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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57화 (947/1,794)

템빨 51권 - 8화

Satisfy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에는 목격자가 존재한다.

운영자?

아니, 플레이어다.

20억 이상의 숫자를 자랑하는 그들은 Satisfy 어디를 가나 존재했다. 바로 그들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각종 스토리의 직, 간접적인 체험자가 됨으로서 Satisfy의 거대한 세계관을 하나로 연결시켜온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대륙 최대 규모의 건축물이라고 평가 받는 황제의 궁전.

그곳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인부 중에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그중 극히 소수는 황실 근위대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스킬을 하나 정도 갖고 있었고, 또 그중 누군가는 황실의 이변에 흥미를 품은 채 알현실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격했다.

4황자 에단의 출현을.

현 혼란의 근원인 그 반역자는 황실 근위대를 무차별 학살하며 궁전을 헤집었다. 급기야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알현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어서 들려오는 소란.

커다란 호기심에 휩싸인 플레이어들은 숨을 죽인 채 알현실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읽히고 황궁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할 확률이 99.9퍼센트에 가까웠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사건’을 코앞에 두고 물러날 수도 없는 법이었다.

황궁에서 일할 정도면 각 분야의 최고 실력자들.

소위 말하는 랭커인 그들은 정보가 갖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제와 황자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다.

‘황후를 죽인 범인이 황비였나본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공작들을 에단이 처치하려다가 이 사달이 발생한 거고....’

‘개막장 집안이구만....’

꽤 쏠쏠한 정보다.

가십거리로 트래픽을 올리는 언론사에 팔아넘기면 짭짤한 수입원이 될 테고, 여전히 상황 파악 못한 채 황비의 기사 노릇을 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상당히 좋은 관계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싹둑싹둑.

누군가는 화분의 난을 자르며.

슥삭슥삭.

누군가는 창틀의 먼지를 닦으며.

알현실을 힐끔거리는 플레이어들의 귓가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뚜벅.

소름 돋을 정도로 태연한 발소리다.

피로 붉게 젖은 복도를 저렇게 느긋이 걷는 게 가능한가?

심지어 격동 중인 알현실을 향해 다가오면서.

이질감을 느낀 플레이어들이 경계태세를 취했다.

발소리의 주인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하고 최대한 기척을 감췄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

누군가는 귀동냥으로 들어봤고, 또 누군가는 우연히 목격한 경험이 있는.

그러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초네임드급 NPC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스킬을 전개한 플레이어들이 경악에 휩싸였다.

[대상의 기감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은신> 스킬이 해제됩니다.]

[대상이 당신의 의도를 파악하였습니다!]

[<딴청부리기> 스킬이 해제됩니다.]

[대상이 당신의 마력을 간파하였습니다!]

[고유 마법 <카멜레온>이 해제됩니다.]

등등.

플레이어들. 그것도 랭커급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자랑하는 스킬과 마법들이 허망하리마치 쉽게 무력화됐다.

단지 그랜드마스터의 존재만으로 말이다.

“어.... 으아아....”

예기치 않게 모습을 노출하게 된 플레이어들이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쳤다.

마치 길가의 개미를 보듯, 단 한 번의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랜드마스터 앞에서 그들은 끝없는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저벅.

그랜드마스터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무시한 채 알현실로 들어갔다.

“뭐야.... 대악마야?”

“.....”

어쨌든 살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플레이어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랜드마스터는 저 막장 가족 싸움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 것인가....

호기심이 더욱 커진 플레이어들이 알현실 안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당신들 당장 도망쳐!”

복도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놀란 플레이어들이 시선을 돌려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발이었다.

최강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자 에단의 부하로 있는.

그의 뒤로 적색의 갑주를 무장하고 있는 수십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적기사단....!”

경악한 플레이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으니 각종 도주 스킬을 전개했다.

하지만 느렸다.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즉각적으로 나서서 그들을 저지, 포박했다.

“제길!”

욕지거리를 뱉은 지발이 검을 뽑았다.

그는 놀랍게도 플레이어들을 죽이려 했지만.

채앵-!

한 명의 여기사가 지발보다 늦게 검을 뽑고도 지발의 검을 막아냈다.

그녀의 이름, 수잔이다.

황제가 직접 개편하라 명하고 그랜드마스터가 직접 육성한 <네오 적기사단>의 일원이자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의 사촌동생.

“이들을 죽여 봐야 다시 부활하니 감옥에 가두는 편이 낫다. 여기서 보고 들은 일을 밖에 나가서 떠들면 곤란하잖나.”

수잔은 메르세데스를 닮아 아름다운 얼굴을 자랑했지만 표정과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지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발 경. 혹시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이들을 죽이려 한 건 아니겠지?”

‘무슨 눈깔이....’

얼음을 갖다 박아놓은 것처럼 차가운 눈동자.

마주보고 있노라면 심장마저 사늘해진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지발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단지 생각이 짧았을 뿐이오.”

손사래 치는 지발의 시선이 플레이어들에게 향한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무릎 꿇린 그들, 어쩌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할 것이다.

시간을 낭비하고 남들보다 뒤처지게 되는 셈이다.

누군가는 랭커라는 명함을 내려놓게 될 수도 있었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남 걱정 하는 놈이 된 거지?

스스로가 한심해서 혀를 차는 지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불안이 피어올랐다.

‘이거 망할 각인데.’

반역자로 선포당하고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에단.

지발에게는 그의 곁을 떠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지발은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반역의 무리로 남는 길을 선택해 큰 위기를 겪었었다.

왜?

에단과의 호감도를 최대치로 올리면 마장기 레이더스의 소유권을 양도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정’이 문제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에단을 섬겨온 지발은 알게 모르게 많은 호의를 받았었다.

