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11화
“그대, 황제가 되지 않겠나?”
고양이도 군생활 3년이면 짬타이거가 된다. 취사병들의 몸짓만 보고도 잔반을 내놓는 타이밍을 읽는다.
벌써 몇 년째 라우엘을 곁에 둔 그리드가 작금의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그랜드마스터 당신이 황제를 배신하고 에단의 편에 선 거였군.”
“배신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나는 단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일 뿐이니까.”
“정당한 권리....?”
그랜드마스터는 그리드에게 무척 친절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들려주었다.
“아주 먼 옛날, 한 사내가 나를 찾아와 거래를 제안했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 자신이 황제가 되면 반드시 내 염원을 이뤄주겠노라고 그는 약조했다.”
“그 사내가 바로....”
“그래, 사하란이다. 나는 그를 황제로 만들어주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지키지 못한 약속은 그의 후손들이 이행하기로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황실은 나와의 약속을 잊어갔고 지금에 이르렀다.”
힐끔, 그랜드마스터의 시선이 알현실 내부로 향했다.
무상농법의 여파로 알현실은 점차 농지화 되고 있었다.
노랗게 익은 벼 사이를 누비며 싸우는 에단과 피아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랜드마스터는 에단이 쥐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저 검은 약속의 증표. 사하란이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면서까지 적기를 부여한 검이다. 사하란은 말했다. 황실이 나와의 약속을 어길 경우 내가 저 검으로 자격을 증명하고 직접 황위에 오르라고. 그리고 제국을 장기말로 휘둘러 직접 염원을 이루라고 하였다.”
친절한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핵심을 찔렀다.
“당신은 누구야?”
순간.
“....!”
장내의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들 모두가 그랜드마스터의 ‘염원’을 궁금해 했고, 그 염원의 내용을 토대로 그랜드마스터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고 보았었다.
한데 그리드는 대놓고 그랜드마스터의 정체부터 묻는 것이다.
염원의 내용조차 직접 언급 않는 사람에게 정체를 묻는다?
신중하지 못하다.
그랜드마스터가 순순히 대답해줄 리 없다.
사람들은 그리드의 질문이 묵살 될 거라고 보았다.
역시나.
“.....”
그랜드마스터 또한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염원의 내용을 묻는 질문은 예상했을지 몰라도 정체를 묻는 질문은 그조차도 예상 못한 눈치였다.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나를 황제로 만들어줄 테니까 당신의 염원을 이뤄달라는 거 아니야? 정체도 모르는 사람이랑 거래할 순 없잖아?”
“큭큭....”
그랜드마스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을 표출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문 그가 소리 내서 웃는 모습, 그와 수십 년을 지내온 황제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곱 중 유일한 죄인.”
권태에 찌들었던 눈동자에 슬픔이 스며든다.
그랜드마스터의 맑고 투명한 눈이 그리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빛에 눈이 멀어 어둠을 엿보지 못했던 동료들의 위기를 뻔히 알고도 외면했던 배신자의 화신. 그것이 바로 나다.”
“....?!”
그리드의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드는 ‘빛에 눈이 멀어 어둠을 보지 못했던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칠악성....!’
설마.
설마 그랜드마스터의 정체가 칠악성의 화신이었다니?
칠악성들은 이미 오래 전 ‘지상과 지옥 사이’에 봉인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리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정체다.
그리드가 완전히 굳어버린 그때, 사람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하나 같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칠악성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 전체를 뒤져봐도 드문 바.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서 그리드와 그랜드마스터의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란 속에 그랜드마스터가 말했다.
“죄책감을 벗고 싶었던 나는 정말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독한 권태를 극복하고자 발악하며 지금의 몸을 초월자의 반열에 올려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나와 달리 신과 대적했다가 ‘전생의 자격’마저 잃은 동료들의 화신체를 구할 방법을 연구했다. 대륙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종을 종류별로 붙잡아 실험했던 이유도, 대악마의 부산물을 필요로 했던 이유도, 마안을 얻으려 했던 이유도 모두 연구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긴 시간을 쏟아도 나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권태를 완전히 극복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중요한 순간마다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다. 다만 동료들이 실패했던 원인은 알 수 있었다. ‘쫓겨난 신들’에게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이유였지.”
“.....?”
쫓겨난 신들은 또 뭐야?
그리드의 혼란이 더욱 커졌다.
사람들의 술렁임도 커지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와 칠악성을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그랜드마스터가 ‘애초부터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였음을 눈치 채고 경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상황을 읽은 그랜드마스터가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드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는 짙은 짜증이 배여 있었다.
귀찮다. 다 때려 치고 싶다.
이와 같은 욕구들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타렌의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큰 희망을 엿봤다.”
“.....”
“해답은 무저갱에 있다. 그대, 황제가 돼라. 황제가 되어서 무저갱을 탐사하고 쫓겨난 신들의 행방을 추적해라. 제2의 칠악 전쟁이 타락한 신들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히든 퀘스트★ <6악의 제안>이 발생합니다!]
<6악의 제안>
★히든 퀘스트★
나태의 죄에 물든 6악 지크가 당신에게 황제가 될 것을 제안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당신은 사하란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지크프렉터의 제안을 수락
퀘스트 클리어 보상:사하란 제국 획득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리드는 여태껏 수많은 히든 퀘스트를 경험해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히든 퀘스트는 처음 봤다.
제국을 통째로 날름 삼켜버릴 수 있는 퀘스트라니....?
그리드는 당연히.
“싫어.”
거부했다.
“....?”
그랜드마스터가 크게 놀랐다.
설마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그리드가 제안을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눈치였다.
