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6화
“블랙 미스릴을 구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대답하는 바사라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리드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힘든 부탁입니까?”
“아니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제 부탁 때문에 귀하의 입장이 난처해져서는 곤란합니다.”
“제 입장까지 고려해주실 필요 없어요. 전하께서는 그저 뜻하는 바를 명하시면 됩니다.”
반드시 세 번의 은혜를 갚겠노라 맹세한 직후라 그럴까.
바사라의 태도는 매우 굳세고 꿋꿋했다.
그 탓에 그리드의 속만 답답해졌다.
“당신은 템빨국과 제국의 화합을 책임져야할 사람입니다. 그때까지 당신의 입지가 약해져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해한 바사라가 솔직히 밝혔다.
“사실 블랙 미스릴을 공수하기 위해서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블랙 미스릴 광산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시거든요.”
“황실도 아니고 황제가 직접....?”
“네, 황실에 있어서 블랙 미스릴은 그만큼 중요한 자원이니까요. 블랙 미스릴 광산은 대대로 황제, 혹은 황태자가 관리해왔는데 당대에는 아직 황태자 책봉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폐하께서 직접 관리할 수밖에요.”
“블랙 미스릴이 적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 이유 하나면 충분하죠. 적기는 대상의 신체능력을 강화, 회복시키고 정신을 각성시키는 등의 효력을 발휘하니까요. 최대한 많은 블랙 미스릴을 확보하여 최대한 많은 군사를 적기로 무장시키는 것이 사하란 황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건국황제께서 제국을 세우실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붉은 군단>의 위력 덕분이었으니 그 후손들이 블랙 미스릴에 집착하는 건 당연하죠. 애초에 타이탄이 황도로 선택된 이유도 대륙에서 유일한 블랙 미스릴 광산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고요.”
“....!”
단지 광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황도의 위치를 결정 짓다니, 블랙 미스릴에 대한 사하란 황실의 집착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일화였다.
그리드는 블랙 미스릴을 확보하는 일이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임을 직감하고 말았다.
“블랙 미스릴을 외부로 빼돌린다는 게 보통 큰일이 아니겠군요.”
“네, 무척 어렵죠.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적기사를 제압하고 그들의 갑옷을 강탈하는 일인데 이제는 그마저도 힘들게 됐어요. 에단이 반역자로 선포 된 이상 적기사단은 이미 숙청당했을 테니까요.”
“적기사단이 숙청당했을 거라고요?”
황실을 향한 적기사단의 충심을 그리드는 직접 목격한 바 있다.
메르세데스가 대표적인 예다.
그들의 충심을 뻔히 알고 있을 황제가 그들을 숙청했을 거라고?
적기사단 단장 리미트가 황비파라고 해도 왜 그 아래에 있는 기사들까지....?
쉽게 납득이 안 간다.
그리드가 당황하고 있자 바사라가 쓴 미소를 그렸다.
“쉽고 확실한 통치 방식이라는 겁니다. 대다수의 적기사가 여전히 황실에 충성하고 있을지언정, 그중 극히 소수라도 검공 리미트의 사상에 오염 된 상태라면 훗날 큰 위험이 될 테니까요.”
“너무 가혹한 처사요. 단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국가에 헌신해온 기사들을 숙청 한다니.....”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피아로 공을 비롯한 전대 적기사단도 이미 한 번 숙청당한 바 있잖아요.”
“.....”
“애초에 그들을 숙청하지 않아도 문제가 됩니다. 큰 반발이 생길 거예요. 반역자에게 오염 된 조직을 그대로 방치하는 걸 납득할 귀족은 없겠죠.”
“그리고 그 귀족들은 적기사를 대신할 새로운 기사들을 황제에게 추천할 테고 말이죠. 자신의 일가친척들로.”
라우엘이 끼어들었다.
이대로는 대화의 진전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선 그가 그리드를 대신해서 질문했다.
“광산에 잠입해서 블랙 미스릴을 은밀히 채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까? 이쪽엔 대현자의 매스 텔레포트가 있습니다.”
“광산에는 온갖 결계가 설치돼 있어서 전이 마법과 통신 마법이 불가능해요. 그리고 블랙 미스릴은 1년에 한 번밖에 캐지 못하죠.”
“1년이요?”
