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1권
=======================================
템빨 51권 - 1화
“서두릅시다!”
무저갱을 탈출하는 그리드 일행의 이동속도가 최대치 가까이 도달했다. 등에 업은 공작들의 상태가 심각했으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드는 무저갱을 탈출하는 즉시 라인하르트로 귀환, 루비에게 이들의 치료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꺼져!”
키에엑!
길목마다 출몰하는 간수들은 그리드가 앞장서 처치했다. 4차 각성을 이룬 그의 공격력은 전보다 수백이나 상승한 상태였다.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신속한 몸놀림까지 사용했으니 품에 바사라를 안고도 간수들을 압도했다.
“실로 훌륭한 검이로다!”
템빨콘에 탑승한 채 그리드 일행을 뒤따르는 케를이 연신 감탄했다. 그때마다 입에서 툴툴, 침이 튀었기 때문에 템빨콘의 짜증이 극에 달했다.
푸르릉!
안 그래도 수컷 따위를 등에 태워서 열 받는 마당에 더러운 침까지 튀기다니?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템빨콘이 도끼눈을 뜨고 속력을 높이자 케를의 꾀죄죄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히, 히익! 나 죽어! 나 죽는 다고, 이 호색한아!!”
쿠당탕탕!!
천장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종유석들이 와장창 박살나기 시작했다. 케를의 넓적한 얼굴과 충돌한 여파였다.
“아, 아이고, 이놈....”
죽게 생긴 케를이 결국 납작 엎드렸다. 얼굴이 팅팅 부은 그가 템빨콘의 등에 찰싹 붙어서는 숨을 죽였다. 그제야 속이 풀린 템빨콘이 그리드를 쫓아 안전한 경로로 이동했다.
숨 한번 거를 틈도 없이 전진한 끝에.
“허억.... 허억....”
일행은 무저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퀘스트는 제가 선임 기사를 찾아가 완료할 테니 보상은 걱정 마시고 서두르십시오.”
“이번 일,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그리드 님 덕분에 퀘스트도 클리어하고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레쉬의 인사에는 일말의 가식도 과장도 없었다.
이번 <무저갱 탐색> 퀘스트, 자신이 그리드와 코크에게 공유해준 것은 맞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결코 클리어하지 못했을 테니까.
감옥을 지키는 마족 비프론즈, 그리고 비프론즈를 꺾은 후 등장하는 검공 리미트.
어지간한 하이랭커 셋의 힘으로는 그들을 쓰러뜨린다는 게 불가능하다.
아니, 감옥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으리라.
1인밖에 통과할 수 없는 좁은 길목에 출몰하는 간수장들조차 돌파하기 힘든 게 현실일 테니까.
정말 천운이었다.
기사도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코크와의 인연은....
“두 분께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겁니다.”
“우선 밥부터 한 끼 사주십쇼. 어차피 같은 한국에 사는데 만나기야 쉽잖아요?”
연신 예를 표하는 레쉬에게 코크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참에 레쉬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한다는 건 같은 관심사를 가졌다는 뜻이고, 실력마저 출중했으니 가까이 지내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레쉬가 흔쾌히 수락했다.
“식사야 몇 번이고 대접하겠습니다. 저야 두 분과 만날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
“우리랑 만났다가 극검한테 걸리면 난리 날 텐데. 그 인간, 당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즉시 욕을 바가지로 퍼부을 겁니다.”
“하하.... 감수해야지요.”
“좋아요. 다음에 꼭 봅시다.”
그리드도 레쉬가 참 마음에 들었다. 훌륭한 실력도 실력이지만 선한 인상과 겸손한 성격이 절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드는 레쉬와의 인연을 쭉 이어가고 싶었다. 반드시 템빨단에 섭외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당장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에게도 그만의 길이 있으니.
아쉬움을 뒤로한 그리드가 코크를 재촉했다.
“서두르자, 코크.”
에단의 군대가 출동하기라도 했다간 상황이 더 힘들어진다.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그리드가 레쉬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거친 소음과 함께 사방 대지가 격렬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지평선을 가득 뒤덮는 군마의 대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족히 수천 아니, 수만의 군세다.
한데 죄다 기병이다.
기병 한 명 육성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보병 30명 육성하는 비용과 맞먹는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두두두두....
바늘 하나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기병대의 대열이 그리드 일행을 둘러싸며 점차 거리를 좁혀오자.
“제국의 군대입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코크가 질색했고 케를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얼굴을 굳히는 그리드에게 케를이 손을 내밀었다.