그리드가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내가 황제가 돼봤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텐데 그걸 무슨 수로 감당할까? 애초에 이런 큰 나라를 이끌 능력도 안 되고 인력도 부족한데 미쳤다고 고생을 사서 하겠어?”
사하란의 핏줄도 아닌 그리드가 황제로 즉위할 경우 수많은 귀족들이 반발할 테고 전란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드와 템빨국은 매일 같이 전쟁에 휩쓸릴 것이며 종국에 이르러서 제국은 수십 개로 분열될 것이 뻔했고 템빨국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다가 모든 걸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랜드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제국의 관리가 아니라 무저갱의 탐사다. 제국이야 어찌되든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도대체 뭐라는 거야? 오히려 당신이 어찌되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리드가 인류를 위해서 신들과 싸웠던 칠악성을 존경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칠악성을 위해서 애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그리드는 칠악성과 크게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칫 신들의 노여움이라도 샀다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철저한 중립을 지키겠노라, 그리드는 이미 <선악의 기로> 퀘스트 사건과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사건을 겪으며 결심한 바 있다.
“황제 폐하!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그리드가 소리쳤고,
“....진실을 알고도 우리를 외면하는가.”
그랜드마스터는 격노했다.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의 모습에 놀란 그리드가 황급히 손사래 쳤다.
“아니, 당신이랑 적대할 생각도 없어. 난 그냥 에단 저놈의 반역만 막을 거라고.”
“궤변을 늘어놓는군. 그대가 나와의 거래에 응하지 않은 이상 에단이 나의 대행자다. 그와 대적한다는 것이 즉 나를 대적함을 모르는가?”
“아....”
이거 정말 난처하다.
제국과의 화합도 정말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칠악성의 화신을 적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무리 화신이라고 해도 칠악성은 칠악성.
그랜드마스터의 힘은 예상했던 것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대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에게 밉보였다가 무슨 일을 겪을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외통수에 몰린 그리드가 안절부절 못할 때였다.
“닥쳐라, 지크프렉터!!”
피아로를 손쉽게 뿌리친 에단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그랜드마스터를 노려봤다.
“기회가 오자마자 나를 버리려고 했던 주제에 뭐? 내가 네놈의 대행자라고? 와신상담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누굴 호구로 아는가!!”
“....!”
쿠오오오오오-!
에단의 분노에 호응하듯, 사하란의 검이 전보다 더욱 강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벨리알의 부산물로 만든 피아로의 낫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였다.
황도 전역의 물질로부터 흡수한 힘이 드디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큰 경지를 이루지 못한 피아로의 자연경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이 순간, 극의에 이른 템빨을 손에 넣은 에단은 그랜드마스터를 위협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지크프렉터! 우선 네놈부터 죽여주마!”
“....엥!?”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
눈에 불을 켜고 그랜드마스터에게 달려드는 에단을 목격한 그리드가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꽈아앙-!
그랜드마스터의 검과 사하란의 검이 충돌하며 황궁의 일각을 날려버렸다.
황실근위대와 적기사단조차도 우왕좌왕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가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제길!”
진짜 재수 더럽게 없다.
복도가 부셔지면서 날아온 돌의 파편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리드가 욕설을 뱉으며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붙잡으시오!”
소란 통에 황제에게 달려가던 마갑 첸슬러가 멈춰 서더니 그리드에게 손을 뻗어왔다.
덥썩, 그리드가 그 손을 맞잡았다.
바로 근처에서 미쳐 날뛰는 에단 탓에 정신이 없는지라 손재주를 제어할 겨를도 없었다.
“흐으응....”
첸슬러가 신음했다.
하지만 과연 초월자답게 얼굴을 붉히진 않았다. 밀려오는 쾌감에 간신히 저항한 눈치였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 존중하겠소....”
“....?”
이상하게 오해하는 첸슬러 탓에 억울한 그리드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첸슬러와 함께 알현실에 입장한 그리드는 곧바로 피아로를 부축하여 황제의 곁에 섰다.
정녕 황제가 맞는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부쩍 늙은 황제가 그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폐, 폐하?!”
대제국 사하란의 황제.
서대륙의 지존이 일개 소국의 왕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첸슬러는 물론이고 그리드와 호감도를 최대치로 찍고 있는 공작들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리드도 놀랐다.
황제의 시선은 그리드의 어깨에 매달려있는 피아로에게 향해 있었다.
“템빨왕 그대는 모를 것이오. 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었소. 템빨국과의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매일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 정도로.”
“.....”
제국과의 화합은 허황된 바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의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렌할이 소리쳤다.
“에단의 폭주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일입니다! 도중에 정신을 차리면 가장 먼저 폐하부터 노릴 테니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폭주한 에단이 그랜드마스터의 발을 묶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그렌할은 주장했지만 황제는 망설였다.
“옥좌를 버리고 도망치라는 말이오? 세상 전체가 짐을 비웃을 게요.”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체면을 신경 쓰다니....
옆에서 듣고 있던 그리드의 속이 답답해서 타들어가려는 그때 첸슬러가 황제를 설득했다.
“에단은 저 힘을 언제까지고 감당하지 못할 테고 금방 제풀에 꺾여 쓰러질 겁니다. 그전에 그랜드마스터를 최대한 압박하게 만들어야하는데 우리에게 시선이 분산 될 경우 그랜드마스터가 체력을 온전히 비축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폐하, 반역자들을 일거에 소탕할 기회를 부디 놓치지 마소서.”
“....좋소.”
결국 황제가 고집을 꺾었다.
황제와 두 공작, 그리고 베인과 첸슬러, 끝으로 그리드와 피아로가 역대 황제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져온 비밀통로로 이동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