창공의 라이더에서 고대의 라이더로 진화한 지발은 에단에게도 각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지발이 하켄 왕국을 돕겠답시고 멋대로 탈영했을 때도 에단은 ‘마장기의 위력을 만천하에 알려줘서 고맙다.’라며 도리어 지발을 치하했지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마장기 군단원들과 몇 년 동안 함께 쌓은 추억도 많았고 말이다.

그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친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지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때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되어봤기에 동료의 소중함을 절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쯧...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됐으면 좋겠는데.’

지발이 반쯤 열린 알현실 너머에 서있는 에단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랜드마스터의 지지를 얻어 숨통이 트였다지만 하필 그랜드마스터의 지지를 얻었다는 게 문제다.

그랜드마스터는 신용해선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황제를 배신한 꼴만 봐도 신용할 수 없었다.

‘저놈이 에단을 황제로 만들어서 뭔 짓을 하려는 건지 영....’

에단과 그랜드마스터는 서로가 필요에 의해서 성립 된 관계이다.

에단은 황제가 되고 싶었고, 에단이 황제가 될 경우 그랜드마스터는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기에 에단을 돕기로 한 것이다.

그랜드마스터가 그 무언가를 얻은 뒤에도 에단의 편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에휴, 내가 하필 저런 후레자식하고 엮여가지고.’

사실 지발은 알고 있다.

에단을 기다리는 결말은 오직 하나.

불행일 것임을.

당연하다.

에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긋나 있었다.

오래 전 그가 황제가 되겠노라 결심했던 이유는 어머니를 위함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는 남들 앞에서 어머니를 욕하고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는 패륜아가 되었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겼으므로 그는 결국 구원 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 혹시 또 몰라.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어.’

지발은 바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에단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기를.

그리고 그때부터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내 은혜 잊지 말고 마장기도 주고 공작위도 주기를.

***

알현실 밖이 한창 소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현 시점부로 4황자 에단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겠다. 자격의 증명은 건국황제 사하란의 검으로 대신한다.”

“.....”

알현실 내부에는 정적이 깔리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의 황당무계한 선언에 모두가 잠시 넋이 나가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렌할 공작이 얼굴을 붉히고 외쳤다.

“지크프렉터여! 새로운 황제를 누구로 세울지는 오직 황제폐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다! 감히 당신 따위가 새로운 황제를 운운하다니 노망이 들었는가!!”

“이해력이 부족하군. 나는 자격의 증명으로 건국황제의 검을 제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격이란 당연히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권한을 말하는 것임을 맥락 상 모르겠는가?”

여전히 무심한 표정.

나른한 말투를 보니 하품이라도 할 기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모르이즈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건국황제의 검이 그런 권한을 가졌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애초에 저게 건국황제의 검이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거지!?”

“너희들은 몰라도 한 사람은 안다.”

그랜드마스터의 시선이 황제에게 꽂혔다.

“사하란의 검이 갖는 의미를 선황에게 들었을 테지?”

“.....”

“폐하...!”

황제가 침묵하자 공작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침묵이 곧 긍정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후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황위를 빼앗아도 좋다.”

“....?”

“사하란이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사하란 이후의 모든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전해주었지.”

“어찌.... 어찌 그런?”

공작들이 큰 충격을 받았고 베인도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건국황제는 그런 유지를 남겼는가?

약속의 내용은?

그랜드마스터는 도대체 언제부터 존재해온 것이란 말인가....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는 그들의 혼란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황제를 바라본 채 말했다.

“쥬앙데르크여. 그대는 본분을 망각했다.”

“.....”

“나의 경고를 몇 번이나 무시하고 무저갱을 외면했다.”

순간.

“억울하오.”

여태껏 잠자코 있던 황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게 무저갱에 대해서 설명해준 바가 없소. 경고라는 것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소. 그저 몇 번 무저갱의 탐사를 권했을 뿐이고 내가 그때마다 일을 미루자 잠자코 있지 않았소? 그것이 경고였음을 내가 눈치 챌 수 있게끔 재촉이라도 해주면 좋지 않았소이까? 당신과 선조들의 약속이 무저갱과 얽혀있다는 사실조차 나는 몰랐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이 와전되고 잊혀졌단 말이오!”

“정녕 무지몽매한 자다.”

그랜드마스터의 눈빛에 처음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가여운 생물을 보는 듯한, 그런 동정심이 깃든 눈빛이었다.

“황제가 된 이상 응당 책임져야할 공간을 막연히 외면하고.”

저벅.

그랜드마스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볼 노력조차 않으며.”

저벅.

두 걸음.

“나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스스로를 원망하기는커녕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저벅.

세 걸음.

그래, 그랜드마스터는 단 세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황제의 코앞에 있었다.

공간 자체가 접혔다.

베인은 그렇게 느꼈다.

“그대는 역대 모든 황제를 통틀어서 가장 무능하고 이기적인 자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는 핑계거리가 그대를 포장해줬을 뿐, 그대는 처음부터 무능하고 아둔한 자였다. 반면.”

다짜고짜 황제를 냉혹하게 평가한 그랜드마스터가 에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의 아들은 제법 영민한 구석이 있더군. 단 한 번 무저갱을 방문한 것으로 내가 바라는 것을 눈치 채고 거래를 제안했으니 사하란의 재림이라고 봐도 무방했어. 나는 희열마저 느꼈다.”

타앙.

에단이 쥐고 있는 사하란의 검을 그랜드마스터가 손가락으로 한 번 퉁겼다.

그러자.

콰르륵-!

검으로부터 대량의 적기가 폭사하며 알현실이 붉게 물들었다.

마침 타이탄 교외에 떨어진 그리드 일행의 시야에도 들어올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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