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52화 (942/1,794)

템빨 51권 - 3화

“이 아저씨 귀엽네.”

“저, 저런 불경한!!”

몇 대에 걸쳐서 쌓아온 그렌할의 권세는 공작이라는 감투를 벗겨 놓고 봐도 굉장한 것이다.

서대륙 전체에서도 한손에 꼽을 정도.

당장 황실이 그렌할을 버릴지라도, 그렌할이 무사히 영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나의 국가를 세울 저력이 그에겐 있었다.

가히 존경받아 마땅한 우리 주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다?

상상조차 못해본 불경이다.

“감히 전하의 뺨을 콕콕 찌르는가!!”

“당장 그 손을 거둬라! 제아무리 성녀님의 일행이라지도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할 것이다!!”

도끼눈 뜬 일부 가신들이 버럭 고함쳤다. 당장 검이라도 뽑아 쥘 기세가 발산되면서 섹시여고생의 시야에 온갖 알림창이 떠올랐다.

[상태이상 ‘공포’에 걸립니다.]

[상태이상 ‘억압’에 걸립니다.]

[상태이상 ‘혼란’에 걸립니다.]

[패시브 스킬 <기적을 수호하는 자>의 효과로 ‘공포’와 ‘혼란’에 저항합니다.]

[패시브 스킬 <기적에 발을 담근 자>의 효과로 ‘억압’의 지속 시간을 줄입니다. 줄인 시간만큼의 ‘억압’을 대상에게 돌려줍니다.]

[대상이 저항하였습니다.]

[대상이 저항....]

“....!”

그렌할의 가신들이 깜짝 놀랐다.

역전의 용사인 우리의 기세에 위축되기는커녕 맞서 겨루다니?

많아 봐야 약관으로 보이는 소녀가 사실은 엄청난 실력자였다.

‘대단한 인재다. 이른 나이에 성녀와 함께 다니는 이유가 있었구나!’

과연 제국과의 전쟁에도 굴복하지 않던 나라답다. 템빨국은 비록 작지만 저력이 굉장한 나라였다.

감탄하는 가신들이었으나 잠시 뿐.

그들이 섹시여고생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서슬이 퍼랬다.

배꼼 혀를 내민 섹시여고생이 데헷하고 웃었다.

“미안해요. 아저씨가 너무 귀엽길래 그만 실례를.”

“이익...! 자꾸 아저씨며, 귀엽다니! 대체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자꾸 그런 망발을....!”

“모르는데용?”

“.....”

아니, 모른다고?

설마 모른다고 답할 줄은 몰랐던 가신들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섹시여고생 예림은 여전히 잠든 척 누워있는 그렌할의 손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깊은 상처자국이 가득한 손등이었다.

“그동안 고생 참 많이 하셨나 봐요. 힘드셨겠네. 잠깐이라도 푹 쉬어요.”

“.....”

그렌할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이름도 모르는 소녀의 위로 같은 몇 마디가 그렌할의 약해진 마음을 자극했다.

대대로 공경했던 황실은 나를 위협했고, 평생 헌신해온 조국은 나를 외면했건만.

이 먼 타국의 왕이 나를 지켜준 것으로 모자라서 그의 백성이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

이건 대체....

“.....”

질끈 입술을 깨무는 그렌할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오로지 군림했던 존재.

지켜지고 나서야 자신 또한 평범한 인간임을 깨닫는다.

온갖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

퍽! 퍽퍽퍽!!

‘그새 친해졌네.’

힐끔 보니, 섹시여고생 예림은 제국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냥 중에 왜 갑자기 라인하르트로 돌아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때만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뾰로통해져 있었는데 다행히 기분이 풀린 듯하다.

‘하여튼 금방금방 친해진다니까.’

퍽퍽! 퍽퍽퍽!!

성녀 루비는 낯을 조금 가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새로 만난 사람과 금방 친해지지 못했고 아직도 서먹서먹한 템빨단원이 많았다.

반면 섹시여고생은 다르다. 늘 호기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녀는 솔직하고 밝아서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녀가 없었다면, 루비는 여전히 Satisfy에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빠 등 뒤에 숨어있었을 테고, 게임에 흥미도 갖지 못했겠지.’

정말이지 친구 하난 잘 뒀다.

올케로 맞이하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생각하며 미소 짓는 루비는....

퍽! 퍽퍽퍽!!

“응....! 응잇....!”

여전히 매타작 중이었다.

손에 쥔 나무 지팡이로 계속, 계속 모르이즈를 후려 팼다.

“모, 모르이즈 님....”

모르이즈의 가신들은 여전히 안절부절 못했다.

다짜고짜 우리의 주인을 폭행하는 성녀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성녀가 괜한 폭력을 행사할리 없다는 생각에 쉽게 나서지도 못했다.

성녀.

유명한 전설 속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그 존재를 ‘빛의 여신의 대행자’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제국이었으니까.