“제국이 괜히 제국인 줄 아시오? 제국의 극악무도함은 철두철미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무저갱에서 탈출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소. 자, 어서 검이나 구경시켜주시오. 다시 붙잡혀 끌려가기 전에 내 그 검을 반드시 구경하고 싶소.”
“돌파한다.”
그리드는 케를을 무시했다. 코크에게 말한 그가 노에를 비롯한 펫들을 소환하려다가 멈췄다.
“그렌할 전하!!”
“바사라 영주님!!”
“모르이즈, 이 멍청아!!”
그리드 일행에게 접근해오는 수만의 기병단, 다름 아닌 세 공작들의 사병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도에 귀족의 무장군대가 출입한다는 것.
통상적으로는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대역죄가 될 수 있었다.
하여 늦고 말았다.
그렌할, 바사라, 모르이즈의 가신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공작들 앞에 무릎 꿇었다.
“이변을 감지했지만 당장 달려올 수가 없었나이다!”
“저희의 무능을 용서하소서....!”
“황실의 근위대가 뒤쫓아 오고 있습니다! 당장 탈출하셔야합니다!”
“모르이즈 이 등신 새끼! 내가 우선 영지로 돌아오랬잖아!!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서 이런 사달을 겪은 거야!!”
“.....”
와중에 자꾸 모르이즈한테 욕을 뱉는 저 여자는 누굴까.
명색이 제국의 공작한테 저런 태도를 보여도 되는 건가?
한눈에 봐도 한 성깔 할 것 같은 여장부를 애써 외면한 그리드가 품에 안고 있던 바사라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템빨국 왕 그리드요.”
“알고 있습니다.”
란포드라는 이름의 노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낡은 갑주를 무장한 그는 바사라 가문의 군대를 대표하고 있었는데 이름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각 공작들의 가신 중에는 네임드 NPC가 심심찮게 보였다.
“바사라 전하께서 무신의 유적지에서 돌아오신 날, 마법 통신으로 템빨왕 전하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보아 하니, 다른 공작의 가신들 또한 그리드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들 모두가 그리드에게 정중히 목례를 건넸다.
“이번에도 전하께서 모두를 구출해주신 거겠지요. 정녕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상황을 유추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이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렌할 공작가문은 오늘 날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바사라 공작가문은 오늘 날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르이즈 공작가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작들의 가신들이 전원 그리드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외치자 수만의 군사들이 복창했다.
다양한 감정이 깃든 외침이었다.
평야가 진동했고 무저갱의 입구가 웅웅 메아리쳤다.
“나는 단지 내 친구들을 도운 것뿐이오.”
그리드는 최대한 겸손하게 대응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야 생색 좀 내고 싶었지만, 아직은 생색을 낼 타이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아직은 참을 때였다.
“그리드 전하....”
사정을 모른 채 그리드의 말에 감격한 그렌할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에단에게 두 눈을 뽑힌 그는 장님이 되었으나 그리드의 늠름한 모습을 머릿속에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왕이다.
템빨국의 신민들이 그리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다.
“제.... 제길....”
사지의 힘줄이 끊긴 고통을 감당 못하고 간헐적으로 정신을 잃고 있던 모르이즈가 눈시울을 붉혔다. 가문 대대로 충성했던 황실이 아닌, 고작 며칠의 인연을 맺었을 뿐인 타인이 우리를 구원해주다니.... 그의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반면 바사라는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감옥에 갇혀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을 벌린 채 죽은 눈으로 먼 하늘만 응시했다.
초상집 같은 분위기 속에서 기사들이 재촉했다.
“서둘러 영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한다. 황실 군대와 충돌하게 됐다간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짐작할 수 없다....
“당장 레베카 교단에 서신을 보내라. 교단의 장로들이 나서준다면 전하들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병사들을 재촉한 가신들이 공작들을 챙기기 시작할 때였다.
“라인하르트로 갑시다.”
그리드가 말했다.
“라인하르트 말씀이십니까....?”
라인하르트는 템빨국의 왕도다.
굳이 그곳을 왜?
당황하는 가신들 앞에서, 그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설명했다.
“내 친동생이 성녀요.”
“....!!”
“내 동생이라면 이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오.”
“....!!”
“물론 내 동생이 많이 힘들겠지만, 내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필시 희생해주겠지. 정말 아주 많이 힘들겠지만. 반드시, 꼭.”
드디어 생색낼 타이밍인 것이다.
깜짝 놀라서 할 말을 잃은 가신들에게 그리드가 대답을 촉구했다.
“믿고 가겠소?”
“무, 물론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할 상황이다.
하물며 템빨왕 그리드는 신용해도 좋을 상대.
가신들이 즉시 고개를 끄덕이자 코크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람들 또 기겁하겠네....’
