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22화
“……?”
격식이라는 게 있다.
일국의 왕이 품에서 보자기를 꺼내 펼친다?
리미트 일생에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펄럭-!
절체절명의 순간.
다짜고짜 보자기를 꺼내 든 그리드가 그것을 펼치자.
피시시시식…….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리드와 리미트를 집어삼켰어야 할 빛의 폭발이 보따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적막이 흐른다.
등장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미트, 그리드에게 한 번의 은혜를 갚은 이후 사태를 방관 중이던 비프론즈, 싸움이 길어지자 지루해서 졸고 있던 케를 옹, 노심초사하며 그리드를 지켜보던 그렌할 공작, 그리고 곳곳의 감옥에 숨죽이고 있는 정체불명의 죄수들에 이르기까지.
무저갱의 모든 사람들이 잠시 넋을 잃었다.
전설의 재단사가 남긴 유산의 위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이름 앞에 괜히 신묘하다는 수식언이 붙었겠는가.
<신묘한 보자기>
등급:레전드리
내구력:없음
‘폭발’ 유형의 데미지를 무력화시키는 4차원 보자기입니다.
폭발 지점에 보자기를 펼치면, 폭발 에너지가 모두 보자기 속으로 흡수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진원진기를 소모해서 일으킨 폭발이었다. 온갖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황궁의 성문조차도 날려 버릴 위력을 간직하고 있었어. 그걸 막아 냈다고……?”
눈에 띄게 초췌해진 리미트가 중얼거렸다.
그리드가 들고 있는 천 쪼가리에 시선을 고정시킨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 아티팩트의 정체가 뭐지? 설마 드래곤의 비보라도 되는가?”
“알 거 없고.”
그리드는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쌀쌀맞게 말하며 보자기를 회수했다.
두근, 두근.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그리드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무저갱의 어둠에 가려진 손끝은 덜덜 떨렸다.
그는 지금도 아찔했다.
보자기를 꺼내는 속도가 0.1초만 늦었어도 자신은 죽었을 테니까.
당연히 코크도 죽었을 것이며, 공작들을 구출할 기회 또한 영영 놓쳤을 것이다.
최악을 면한 셈.
‘역시 재주는 하나라도 더 갖고 있는 게 좋구만.’
그리드에게도 의외로 겸손한 부분이 있다.
바로 재능에 대한 부분이다.
재능.
노력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
그리드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기에 천재들을 리스펙트해 왔다.
대표적인 예로 크라우젤이 있다.
그리드는 많은 부분에서 크라우젤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크라우젤의 모든 부분을 존경하고 선망했다.
하지만 단 하나.
‘아이템 스왑 속도’만큼은 자신이 크라우젤보다 더 빠를 거라는 자부심이 그리드에게는 있었다.
자부심을 품는 게 당연했다.
온갖 위기를 템빨로 극복해 온 그는 남들보다 많은 아이템을 활용해 왔으니까.
20억 플레이어 중에서 아이템 스왑 횟수가 가장 많은 사람이 아마 그리드일 것이다. 아이템을 스왑하는 속도 자체가 단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인벤토리 속 아이템을 특정하고 교체, 착용하는 속도는 천하의 크라우젤이라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빠른 것이다.
‘후후훗……. 쩝.’
방금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내가 유일할 터.
크라우젤이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설령 신묘한 보자기를 갖고 있었어도 그것을 꺼내기도 전에 죽었으리라.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끼던 그리드가 문득 현자 타임에 휩싸였다.
몇 안 되는 자랑거리가 아이템 스왑 속도라니…….
너무 수수한 거 아닌가 싶다.
쯧, 혀를 찬 그리드가 리미트에게 다시 검을 겨눴다.
그리드도, 리미트도 알고 있었다.
길었던 싸움도 곧 끝임을.
진원진기를 소모한 탓에 검기의 운용이 어려워진 리미트가 하얗게 질린 입술을 힘들게 벌렸다.
“아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군. 그래, 그대 같은 사람들은 평생 가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
“최고가 돼야 한다는 숙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나는 평생을 노력했으나 재능이 없었다. 피아로라는 천재의 장벽이 만든 그늘 아래 가려졌으니 가문의 수치로 취급받았지.”
“…….”
“임종 직전의 부친께서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나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실망과 원망으로 점철되었던 눈빛.
비수가 되어서 날아온 그것은 여전히 리미트의 가슴에 말뚝처럼 박혀 있다.
“최고가 되고 싶었다. 조국과 황제 폐하를 향한 충정도, 동료와의 우정도 모두 최고가 된 후에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보니 너무 멀리까지 오고 말았다.
단지 가슴에 박힌 비수를 뽑아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충의를 모르는 변절자가 되어 있었고, 인의를 모르는 악한이 되어 있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황비의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하나를 보고 열을 깨우치는 범재가 아닌, 하나를 보고 이치를 꿰뚫는 천재로 태어났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
리미트는 제국에서도 중요도가 매우 높은 인물.
특별한 사연을 지녔을 게 분명하다.
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고 있던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듣다 보니 영 이상했다.
하나를 보고 열을 깨우치는데 범재라고?
