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7화
“척후대의 보고입니다.”
“도우넛 자작의 공병대가 엘카스 늪지대에서 발이 묶였다고 합니다. 트할렌 댐이 무너지고 강물이 범람하여 늪지대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됩니다.”
“멀쩡하던 댐이 갑자기 무너져? 발할라의 수작이로군.”
“공병대의 도착 지연으로 인해서 클래스 자작을 비롯한 동부 5귀족의 군대가 크란 협곡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군을 강행하기에는 협곡을 잇는 다리들의 노후가 너무 심합니다.”
“크란의 영주가 제출했던 보고서에 따르면 협곡의 다리를 마지막으로 보수한 시점은 3개월 전이다만? 근데 벌써 노후가 진행됐다고? 이것도 발할라의 수작질인가?”
“단순히 보고서가 조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괘씸한 놈이 거짓 보고서를……. 즉시 사형시켜.”
“에일렌 후작을 추적하던 2군단과 3군단이 부대를 23개로 나눴습니다. 에일렌 후작의 흔적이 테리 산에서 끊긴 것을 확인하고 천라지망을 펼칠 계획인 듯합니다.”
“그래, 에일렌은 반드시 붙잡아 놔야지. 놈이 빠져나갔다간 황비파 귀족들의 구심점이 되는 수가 있으니.”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던 2군단과 3군단이 발할라의 기습을 당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돌피토 숲에서 전투가 개시됐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발할라의 복병입니다!”
“이런 후레자식들이!”
쉬지 않고 쇄도하는 비보에 침착하게 대응하던 첸슬러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본래 그의 임무는 반역자 에단을 수색하고 에단의 외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지만 발할라의 악의적인 개입 탓에 일이 계속 꼬이는 것이다.
“비열한 놈들이 황실의 혼란을 틈타 협정을 깨다니! 버몬트 재상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저급한 놈들과 평화 협정을 맺은 거지!?”
쾅!
첸슬러가 탁자를 내려치자 흑철로 만들어진 탁자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이내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그 말도 안 되는 용력에 놀라 꿀꺽, 마른침을 삼킨 부관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조금 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발할라와 협정을 주도한 사람은 버몬트 재상이 아닌 그랜드마스터라고 합니다.”
“뭣이?”
첸슬러가 벼락에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
그는 벌써 몇 명의 황제를 섬겨 온 인물이다. 나이를 가늠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오래토록 존재해 온 초월자로서 황실의 수호자 같은 존재였다.
물론 수호자다운 태도를 보여 준 적은 없다.
그는 늘 사적으로 움직였고, 오히려 황제에게 불경한 모습들만 보였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의지했다.
아니,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황실과 얽힌 비밀을 황제보다 그랜드마스터가 더 많이 알고 있었을뿐더러 개인의 무력도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황제가 그를 의지하니 황제의 충신인 첸슬러 또한 그를 존중했었다.
한데 이 순간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가 없던 그랜드마스터가 발할라와의 교섭에 직접 나섰었다고?
그리고 때마침 발할라가 황실군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듯한 대처를 보이며 황실을 방해하고 있고?
‘설마?’
변절했다?
아니, 속단은 이르다.
수백 년 가까이 황궁에 머물러 온 그가 하필 이제 와서 변절했다는 건 납득이 안 된다.
첸슬러가 갈피를 못 잡을 때였다.
“급보입니다! 적기사단의 잔당들이 황도를 수색 중인 병사들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적기사단은 네오 적기사단이 토벌했던 거 아니었나?”
“상황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네오 적기사단과 교신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제기랄!”
폐하가 위험하다.
등골이 오싹해진 첸슬러가 막사를 뛰쳐나갔다.
“당장 황궁으로 간다!!”
***
“저희 두 가문의 기병대가 황도에 입성할 수 있게끔 윤허해 주십시오. 저희도 함께 에단의 수색에 보탬이 되겠나이다.”
그렌할과 모르이즈 두 공작이 황제에게 청했다.
발할라의 개입 소식을 알게 된 그들은 이번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단 황자는 폭주했던 게 아니다.
철저한 계획하에 이번 사태를 일으켰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필시 큰 배후가 숨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계산이 서자 공작들은 초조해졌다.
