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9화
적기(赤氣)는 타고나는 힘이다.
흡혈귀의 혈기(血氣), 마안족들의 마안과 같아서 단련하거나 성장시키기 어려웠다.
과거의 제국이 단지 더 뛰어난 적기를 지닌 사람을 황제로 옹립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강자야말로 황제가 되던 시절.
그때의 제국이야말로 진정한 패도를 걸었고 모두의 위에 군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황족들은 권력에 취하고 말았다.
적기가 아닌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이 황제가 되기를 반복했다.
어느 시점부터 황제란, 보다 음흉하거나 단지 운 좋게 간택 된 행운아를 뜻하는 단어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서대륙을 일통하고 동대륙으로 진출하기를 염원했던 선조들의 바람을 단지 습관적으로 주창할 뿐, 실제로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진 않았다. 풍족한 삶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황실이 그랜드마스터와의 약속을 잊게 된 원인 중 하나다.
무저갱.
세계의 끝.
그렇기에 원점.
지상과 지옥은 물론이고 모든 세계를 연결 짓는 통로로 추측되는 그곳은 건국황제 사하란과 그랜드마스터 둘 모두의 염원을 이뤄줄 수 있는, 무척 중요한 장소였다.
하지만 당대에 이르러서는 한낱 감옥 취급이나 받고 있을 뿐이니 그랜드마스터는 우스웠다.
“반면 그대의 아들은 제법 영민한 구석이 있더군. 단 한 번 무저갱을 방문한 것으로 내가 바라는 것을 눈치 채고 거래를 제안했으니 사하란의 재림이라고 봐도 무방했어. 나는 희열마저 느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저갱에 있다고?”
그랜드마스터의 의미심장한 발언이 황제 쥬앙데르크의 두 눈을 부릅떠지게 만들었다.
황제가 알고 있는 무저갱이란 단지 세계의 끝.
깊이 내려갈수록 차원과 시간의 개념이 사라지며 종국에는 지옥과 닿게 되는 불길한 장소이다.
“설마 그대의 목적은 인계와 지옥의 경계를 허물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인가?”
“저열한 억측이다. 나와 손잡았던 사하란마저 함께 욕보이는 셈이군.”
“....!”
타앙.
에단이 쥐고 있는 사하란의 검을 그랜드마스터가 손가락으로 한 번 퉁기자 대량의 적기가 폭사하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게 물든 알현실의 풍광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길하고 끔찍한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커다란 힘에 휩싸인 에단이 끓어오르는 본능을 간신히 억누르며 외쳤다.
“황제여! 지금 당장 내게 황위를 양보하십시오! 그럼 목숨만은 빼앗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순 없다! 그 어떤 황제도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적은 없음이다!!”
나 혼자만 망신당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그딴 것에 신경 쓰는가....!”
콰아아아아앙-!!
사하란의 적기와 황제의 적기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꽈드득!
황제의 이가 갈렸다.
그랜드마스터와 에단에게는 무능하고 이기적인 황제라 비난 받고 있으나, 사실 쥬앙데르크는 치세를 이룬 황제였다.
부친과 조부 때에도 존재했던 그랜드마스터를 너무 당연한 존재마냥 간과했다는 점과 가족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는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쥬앙데르크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제국은 많은 소수민족을 말살했고 그들을 희생시킴으로서 안정적인 경제적 발전을 이뤄왔으니까.
외부의 시각에서 봤을 땐 충분히 흉포한 패도였으며 신민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살만한 세상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여태껏 국정을 외면해왔던 그랜드마스터와 어떤 핑계로도 잘못을 포장할 수 없는 대역죄인인 아들놈이 나를 비난하는가.
황제는 분개했다.
자신의 눈앞에 나란히 서있는 에단과 그랜드마스터 모두에게 커다란 증오심을 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쥬앙데르크의 적기는 특출한 바.
사하란의 적기에도 기세를 잃지 않고 호각을 이뤘다.
하지만 잠시에 불과했다.
해일 같은 힘과 태양 같은 열기, 물질에 대한 구속력과 생명에 대한 지배력.
그 모든 면에서 사하란의 적기가 쥬앙데르크의 적기를 월등히 초월하고 있었다.
사하란의 적기가 칼날처럼 뻗어져오는 쥬앙데르크의 적기를 모조리 집어삼키더니 에단의 적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뭣이....!”
힘이 흡수된다.
그 기이한 현상에 경악하는 황제의 귓가로 그랜드마스터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근원에는 저항할 수 없는 법이다.”
“놈....! 지크프렉터여!!”
붉게 충혈 된 황제의 시선이 그랜드마스터에게 돌아갔다.
