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2화
“....?”
매스 텔레포트를 타고 라인하르트에 도착한 공작의 가신들이 당황했다.
도심 한가운데가 아닌 왕의 궁전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성대한 왕의 귀환식이 기다릴 줄 알았더니, 이렇게 조용히 귀환해버린다고?
‘왜 행사를 열지 않는 거지?’
제국 황제를 비롯한 모든 국가의 왕. 아니, 영주쯤만 되도 이동이 요란하게 마련이다. 성 밖으로 나가고, 돌아올 때마다 백성들을 소집해서 행사를 열고 자신을 찬양하게끔 유도했다.
민심 장악을 위한 선전이다.
지배자의 외출 사유가 비록 개인의 유희를 위한 하찮은 것일지라도 백성들을 위한 봉사와 희생으로 포장하긴 쉬웠으니까.
한데 그리드는 그 좋은 선전의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제국 귀족들을 데리고 귀환했음에도 말이다.
‘우리를 데려온 김에 어떻게든 선전에 이용할 줄 알았는데 간략한 귀환식마저 열지 않다니....? 민심 관리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우리의 왕이 수십 명의 제국 귀족들과 함께 귀환했다. 한데 그 제국 귀족들이 하나 같이 우리 왕께 깍듯하다.
백성들이 긍정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아주 좋은 구도다. 얼마든지 좋은 연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를 이용하지 않는다.
생각이 짧아서일까?
아니, 홀로 일국을 일군 인물이다.
천기를 거스른 반역자 출신이라고 하나 그의 능력까지 의심하고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지해서 좌시하는 게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신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우리를 향한 배려였구나!’
공작의 가신들은 안 그래도 큰 죄를 범했다.
감히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황제의 영토를 침범했을 뿐더러 황족이 무저갱에 가둬놓은 공작들을 빼내왔다.
주인을 향한 충심에서 비롯된 행위다, 라는 핑계로는 부족한 대역죄였다.
우리 주인의 주인이 바로 황실이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템빨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앞뒤 정황과는 관계없이, 우리가 템빨국과 결탁해서 제국을 배반한 거라는 누명을 뒤집어썼을 터.’
‘공작님들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졌겠지. 템빨왕은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귀환한 것이로구나.’
‘몇 번이고 은혜를 입는군....’
감탄과 감격이 교차한다.
그리드를 쫓아서 입궐하는 가신들의 눈빛에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
“후우.”
공작들을 병실에 눕힌 그리드가 일단 집무실로 돌아왔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전투를 겪은 직후인지라 정신적인 피로도가 상당하다.
갑옷과 망토를 벗어 인벤토리에 넣은 그가 라우엘에게 웃어주었다.
“고마워. 저들의 템빨국 방문을 공표하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해준 거 말이야.”
“탐스러운 과실을 썩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드가 4만의 제국군 기병과 수십 명의 제국 귀족을 데리고 귀환할 거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경위를 설명 받은 라우엘은 큰 흥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정보를 조금만 유출해도 템빨국의 입지가 크게 상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공작들이 수만의 사병을 이끌고 템빨국을 방문했다?
그 작은 소문이 온갖 추측을 만들고 주변 국가들이 템빨국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리라.
하지만 라우엘은 꾹 참았다.
제국이 공작들을 반역자로 몰아갈 확률이 높았기에.
‘공작들이 축출 당해선 안 돼. 공작들은 세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야 우리의 힘이 된다.’
그리드가 힘들게 쌓아올린 인연이다. 그러니까 더욱 더 철저히 이용해야한다.
라우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순수하게 공작들을 걱정하는 그리드와 달리 그는 공작들을 유용한 패로 인식하고 비호할 뿐이었다.
물론 그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우엘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라우엘의 역할이었으니까.
쓴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질문했다.
“그래서 세희.... 루비는 언제쯤 도착할 거 같아?”
“호위로 템빨그림자단을 보냈으니 2시간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
“성녀라는 직업이 사기는 사기야. 벌써부터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사냥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물론 직업의 덕도 크겠지만 그보다는 센스가 탁월합니다. 그간의 동선을 분석해보니 굉장히 효율적으로 게임을 진행해 오셨더군요. 루비 님과 섹시여고생 님 두 분 모두 게임에 재능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그래? 도대체 나랑 닮은 구석이 없군....”
멍청한 오빠와 달리 똑똑했던 아이다.
심지어 오빠랑 달라서 성격도 착하고 얼굴도 예쁘다.
가끔씩은 친남매가 아니지 않을까, 의심을 해봤을 정도로 나랑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래서 좋고 든든했다.
못난 나와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대체 몇 번이나 했던지....
그리드가 생각할 때였다.
“화낼 때 보면 꼭 닮은 것 같습니다만.”
“엉?”
“두 분 말입니다. 화났을 때 눈매랑 입모양이 꼭 닮았어요. 말투 거칠어지는 것도 그렇고.”
“하필 안 좋은 게 닮았네.”
실소한 그리드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작들은 고칠 수 있겠지?”
말투와 표정으로부터 슬플 정도의 근심이 느껴진다.
그리드는 공작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워낙 많은 일들과 이야기가 있었기에 금세 정이 든 것이다.
그들의 처참한 몰골을 봤을 때 받았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질 않는다.
“그렌할은 두 눈이 뽑혔고 모르이즈는 사지가 박살났어. 그리고 바사라는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그 지혜롭던 여자가 완전히 백치가 됐다고.”
너무 큰 상처들을 입었다.
성녀가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규정된다고 해도 큰 장애마저 치유하는 게 가능할까?
공작의 가신들 앞에서는 호언장담했지만 사실은 불안하다. 그들 앞에서 성녀라면 꼭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던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라우엘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빛의 여신의 권위마저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성녀입니다.”