레쉬와 케를은 기겁하고 있었다.
‘자칫 반역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는 공작의 사병들이 템빨국에 의탁 한다라.... 흐름이 심상치 않군.’
‘콧대 높은 제국 귀족놈들이 타국의 왕에게 저토록 의지하다니? 지난 수십 년 동안 세상이 미쳐 돌아가게 된 건가?’
***
“진짜 짜증나는군.”
4황자 에단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여유로 점철됐던 그의 얼굴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겨져 있었다.
“어째서 그대가 제국 일에 개입하는 거지?”
발루아 강 하류.
영지로 돌아가는 레이첼을 추적해온 에단은 기분이 무척 좋았었다. 레이첼 포획까지 성공하면 불안 요소가 모두 제거됐으니 마음이 편했다.
한데 제3자의 방해를 받아 계획이 실패하게 생겼다.
검성.
피아로조차 이루지 못했던 경지에 오른 흑발의 사내가 다짜고짜 등장해 레이첼을 도운 것이다.
그는 어째선지 마장기의 약점을 알고 있었고, 검기를 구름처럼 펼침으로써 시계를 방해해 시간을 끌었으니 골치가 아팠다.
마장기들이 지속 시간의 한계를 맞이하고 가동을 멈춘 지 오래.
에단은 공교롭게도 직접 검을 뽑아 레이첼을 상대해야했다.
1대1 승부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크라우젤의 ‘아직은 위력이 약한.’ 그러나 좌시할 수 없는 묘리를 담고 있는 검술이 자꾸 에단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리미트를 보내지 말 것을.’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무저갱의 침입자를 식별하는 탐지 마법이 작동했다. 에단은 가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리미트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함께 일을 처리한 후에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무저갱은 비프론즈가 지키고 있으니 충분히 여유가 있었을 텐데.
‘이거 일이 심하게 꼬인 것 같은데.’
쯧, 혀를 찬 에단이 적기를 발출했다.
대상은 크라우젤.
움찔 놀란 크라우젤이 한 걸음 물러섰으나 그뿐. 손에서 검을 놓진 않는다.
에단의 판단은 빨랐다.
“똥이나 치우러 가야겠군.”
이제 와서 레이첼의 신변은 중요한 게 아니다. 감히 나를 방해한 검성을 처단하는 것은 약간의 시간 낭비를 각오해야할 듯한데, 촌각을 다투는 지금은 그 짧은 시간마저도 귀하다.
검을 거둔 에단이 레이첼에게 작별을 고했다.
“운이 좋으시구려. 다음에 또 봅시다.”
“다음에 만났을 때 전하는 황자가 아닌 반역자가 되어있겠군요.”
“큭큭, 아무래도 그럴 것 같구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나를 방해한 배후가 누굴까?
‘도대체 어떤 자식이....’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에단이 군대를 수습해 자리를 떠났다.
그는 우선 그랜드마스터를 만나볼 계획이었다.
곧 둘만 남게 된 레이첼이 크라우젤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알고 나를 도우러 온 거죠?”
“베리드를 토벌하고 돌아가던 길에 스승님께서 귀띔해주셨습니다.”
강한 적기를 느꼈다, 라고.
아직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륙 제일 창 키리누스는 황실의 피에 굉장히 민감한 인물이었고 황실 내부의 사정도 훤하게 들여다보았다.
피아로와 공작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황족 누군가가 목격했으니, 최악의 경우 공작들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잠시 황도로 가서 그들을 도와라.
크라우젤이 받은 히든 퀘스트의 내용이다.
공교롭게도 다른 세 공작들은 지키지 못했지만, 레이첼이라도 지켜서 다행이다.
‘....나머지는.’
크라우젤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드가 남은 공작들을 구출했을 거라고.
베리드를 레이드하고도 오르지 않았던 그리드의 레벨이 하필 지금 이 순간 오른 것이 그런 예감을 들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500레벨은 무리라도 600레벨은 내가 더 빨리 찍어 보이마.’
플레이어 최초로 100레벨을 달성하고 얻었던 선구자 칭호는 이후 쭉 크라우젤의 것이었다.
200레벨과 300레벨을 최초로 달성한 것도 다름 아닌 크라우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주인이 바뀌었다.
오랜 시간 독식했던 혜택을 잃게 됐다.
그럼에도 왜일까.
크라우젤은 박탈감보다 도리어 큰 즐거움을 느꼈다.
열정에 불이 붙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히든 퀘스트 ★공작 지원★을 클리어 하였습니다.]
[당신이 도운 공작은 1명입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레벨이 1 올랐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