그의 원망이 그랜드마스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자는 모든 걸 알고 있지 않았을까.
황후 아리아떼와 피아로를 음해한 사람이 다름 아닌 황비 마리라는 사실을.
이자가 내게 작은 힌트만 줬었어도 나는 아리아떼와 피아로를 잃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자는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과 황실 사이에 존재하는 약속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경고조차 해주지 않았고,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끝끝내 알려주지 않고 있다.
“네가....! 네놈이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적기로 물든 황제의 검이 그랜드마스터의 심장을 향해서 쏘아졌다.
그것에 담긴 위력은 얼핏 봐도 칠공작들의 힘을 초월하고 있었으므로 멀리서 지켜보던 지발은 질색하고 말았다.
‘역시 황제의 레벨은 500 이상인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NPC일수록 레벨과 스탯이 높다는 건 당연한 상식.
황제의 레벨이 서대륙에서 수위에 꼽을 정도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대단한 위용이다.
지발은 그랜드마스터가 큰 상처를 피할 수 없을 거라고 보았다.
한데 웬걸.
그랜드마스터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황제의 공격을 막아냈다.
갑자기 늘어난 중력이 황제의 몸을 짓눌렀고 황제의 검은 바닥을 겨누게 되었다.
그랜드마스터와 황제의 시선이 교차한다.
“.....”
그랜드마스터는 침묵했다.
백날 설명해봐야 모를 것이다.
나의 침묵이 즉 호의였음을.
“....!”
중력에 짓눌린 채, 그랜드마스터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황제가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자리로 사하란의 검이 날아와 박혔다. 간발의 차였다.
“폐하!”
어깨를 크게 베이고 수세에 몰리는 황제의 모습을 공작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적기의 근원인 사하란의 적기는 대대로 황실을 섬겨온 공작들을 너무 당연하게 굴복시켜버렸으니까.
공작들은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릎 꿇은 채 절망적인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일생토록 섬겨온 황제의 위기를.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려하는 미치광이의 폭주를.
‘저 저지선을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핏대 선 공작들의 시선이 알현실 너머 복도로 향했다.
수십 명의 적기사들과 마장기 라이더들이 보였다.
제국 최정예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전력.
황실군과 공작들의 기마대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돌파하는데 큰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공작들이 절망하는 순간이었다.
채챙-! 챙!!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거요! 어서 빨리 탈출해서 원군을 불러오던가 하시오!”
에단의 검을 막아낸 베인이 소리쳐왔다.
과연 황제의 그림자답다고 할까.
황제를 지키려는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절로 신뢰가 생길 지경이었다.
“알겠소...! 부디 조금만 버텨주시오...!”
정신 차린 공작들이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그대들은 이곳에 남아줘야겠다. 곧 탄생할 새로운 황제를 지지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따악, 그랜드마스터가 손가락을 퉁겨서 공작들 주변의 중력에 변화를 주었다.
기껏 일어섰던 공작들은 마차에 깔린 개구리마냥 다시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제, 제길....!”
대악마 베리드의 것조차 넘어서는 강대한 마력.
이건 도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이를 악 문 그렌할이 광전사의 힘을 개방했고 모르이즈는 야수의 힘을 이끌어냈다. 초월자에 맞서고자 자신들 역시 초월자에 근접해지는 것이었다.
“귀찮군.”
중력에 이겨내기 시작하는 공작들의 모습에 중얼거린 그랜드마스터가 투명한 오브 두 개를 꺼내 주변에 띄웠다.
오브는 마력을 증폭시키는 도구다.
일반적인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당연히 사용하는 그것을 그랜드마스터는 이제야 처음으로 선보였고 그 여파는 대단했다.
“끄으으윽....!”
간신히 일어났던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다시 주저앉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힘을 개방한 그들조차도 그랜드마스터에게는 접근조차 불가능했으니 실력의 차원이 달랐다.
“썩 꺼져라!!”
마침 복도에서 소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퍼엉-!
콰자자자작!!
폭음과도 같은 파공성이 울리기 시작하며 적기사들의 몸이 허공을 부유했다.
컥, 피를 토하며 벽에 꽂히는 적기사들은 하나 같이 피떡이 됐다.
그렌할과 모르이즈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첸슬러 경....!”
마갑 첸슬러.
다섯 기둥 중에서도 가장 충직한 인물.
그의 난입이 상황을 급변시켰다.
솔로 넘버 나이트를 제외한 적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솔로 넘버 나이트들조차도 순식간에 알현실 입구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폐하!!”
알현실 안의 상황을 들여다 본 첸슬러가 포효했다. 그의 등 뒤로 수백 명의 황실 근위대가 보였다.
“제길!”
