조차 섞지 말아야한다....

피아로는 생각하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고 오직 그리드만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피아로의 시선이 그리드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리드 역시 당당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어떤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

“.....”

무거운 침묵이 모두의 숨통을 조여 온다.

사람들은 비밀통로 위 알현실로부터 여전히 들려오고 있는 폭음이 어서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리드가 소리쳤다.

“아....! 바사라 공작!!”

“....?”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리드가 급히 설명했다.

“바사라 공작이 사병을 이끌고 황궁으로 달려오는 중이었소!”

“바사라가....?”

누구보다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황제였다.

눈치 챈 것이다.

바사라가 자신에게 유리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황궁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뜻은 즉, 자신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자식보다 낫구나....’

하긴, 재능조차 뛰어났다.

그녀의 적기는 물질에 대한 영향력이 약할지 몰라도 생명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녀가 이끄는 군대에는 두려움이 없었고 기고만장한 귀족들도 그녀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으니.

대상의 본질과 상태를 간파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인도하는 그녀의 적기는 메르세데스의 혜안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이었다.

피의 숙청을 각오했던 내 부친에게 그녀의 부친이 순순히 황위를 양보했고, 그 덕분에 내가 황위를 물려받았다지만.

황위를 물려받았던 사람이 내가 아닌 그녀였다면....

‘아리아떼와 피아로의 불행도 없었을 것이고 제국은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을 것이다....’

깨닫는 황제의 시선이 문득 그리드에게 향했다.

그리드는 아주 발광을 하고 있었고 공작들과 피아로가 그를 말리고 있었다.

“이거 놓으시오! 바사라 공을 구하러 가야하오!”

“안 됩니다,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바사라 공은 지금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그랜드마스터와 에단의 싸움에 휩쓸렸다간 반드시 죽고 말 게요!

“바사라 공작은 현명한 인물입니다. 쉽게 당하지 않고 스스로 잘 처신할 것입니다!”

“전하가 나섰다간 전하께서 죽으실 수도 있음을 왜 모르십니까!”

“아오, 이 양반들아! 나는 죽어도 살아난다니까!!”

그리드가 공작들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피아로의 손만큼은 뿌리칠 수 없었다. 피아로의 손에 담긴 힘과 의지는 그리드의 힘과 의지로도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피아로의 깊은 눈동자가 그리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신의 축복을 받은 불멸자라는 사실은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으실지언정 또 다시 웃으면서 살아나시겠지요.”

“그래, 그러니까 이 손....”

“허나.”

“....?”

“제 마음은 찢어집니다.”

“.....”

“불멸자가 부활을 대가로 큰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또한 고통은요?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아픔을 느끼는 인간이지 않습니까. 죽음에 익숙해지려하지 마십시오.”

“피, 피아로.....”

“제가 두 눈 뜨고 있는 이상 전하께서는 죽으실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바사라 공은 제가 구하겠습니다.”

“....?”

아니, 그건 트롤이고.

자신을 대신해서 떠나려는 피아로를 그리드가 간신히 붙잡아 세울 때였다.

“짐이 가겠소.”

“....!?”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황제 쥬앙데르크였다.

그가 처음으로 피아로를 바라보았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피아로의 두 눈에 핏대가 섰고, 황제는 증오 깃든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섬길 주인을 잘못 만나 모든 것을 잃은 기사여.”

“....닥치시오.”

“믿어선 안 될 친구를 사귀어 배신당한 벗이여.”

“닥쳐라....!!”

“....깊이 사죄하는 바이다.”

“닥쳐!!”

귀를 막고 소리치는 피아로는 마치 오열하는 것 같았다.

붉게 충혈 된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호미를 꺼내 쥐는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게 깊이 고개 숙인 황제가 첸슬러와 베인에게 눈짓했다.

“따라오지 마라.”

“제가 있을 장소가 즉 폐하의 곁입니다.”

“....폐하를 죽게 할 순 없어서.”

첸슬러와 베인은 황명을 어겼다.

참으로 불경한 태도였지만 황제는 웃어넘겼다.

저벅, 저벅.

호미를 휘두르지 못하는 피아로의 곁을 지나친 황제가 공작들 앞에 섰다.

“짐의 후계자로 바사라를 지목하는 바이오. 귀공들께서는 반드시 살아남아 증인이 되어주어야 하며 그녀를 잘 보필해야할 것이오.”

“폐하....!”

황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시 공작들을 지나친 그가 그리드 앞에 섰다.

“템빨왕이여. 짐은 이제야 알았소.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짐이오. 짐의 만용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소.”

“그건....”

“짐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소. 자기 부모를 닮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한 막내 에단은 짐이 데려갈 것이나, 나머지 세 자식들까지 책임질 겨를은 없소이다.”

“.....”

“첫째는 어미를 닮아 유약하나 현명하고, 둘째는 아비를 닮아 무능하나 욕심이 많고, 셋째는 아비에게 실망한 반항심에 잘못 된 길을 걸으려 하고 있소.”

“.....”

“부디 템빨왕 그대가 짐의 자식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주시오. 새로운 황제가 혹시라도 그들을 숙청하려 한다면.... 조금쯤은 도와주시길 바라오.”

내게는 부탁할 자격이 있다고, 황제는 믿었다.

그리드도 당연히 동의했다.

메르세데스를 보내준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았기에.

“....알겠습니다.”

그리드가 대답하자, 그제야 황제는 안심하며 비밀통로를 떠났다.

황제를 위한 공간에 황제가 없게 된 것이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두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야명석의 빛으로 물든 지하의 통로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드는 어떤 격한 감정이 울컥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는, 절대자의 마지막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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