“그래요. 그리고 바로 그날이 폐하께서 근위대를 이끌고 광산으로 향하는 날입니다. 블랙 미스릴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황제 폐하와 같은 날 광산을 방문해야 한다는 뜻이고, 설령 잠입에 성공할지라도 폐하의 근위대와 대면하게 되겠죠. 그 즉시 황실과 적대하게 될 테니 템빨국과 제국의 화합은 영영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전락하고 말 테고요.”
“그럼 결국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딱 하나 있어요. 황실이 대대로 채굴해온 블랙 미스릴을 보관 중인 황제의 보고에 잠입하는 거죠. 폐하께서 광산으로 떠나는 날을 노린다면 근위대 상당수가 자리를 비울 테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해요.”
“황제의 보고....”
무려 서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의 보물창고다. 근위대 상당수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봤자 천지 어느 곳보다 삼엄한 경비를 자랑할 게 뻔했다. 어쩌면 드래곤 레어에 접근하는 일보다 난이도가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뭐든지 상대적인 법이다.
블랙 미스릴 광산으로 향했다가 황제와 마주치는 것보단 확실히 나아보였다.
‘하여튼 꼭 극상급 재료들이 문제네.’
행방 자체가 묘연할뿐더러 획득 난이도가 너무 높다.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바사라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황제가 광산으로 떠나는 날은 언젭니까?”
몇 달 후쯤일까?
그때까지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리드에게 예상외의 답변이 들려왔다.
“앞으로 8일 후에요.”
“8일 후...?”
“그래요. 얼마 남지 않았죠. 에단 탓에 황실이 혼란스러워진 지금 황제의 보고에 잠입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몰라요. 무조건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그렇군요.”
에단의 폭주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희망을 엿본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그때였다.
“근데 왜 운석에는 관심을 안 보이는 게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보니, 그리드의 무구가 늘어선 큰 탁자 아래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드워프 케를이었다.
허락 없이 찾아온 방문객이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알현실 입구는 당연히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
또한 내부에는 템빨그림자단 소속의 어쌔신들이 대기 중이었다.
한데 드워프 케를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당황하던 그리드가 문득 케를의 발아래를 보았다.
황색의 작은 골렘이 땅굴 속에서 배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정령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빛의 정령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케를이 기고만장하게 웃었다.
“인공 정령이라는 것이외다. 흙과 금속으로 빚은 골렘에 자아를 부여해서 대지의 정령을 가공한 것인데 꽤 쓸만하지. 보다시피 땅 파는 재주가 탁월하고 광물 냄새를 귀신 같이 맡아서 우리를 그곳까지 인도해준다오.”
“그게 있으면 황제의 보고에도 쉽게 잠입할 수 있는 거요?”
“어허, 큰일 날 소리. 내가 백 년도 더 전에 그 짓을 했다가 무저갱에 갇혔던 것인데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소?”
“.....”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무저갱에 갇혀있었나 했더니 도둑놈이셨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케를을 노려봤다.
“내 성을 멋대로 파괴하고 이곳까지 불법으로 침입했으니 이번에도 역시 감옥에 갇히셔야겠군.”
“무, 무슨.... 꼭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망가진 성은 며칠 내에 고쳐놓을 수 있소. 구멍만 다시 메우면 되니까. 그리고 귀하의 알현실에 침입... 방문한 이유는 의도적인 게 아니라 이 인공 정령이 광물 냄새를 맡아서 제멋대로 벌인 일....!”
“망가진 성을 수리하는 동안 생활인들이 겪을 불편은 어떻게 책임질 거요? 그리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허락 없이 불법 침입한 것은 맞지 않소?”
그리드는 케를을 귀빈으로 대접해주고 있었다.
드디어 만난 드워프였고 기왕 구해주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좋은 인연을 맺고 싶었다.
한데 너무 개념이 없다.
좋은 인연 맺으려다가 복장 터지게 생겼다.
이런 사람은 예의범절부터 가르치는 게 우선이다. 초장에 버릇을 확 잡아 놔야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케를을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하려는 순간이었다.
“성을 단순히 수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참에 증축시켜드리겠소! 내가 원래 예전부터 성 짓기 장인이라고 불리던 몸이외다! 그 옛날 루반나의 왕조차도 내게 요새의 건축을 부탁했을 정도란 말이오!!”
“....루반나의 왕?”
“마드라라고 있소. 한데 아주 옛날 사람인데다가 패망한 국가의 왕인지라 역사에 제대로 된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 귀하께서는 잘 모를 게요.”