제국인들에게 있어서 성녀란 신의 화신이었고 그만큼 경배하는 존재였다.

템빨국 내에서 수많은 선행과 기적을 펼쳐온 당대 성녀에 대한 소문, 제국 귀족들에게까지 퍼져나간 지 이미 오래다.

과연 전설 속 성녀와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이단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추천해준 인물이 템빨왕 그리드였으니 의심보단 신뢰가 가는 상황이다.

“.....”

소란스러운 병실에서 루비만큼은 묵묵히 집중했다.

그녀의 시야에는 모르이즈의 몸 곳곳에 붙어있는 ‘붉은 점’이 보였다.

손상 된 신체 부위를 표시해주는 것으로, 루비가 180레벨을 달성했을 당시 얻었던 스킬 <재생요법>이 파생시킨 효과다.

<재생요법>Lv.3

‘자애의 손’을 활성화시켜 물리적인 상태이상을 발생시키는 상처의 재생을 촉진합니다.

*대상이 플레이어일 시

상처 부위에 ‘자애의 손’이 접촉하는 즉시 상처가 회복됩니다. 물리적 상처가 ‘절단’일 경우 ‘자애의 손’이 10초 이상 접촉해야 신체가 재생합니다.

*대상이 플레이어의 펫 혹은 소환수일 시

상처 부위에 ‘자애의 손’이 3초 이상 접촉해야 상처가 회복됩니다. 물리적 상처가 ‘절단’일 경우 ‘자애의 손’이 20초 이상 접촉해야 신체가 재생합니다. ‘자애의 손’이 대상과 접촉해있는 동안 대상의 생명력을 회복시킵니다.

*대상이 NPC일 시

상처 부위에 ‘자애의 손’이 수차례 접촉해야 상처가 회복됩니다. 접촉 횟수는 상처의 정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물리적 상처가 ‘절단’일 경우, 현재 스킬 레벨에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스킬 마나 소모:초당 3,000. 혹은 횟수당 3,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없음.

반드시 접촉해야만 발동하는 스킬.

전투 중에 활용하기에는 난이도가 다소 높다.

더군다나 마나 소모가 무척 컸고, 플레이어가 아닐수록 소모의 정도가 더 커졌기 때문에 루비는 이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었다.

일일 퀘스트 <선행> 중에만 사용하는 스킬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대악마 베리드를 레이드한 이후부턴 이야기가 달라졌다.

베리드의 영혼을 소멸시키고 얻은 특등 보상이 <나무 지팡이>를 한 단계 더 진화시켜준 덕이다.

<+7나무 지팡이>

등급:유니크(초월)

내구력:830/830 공격력/방어력:733

*지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 200 상승.

*지력 300 상승.

정체불명의 나무로 제작된 지팡이입니다. 무척이나 단단하여 검에 베여도 잘리지 않습니다.

*모든 치유 효과 +7퍼센트.

*2명의 파티원에게 5분마다 랜덤한 버프 부여.

*1분마다 파티원의 디버프를 삭제.

*모든 스킬의 자원 소모 10퍼센트 감소.

*‘자애의 손’부여 가능. 자애의 손 부여 시 공격력 삭제. 자애의 손의 효과 10퍼센트 상승.

사용 조건:성녀

무게:180

무척 평범한 이름과 외관.

하지만 무려 성녀의 전용 무기이다.

그리드가 기껏 +9까지 강화해줬으나 루비가 질렀다가 강화 수치를 날려 먹었던.

등급이 진화할 때마다 강화 수치가 초기화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7 강화로 만족한 채 사용 중인.

나름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있는 이 지팡이에는 본래 ‘모든 능력치 상승’이라는 옵션 하나만 달랑 달려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루비 또한 성장해왔다.

선행의 반복으로 많은 기연을 얻었고 히든 퀘스트의 수행과 레벨 업을 통해서 히든 피스를 개방했다. 대악마 벨리알과 베리드의 영혼을 소멸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루비가 성장할 때마다 지팡이도 함께 성장했다.

이제 지팡이에는 스탯 상승을 포함한 7가지 옵션이 붙어있었는데 그 모든 옵션이 다 주옥 같았다.

게임 좀 아는 사람이 이를 본다면 임철호 회장이 그리드 남매의 친할아버지일 거라는 의심을 품을 정도로 사기적인 옵션일 정도.

루비는 특히 자애의 손 옵션이 마음에 들었다.

자애의 손은 재생요법 외에도 <강화요법>과 <징벌의 파도>라는 스킬 발동의 조건이 되는 스킬이었으니까.

자애의 손을 직접 사용할 때는 ‘대상에게 접근해야한다’는 전제가 발생해서 활용하기가 까다로웠지만 지팡이를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은 2미터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사용하기가 비교적 수월해졌다.

‘도대체 누가 이런 심한 짓을....’

퍽! 퍽퍽퍽!!

자애의 손이 깃든 지팡이를 벌써 수십 회나 접촉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이즈의 몸에 각인 된 붉은 점들은 옅어질 생각을 않았다.