성녀라는 직업의 가장 큰 페널티는 매일 수행해야하는 수십 회의 선행이다.
루비가 장애를 겪고 있는 백성들을 치료해줬다는 소식을 라우엘은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었다.
영원히 윤회하는 대악마의 영혼조차 소멸시키는 신성력.
그것은 빛의 여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성녀 고유의 기운이라고, 시스템은 설명한 바 있다.
“성녀의 권능은 진짜죠. 믿으셔도 좋다고 봅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타락한 신들을 끌어내릴 때.
새로운 빛의 여신은 인계에서 탄생할 것이다.
이는 라우엘의 추측이었다.
성녀라는 직업이 그만큼 특수하다는 뜻이다.
지닌 능력이 세계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최소 잠재력을 신화급으로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공작들이 누워있는 병실 앞.
모여 선 가신들이 저마다 의견을 펼쳤다.
“이번 일의 배후에는 필시 황제가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에단이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이유만으로 공작님들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완전히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어찌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였겠습니까? 이번 일은 에단이 독단으로 벌인 거라고 보기 힘듭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다섯 기둥에게 힘을 실어주고 계셨으니까요. 이참에 공작 전하들을 축출하고 황실의 힘을 키우려는 게 아닐지....”
“당치 않은 억측이외다. 개국공신 가문을 건드렸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어찌 감당하려고? 황후께서 서거하신 이후 폐하께서 다소 아둔해지셨다고는 하나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는 아니요.”
“맞습니다. 지금은 도리어 폐하를 걱정해야할 때입니다. 어쩌면 에단 황자가 폐하를 이미 음해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겁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거겠죠.”
“에단이 폐하를 무슨 수로? 에단의 재능이 탁월하다고 하나 폐하는 이미 완전체시고 다섯 기둥의 비호까지 받고 있는데.”
“기둥들이 배신했을 수도 있지.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랜드마스터가 문제요. 그자가 에단에게 힘을 실어줬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오.”
수군수군.
가신들은 나름 작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지만 공작들의 청력은 극한에 이르러 있는 바.
병상에 누운 모르이즈는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그들의 말소리를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큭큭, 재밌네. 에단이 완전히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군.”
우리의 설명이 부족하기도 했다.
워낙 경향이 없어서 뭘 제대로 설명하기도 벅찼다.
솔직히 지금도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제길.”
모르이즈는 바들바들 떨리는 자신의 사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손끝과 발끝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힘줄이 모조리 끊겨버렸으니 당연하다.
“....핫.”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하루아침에 사지를 잃을 줄이야.
이런 신세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제길.... 제기랄....”
가장 분한 점은, 너무 무력하게 당했다는 것이다.
베리드 토벌전에서 마장기의 약점을 충분히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이즈는 기습에 쉽게 대처하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황실을 섬겨온 공작가의 유전자에는 적기에 굴복하는 성질이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이제 목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모르이즈가 베개에 연신 뒤통수를 박았다. 이대로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천하의 내가 앞으로 평생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성녀에 대한 소문은 몇 번 들어봤지만 전혀 기대가 안 된다.
제아무리 지고한 경지에 오른 신성력이라고 해도 영구적인 장애까지 치유할 리가 없다.
“.....”
모르이즈가 발광하는 와중에도 건너편 침상에 누운 그렌할은 그저 묵묵히 있었다. 그 또한 머리가 복잡했다.
‘허망하구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조국과 황실에 충성해왔는가.
정녕 충성한 것이 맞는가.
내가 진정한 충신이었다면, 황실의 핏줄이 그릇 된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진즉에 간파하고 그를 올바르게 붙잡아 주었음이 옳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영웅 피아로를 지키지 못했던 시점부터, 이미 나는 무능한 잡배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내 몸의 상처들은 영웅의 훈장 같은 고귀한 게 아니었다.
“제길! 제길! 크아아아악!!”
“.....”
모르이즈의 발광은 점차 더 심해졌고 그렌할의 낯빛은 점차 더 어두워졌다.
두 사람에게 지금 이 현실은 지옥이었다. 그냥 미칠 것만 같았다.
지독한 절망 속에서.
“정화.”
쏴아아아아....
태양보다 찬란하고 따스한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평온이 찾아왔다.
분노와 원한, 그리고 고통과 허무로 복잡하게 얽혔던 두 사람의 정신이 순식간에 맑게 깨어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모르이즈가 동그래진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흑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
이처럼 강렬한 만남이 세상에 또 있을까.
모르이즈는 소녀로부터 후광을 엿봤다.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새카만 거미줄이 빛 앞에 녹아내림을 느꼈다.
하지만 감동은 짧았다.
빠악-!
“....!?”
소녀가 다짜고짜 나무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녀의 지팡이가 모르이즈의 사지를 연병장 허수아비 때리듯 난타하기 시작했다.
“서, 성녀님!?”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가신들이 어찌할 줄 모르는 그때.
“흐읍....! 응....! 응이잇....!!”
반사적인 신음을 토하고 있던 모르이즈의 손가락 하나가 움찔, 크게 움직였다.
헛것이 아니라 진짜다.
모두가 봤다.
기적을 목격한 그렌할의 가신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 이걸 어쩌지?’
‘저 지팡이로 눈을 후벼지시는 건가....?’
하필 왜 눈을.....
이쯤 되자 에단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더 커진다.
이를 악 문 그렌할의 가신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꿀꺽!”
그렌할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비록 두 눈을 잃었다곤 하나, 발달한 감각 덕분에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그가 결국 코를 골기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자는 척을 하면서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다.
성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소녀가 그런 그렌할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이 아저씨 귀엽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