생전의 마드라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리드의 기분이 묘해졌다.
케를은 연신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귀하의 알현실에 불법으로 침입한 이유는 귀하의 훌륭한 작품들을 한시 빨리 만나보고 싶은 열망에서였지 결코 악의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었소이다. 하니 부디 한 번만 선처해주시오! 내 다음부턴 결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소!”
“....기강을 바로 세우려면 선처하기 힘든데....”
“내가 댁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소만.... 새로운 광물을 만들 계획이라지? 블러드 스톤과 아다만티움을 이용해서? 블러드 스톤은 몰라도 아다만티움의 고유 특성까지 삭제해가면서 그러실 필요는 없소이다. 우주로부터 떨어진 운석의 파편이 바로 빛을 잃은 아다만티움이며 이 검이 바로 운석으로 만든 것이니까.”
드워프 케를이 가리킨 검은 다름 아닌 <별의 검>이었다.
그것은 검공 리미트가 떠나면서 남기고 간 아이템이었다.
아이템 정보에 ‘별의 파편’으로 만든 검이라는 설명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운석을 뜻하는 것일 줄은 몰랐다.
운석의 정체가 특성을 잃은 아다만티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좋은데?’
아다만티움의 특성은 강력한 신성력뿐만이 아니다.
제작자가 원하는 수준의 강도와 경도, 그리고 취성을 최대한 구현하는 성질을 지닌 광물이 바로 아다만티움이었다. 물론 한계치는 존재했지만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광물이라는 뜻이다.
그 특성을 삭제해야한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는데 드워프 케를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준 것이다.
씰룩, 움직이는 입 꼬리를 간신히 억누른 그리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소. 당신이 약속대로 성을 중축해주고 이번 광물 창조에 협력해준다면 감옥행은 없던 일로 해드리겠소.”
“오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내가 지금 고마워해야하는 상황인가?
케를은 문득 의문에 휩싸였지만 그냥 넘겼다.
감옥을 안 가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는 그였다.
***
사하란 황실군은 강했다.
병사들의 레벨부터가 종전의 제국군과는 비할 바 없이 높았다. 보유 스킬도 많았고 무장 상태도 훌륭했으니 아레스 군단과 템빨 군단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발할라 소속 플레이어들은 황실군을 비교적 수월하게 격파했다.
군사 사마천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마천은 지금이 내란 중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아일렌 후작보다 한 발 앞서 후작령에 도착하려는 황실군의 심리를 이용했다.
각각의 군대가 이용할만한 최단거리루트마다 복병을 배치시켰고, 설마 자신들의 구역에서 복병을 맞이할 줄 몰랐던 황실군은 황도 곳곳에서 각개격파를 당하고 말았다.
“훌륭하오. 정말 훌륭해.”
온통 승전보만 들려온다.
길드원들과 병사들의 레벨이 급상승하고 있다는 희소식까지 접한 아레스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사마천은 겸손했다.
“그랜드 마스터가 보내준 정보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의 정보가 없었다면 이처럼 적재적소에 복병을 배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자는 작은 힌트만 알려줬을 뿐이지 않소. 순전히 군사의 기량이외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아일렌 후작을 구원하러 가면 되는 거요?”
“그렇습니다.”
아일렌 후작을 구원해 무사히 후작령까지 호송한다.
후작령에서 최대한 농성하며 에단 황자의 합류를 기다린다.
에단 황자는 적기사단을 규합해 올 것이므로 황실군의 공세를 당분간 버틸 수 있다.
최소 일주일에서 최대 열흘.
그걸로 족하다.
“상대적으로 어린 에단 황자는 다른 황자들과 달리 외부세력에 노출 된 횟수가 적습니다. 그가 소수민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황실로부터 독립했다는 기치를 내건다면 각지의 소수민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소수민족들이 에일렌 후작령으로 집결하게 될 테고 제국의 내란은 길어지겠구려. 그때 우리는 국경에 대기시킨 본대를 움직여 제국을 외곽부터 정복해나가는 거고.”
서대륙의 패자로 군림하며 플레이어들이 넘볼 수 없는 성역으로 취급되었던 사하란 제국.
그리드조차도 넘보지 못했던 그 거대한 제국을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사람은 바로 내가 될 것이다.
생각하는 아레스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