최대한 빨리 에단을 체포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좋소.”
황제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공작들에게 신뢰를 보여 줘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미 황실에 의해 큰 화를 겪은 그들의 충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귀공들께서는 지금 당장 군대를 황도 안으로 소집하여…….”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명을 거두시지요. 한낱 귀족들의 사병이 황도에 발을 들이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집채보다 큰 옥을 통째로 깎아 만든 알현실의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황도의 모든 병사들이 찾아 헤매고 있는 반역자.
바로 4황자 에단이었다.
“네, 네놈!”
얼굴을 대춧빛으로 붉힌 황제가 옥좌를 박차고 일어섰다. 눈에 핏대를 세운 그가 소리쳤다.
“어리석은 녀석……! 어미의 죄를 덮겠답시고 국가를 지탱하는 귀족들을 위협하여 사태를 여기까지 악화시키다니……! 외척이 쥐여 준 권력에 취해 영민함을 잃고 눈앞이 어두워졌구나!!”
브누아 황자를 통해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황제는 황비 마리를 처벌하겠노라 다짐했을 뿐이지 에단까지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피아로 사태 당시 에단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렇다.
에단은 앞으로 닥쳐올 파도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외척의 힘을 잃어 입지는 약해질지 몰라도 비참한 최후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위대한 사하란의 핏줄이라는 자부심을 일평생 누리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한데 어리석은 놈이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진실을 덮어 어미를 비호하겠답시고 죄 없는 공작들을 무저갱에 가두는 대역죄를 범했다.
황제 또한 아비.
쥬앙데르크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죽여야 한다는 끔찍한 현실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급기야 눈시울을 붉히는 황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냥 두 손 놓고 당합니까? 멍청한 어미가 싸지른 똥통에 빠지게 생겼는데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냐고요.”
“……!”
“그 무슨 불경한 언사요!”
거친 말투에 놀라 입을 다무는 황제를 대신해서 그렌할 공작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에단을 저지할 수 없었다.
콧방귀 뀐 에단은 계속 떠들어 댔다.
“이게 다 과업을 등진 아버지의 잘못입니다. 유약한 첫째 형님과 자질 없는 둘째 형님, 그리고 방랑벽을 주체 못하고 집 나간 셋째 형님에게 도대체 무슨 기대를 걸고 그들을 놓지 못해 황태자 책봉을 미뤄 온 겁니까? 이미 자질을 증명하고 고대의 병기를 발굴하는 업적을 세우는 등, 효자 노릇 돈독히 해 온 저를 진즉에 황태자로 책봉하셨어야죠.”
“…그 입 다물거라.”
“왜 저를 황태자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출이라서 명분이 안 섰습니까? 아니, 그럴 리 없죠. 당신의 아버지 역시 서출 출신이지 않았습니까. 그럼 대체 뭡니까? 역시,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리아떼의 핏줄이 아니라서 정이 덜 갔던 겁니까?”
“…닥치거라!!”
“닥쳐야 할 건 당신이다! 황제여! 늘 당신이 문제였음을 모르는가!! 당신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지만 않았어도……! 동대륙을 향해 있던 당신의 시선이 바로 곁에만 미쳤어도 내 어미는 감히 죄를 저지를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리아떼 황후가 죽었을 일도, 피아로가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을 일도, 바로 오늘날의 사태 또한 없었을 것이다!!”
“……!!”
에단의 눈에 깃든 독기와 살의를 읽은 황제는 깨달았다.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을.
이 이상의 대화는 전혀 의미가 없다.
침통한 표정을 지은 그가 등 뒤의 베인에게 명했다.
“당장 저놈을 붙잡아 무저갱에 가둬라.”
“예.”
베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바로 당대의 <란스티어>라는 사실을 숨기고 황제를 섬겨 온 그의 충성심은 거짓된 것.
황족을 향한 존경이 추호도 없으니 망설임도 없는 것이다.
스파앗-!
그렌할 공작의 귓가에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감각이 든다 싶더니.
쩌저저정-!
족히 30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에단이 코앞까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큭……!”