그만큼 모르이즈의 상처가 깊다는 뜻이었고 루비의 마음은 점차 더 무거워졌다.

이 모르이즈라는 사람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속이 울렁거렸다. 꾹 참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정도로 무서웠다.

“.....”

모르이즈는 루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 불과하다.

한데 그녀는 왜 나를 위해 슬퍼해주는 걸까.

‘이것이.... 성녀....’

평생 타인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존재.

전설 속 성녀를, 모르이즈는 딱히 좋아하지 않았었다.

소위 말하는 호구처럼 보였으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 살아도 인생은 짧기 마련인데 왜 굳이 남까지 챙긴다는 건지 모르이즈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녀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웃을 수가 없다.

그녀의 자애가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었으니까.

“....”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끌어올려지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선의가 내 삶 자체를 구원하고 있다.

‘이제... 알겠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성녀를 존경한 이유.

깨닫는 모르이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맹수의 것처럼 날카롭던 눈매가 온화해졌다.

그가 말했다.

“내가 정녕 회복된다면.”

“....?”

“그대의 곁에서 그대를 지키고 싶소.”

“네?”

갑자기 뭐라는 거람?

당황한 루비의 손이 엇나갔다. 붉은 점을 때렸어야할 지팡이가 급소를 가격하고 말았다.

“억.”

모르이즈의 찌를 듯한 비명이 병실을 울리자.

“드르렁.”

상념에서 깨어난 그렌할이 다시 코를 골았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병실에 감돌았다.

***

[<재생요법>이 성공하였습니다!]

[대상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됐어!”

기쁨에 외치는 루비의 호흡이 거칠다. 그녀의 가는 목과 쇄골, 그리고 투명한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장장 6시간.

휴식과 매타작을 반복하며 2명의 공작들을 치료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우와아아아아아!!”

“두 분 전하의 회복을 감축드립나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가신들이 환호했다.

짙은 검흔이 아로새겨진 채 빛을 잃었던 그렌할의 두 눈이 다시 뜨였고 모르이즈의 사지가 멀쩡해졌으니 기적을 목격한 셈이다.

우리들의 주인께서 말끔히 회복되진 못할지라도, 그저 한치 앞을 볼 수만 있고 두 발로 걸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던 그들의 입장에선 두 공작의 회복이 꿈만 같이 기뻤다. 루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꺼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큰 감사를 느꼈다.

그리고 루비도 그들만큼의 기쁨을 느꼈다.

타인의 불행을 바로잡아준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행복이었기에.

‘예전의 오빠도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루비의 시야로 알림창이 갱신되고 있었다.

[대제국의 최고 귀족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강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역사에 크게 남을 업적입니다.]

[대륙 전역 명성이 8천 상승하였습니다.]

[당신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쉽게 쓰러져선 안 됩니다. 특수 보상으로 생명력 최대치가 1만 증가합니다.]

[사하란 제국의 공작 ‘모르이즈’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모르이즈는 당신을 위해서 살아갈 의향이 있습니다.]

[사하란 제국의 공작 ‘그렌할’과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그렌할은 당신에게 많은 걸 해주고 싶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생명력 오른 건 참 좋다.

이제 쉽게 죽지 않을 것 같다.

함박웃음 짓는 루비의 머리카락을 누군가가 쓰다듬어주었다.

“수고했어.”

그리드였다.

혹 동생을 방해할까,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 또한 웃고 있었다.

“바사라 공의 치유는 어떨 것 같아?”

“상처의 종류가 달라서 조금 더 자세히 봐야할 것 같아.”

기대감이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루비는 멍하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바사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리드에게 다가온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고개를 숙였다.

“장담컨대, 저희들의 가문은 영원히 템빨국에 은혜를 갚아나갈 것입니다.”

“그런 말보단.... 두 분께서 회복하셨으니 정말로 다행이오.”

“전하....”

“일단 쉬시오. 바사라 공께서 회복되는 즉시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지 않소?”

“아니요. 바사라 공의 곁을 지키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합니다. 저희는 지금 바로 제국으로 가야합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변을 당하신 건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현재 에단은 완전히 폭주 상태였다.

황제에게 위해를 가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필시 믿는 구석도 있어보였다.

특히 그랜드마스터가 신경 쓰인다.

“황실의 수호야말로 저희의 의무. 우선 황실을 바로잡고 고민해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내가 개입했다간 일이 커질 테니 멀리서 응원하겠... 응?”

뭘 고민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리드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공작들이 꾸벅,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어서 루비와 섹시여고생에게도 다가가 재회를 약속한 그들이 부하들을 재촉했다.

“황도로 간다. 조금의 이변이라도 감지될 경우 바로 영지로 돌아가 전군을 출정시킬 것이다.”

“예!”

폭풍전야다.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는 그리드 남매가 있었다.

“히힛! 오빠 하이용!”

“떠, 떨어져.”

아, 섹시여고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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