이대로는 금방 돌파당할 거라고 판단한 지발과 라이더들이 마장기를 소환하려 했지만.
“소란이 더 커져서 좋을 건 없다.”
그랜드마스터가 직접 나서며 라이더들을 제지했다.
여전히 두 개의 오브를 주변에 띄운 그는 어느새 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마법사가 검을?
지발과 라이더들은 황당했지만 그랜드마스터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도리어 더 긴장했다.
애초에 그랜드마스터는 모든 분야의 정점에 오른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였으니까.
할버드를 세운 첸슬러가 그랜드마스터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영역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콰앙-! 콰콰콰콰쾅!!
그랜드마스터가 발동시킨 <어스 퀘이크>가 첸슬러에게 회피를 강요시켜버렸다. 허공으로 도약해 피한 첸슬러는 품으로 파고들어오는 그랜드마스터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선공을 허용했다.
“큭....!”
마갑이 아니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등골이 오싹해지는 첸슬러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반격했다. 허공에 부유해있는 찰나 동안 할버드로 반월을 그리고 사선을 그리며 그랜드마스터를 전방위 압박했다.
그 틈에 황실근위대는 알현실 입장을 시도했다.
하지만 적기사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근위대장이 외쳤다.
“폐하께 충성해야할 제국의 기사들이 어찌하여 반역자의 편을 드는가!”
“지크프렉터님의 위대함을 알게 된 후로 그간의 충성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거든.”
대꾸한 수잔이 근위대장과 맞서 싸웠다.
핏줄은 속일 수 없다고, 메르세데스의 사촌동생답게 그녀는 실력이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근위대장에게도 쉬운 상대가 아닐 정도였다.
채챙! 챙챙!!
으아아아악!!
복도 곳곳으로 피와 살이 흩뿌려지고 잔혹한 비명소리가 황궁을 가득 채웠다.
알현실 안의 상황은 최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베인이 에단에게 패배한 것이다.
사하란의 검을 무장한 에단은 이 자리 누구보다 강한 상태였다.
황제의 목에 검을 겨눈 에단이 말했다.
“지난 몇 대 동안 제국은 정체되어 있었지만 내 대에 이르러서는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알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시조께서 동대륙으로 진출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반드시 대륙을 일통하고 적해를 건널 것입니다.”
“너는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랜드마스터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네게도 칼을 겨눌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아무 것도 못하고 죽는 것보단 일단 황제가 된 후에 죽는 편이 백배천배 낫지 않겠습니까?”
“.....”
“황위를 계승하겠습니다, 아버지.”
에단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황제의 목덜미에 그대로 검을 꽂아 넣고자 손에 힘을 줬다.
동시에.
“기사 소환!”
“....?”
금속음과 비명이 난무하는 복도로부터 낯선 음성이 들려온다 싶더니.
“피아로!!”
“....!?”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눈에 불을 켠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황제도, 원통해하고 있던 두 공작과 눈치를 살피던 베인도, 황위를 코앞에 뒀던 에단도.
모두가 당황해서 알현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
제국을 지탱했던 기둥.
과거의 영웅이 무심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황실근위대와 적기사 전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피아로를 존경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기에.
“피아로, 네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단 황제를 구하자.”
피아로의 등 뒤에 선 누군가의 음성이 정적에 빠진 복도에 메아리쳤다.
모두가 시선을 옮겨 보니 흑발의 사내가 보였다.
템빨왕 그리드였다.
그의 권한은 놀라웠다.
뒤늦게 황제를 발견하고 살기를 피어 올리던 피아로가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된 것이다.
“예, 전하.”
천하의 피아로가.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영웅 중 하나가 템빨왕의 명을 공손히 받들고 있었다.
“반역자가 무슨 염치로 이곳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잔이 피아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미 과거에 검호의 경지를 이뤘던 피아로라고 하나 수잔 또한 최근에 검호의 경지를 이룬 바.
심지어 그랜드마스터에게 마법까지 배운 그녀는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언니 메르세데스보다 뛰어난 기사가 될 거라는 포부를 품은 그녀에게 있어서 지난날의 망령에 불과한 피아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격류의 가호!”
콰앙-!
수잔의 몸 위로 투명한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모든 능력치를 크게 상승시키는 최고의 버프 마법으로 그랜드마스터가 친히 하사한 것이었다.
기세가 오른 그녀가 피아로에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템빨왕이 조용히 읊었다.
그러자 수잔의 몸을 감쌌던 빛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아....?”
폭.
당황하는 수잔의 이마를 호미가 찍고 지나간다.
복도를 돌파하는 피아로를 그 누구도 함부로 막아서지 못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각종 농기구들이 모두를 석상처럼 굳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