붉은 융단으로 뒤덮인 바닥을 나뒹굴며 쓰러진 에단이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자신이 황제의 발밑에 쓰러져 있음을 뒤늦게 자각한 그가 벌떡 일어섰지만 무의미했다.
어느새 다시 그의 등 뒤로 나타난 베인이 그의 뒷목을 손으로 움켜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손 치워라! 내가 바로 제국의 미래다! 황제의 자격을 갖춘 유일한 인물이다!!”
소리친 에단이 적기를 발출했다.
칼날 같은 적기가 에단을 중심으로 뿜어져 베인을 위협하자 움찔,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베인이 잠시 거리를 벌렸다.
스릉-!
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에단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짙은 적기가 감도는 칠흑의 장검이었다.
“그 검은……!”
황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에단이 꺼낸 검, 필시 블랙 미스릴을 제련해 만든 것이었는데 그 안에 주입된 적기의 수준이 심상찮았던 것이다.
‘나의 적기를 상회한다고?’
단순히 상회한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아예 격이 다르다.
도대체 누구의 적기란 말인가?
황제가 의문에 빠진 그때.
‘뭐지?’
재차 나서서 에단을 제압하려던 베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대로 에단에게 접근했다간 그대로 베일 거라는 확신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잠시 적막이 내려앉자 에단이 큭큭 웃었다.
“황도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폐하의 군대가 왜 저를 못 찾아냈던 건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뚜벅. 뚜벅. 뚜벅.
알현실 바깥의 복도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조금의 망설임도, 서두름도 없는 느긋한 발소리.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에단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폐하의 군대가 미치지 못하는 단 한곳.”
천상궁.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가 기거하는 궁전.
“제가 바로 그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인 에단의 발언과 동시에.
뚜벅.
복도의 저편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발소리가 알현실 앞에서 멈췄다.
황제와 두 공작, 심지어 베인조차도 발소리의 주인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현 시점부로 4황자 에단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겠다. 자격의 증명은 건국 황제 사하란의 검으로 대신한다.”
발소리의 주인,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가 예의 그 나태한 표정을 지은 채 선언했다.
같은 시각, 에일렌 후작성.
“에단 황자의 도착 예정 시간이 지나지 않았소?”
점차 더 거세지는 황실군의 공세에 성벽 안까지 피신한 아레스는 사태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현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군사 사마천은 황실군의 모든 이동 경로를 추측하고, 그 모든 황실군의 진격을 방해하지 않았던가?
한데 성을 둘러싼 황실군의 숫자가 왜 이렇게 많단 말인가?
사마천이 예상했던 수치보다 최소 3배 이상이다.
어서 빨리 황자와 마장기단, 그리고 적기사단이 합류하지 않는 이상 공세를 버티기 힘들 정도인데 황자조차 감감무소식이다.
아레스의 불안감이 짙어지는 가운데.
“…이용당한 것 같군요.”
사마천이 절망적인 말을 꺼냈다.
“그랜드마스터가 우리를 장기말로 이용한 것 같습니다. 에단 황자는 이곳에 오지 않겠지요. 죄송합니다. 모두 소인의 불찰입니다. 당장 제 목을 베어 주십시오.”
“…….”
아레스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잠시 넋이 나갔던 그가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럭과 스캇에게 명령했다.
“군사를 모시고 도망쳐라. 여기서 군사까지 죽는다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이날.
아레스를 비롯한 아레스 군단 소속 플레이어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발할라는 몇 년 동안 비축해 온 식량과 군대의 태반을 잃었다.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커다란 타격이었다.
한편…
“좋았어.”
그리드는 별의 검을 녹여 <빛을 잃은 아다만티움>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금부터 바사라와 함께 행동할 예정이었다.
황제의 보고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황궁에 입장할 필요가 있었는데, 타국의 왕인 그리드가 황제의 초대도 없이 황궁에 입장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사라의 부하로 변장해서 미리 황궁에 입장할 계획이었다.
‘인피면구를 써먹어 볼 기회군.’
두근거린다.
어서 빨리 새로운 광물을 창조하고 싶다.
한껏 고양된 그리드가 소리쳤다.
“스틱세이! 나랑 바사라 일행을 제국 황도 교외로 보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