듣는 둔재 기분 나쁘다.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궤변일랑 집어치워. 하나를 봐도 하나조차 모르는 멍청이도 동료를 배신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함부로 사람 뒤통수를 후려치진 않는다고.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도 반성은커녕 또 세 명의 공작들을 음해한 당신은 심성 자체가 썩은 거야.”
“……!”
빛을 잃어 가던 리미트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졌다.
깨달은 것이다.
모든 게 핑계였음을.
그래, 나는 뒤틀린 인간이었을 뿐이다.
내가 황실을 기만하면서까지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삶을 빼앗는 데 일조했던 것은 단지 저급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부친께서 내게 보냈던 기대와 실망, 그리고 원망은 내가 범한 죄의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스르릉.
리미트가 허리춤의 칼집에 검을 돌려 넣었다.
빈손이 된 그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라. 내게는 안식을 찾을 자격이 없으니. 그리고 훗날 기회가 된다면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전해 줬으면 좋겠군. 미안했다고.”
힐끔, 리미트의 시선이 그리드가 등지고 있는 감옥 안으로 향했다.
이 사죄는 당신들에게도 향하는 것이다, 라고.
리미트는 공작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무척 놀랐다.
독선과 아집이 느껴졌던 리미트의 눈빛이 스틱세이의 그것처럼 깊고 맑아졌음을 엿본 것이다.
리미트쯤 되는 거물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일 줄이야, 정말 꿈도 못 꿨던 전개다.
어쩌면 리미트도 야탄의 정수에 중독돼 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템빨왕 전하.”
등 뒤에서 그렌할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디 전하께서 끝내 주십시오. 저자가 이곳에서 살아남아 황제 폐하께 처벌을 받게 된다면 저자뿐만 아니라 저자의 가문까지 멸문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
그럼 그 편이 낫지 않겠냐는 반문을, 그리드는 차마 던지지 못했다.
그렌할은 피아로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평생 큰 괴로움에 시달렸던 인물.
비록 리미트와 대립해 왔다지만,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그는 원치 않을 테니까.
그리드는 최대한 태연히 말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소. 내 기사의 원수는 내가 갚아야지.”
마음이 조금 무겁다.
본래 통쾌한 마음으로 리미트의 목을 베어 버렸어야 하는데, 많은 대화가 도리어 독이 됐다.
후우, 심호흡한 그리드가 리미트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검무의 전조였다.
엄숙한 춤사위를 마주한 리미트는 진혼곡의 환청을 들었다.
콰득……! 콰드드드득……!
그리드가 딛고 서는 지면들이 균열을 일으켰다.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초월자의 기운이 대지와 대기를 격동시켰다.
쿠오오오오-!
흔들리는 기류 중 일부가 날카롭게 변하며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연(聯)에 깃든 <브라함식 윈드커터>의 발현이었다.
스파아앗-!
흑금색의 장검이 하얗게 백열하기 시작했으니 극(極)에 깃든 웨폰 인챈트의 전개였고,
찌릿……! 찌리릿!!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살의와 증오가 장내 모든 이들의 살갗을 저리게 만들었으므로 살(殺)의 기세다.
“초연살극(超聯殺極).”
그리드의 다섯 번째 융합 검무.
단일 파괴력만큼은 연살화극(聯殺花極)을 능히 초월하는 궁극기가 리미트를 베어 나갔다.
그것은 리미트가 아닌 ‘검공’에 대한 예의.
적어도 실력만큼은 존경할 만했던 상대에 대한 예우로서, 그리드는 자신의 절기를 세상에 최초로 공개했다.
덕분에.
“…….”
진즉부터 고통에 떨고 있던 리미트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졌으며 평온했다.
쏴아아아아…….
제국 최고의 실력자가 잿빛으로 산화한다.
단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검공을 꺾었다.
“…무슨.”
레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리미트의 강함을 바로 조금 전까지 체험했던 그에게 리미트의 죽음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반면 격양된 코크는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역시 그리드 님…….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
해낼 줄 알았다고?
일개 플레이어가 세계관 최강자를 꺾을 거라고 믿었다고?
레쉬는 솔직히 납득이 안 됐다. 지금이 꿈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다.
[사하란 제국의 공작 ‘검공 리미트’를 해치웠습니다.]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입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오릅니다. 3천의 명성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파티장 ‘그리드’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파티장 ‘그리드’의 <?>이 올랐습니다. 당신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입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별의 검>을 얻었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복수의 첫걸음>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플레이어 최초로 400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여러 번 갱신되는 알림창에 이어서 화룡점정으로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
레쉬는 지금이 현실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지존…….’
그리드를 바라보는 레쉬의 눈빛이 떨린다.
그는 묘한 감동마저 느꼈다.
그리드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풍경일까.
레쉬는 궁금했다.
***
[강적과의 사투 끝에 당신의 격이 올랐습니다. 피부가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입니다.]
[격의 상승 효과로 패시브 스킬 <초월자의 피부>가 생성됩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400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선구자>의 칭호를 빼앗았습니다!]
<선구자>
캐릭터 경험치 획득량 10퍼센트 상승
새로운 장소 발견 시 획득 보상 10퍼센트 상승
<지혜의 탑> 출입 가능
*가장 앞서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입니다. 언제라도 타인에게 빼앗길 수 있음을 유념하십시오.
‘아.’
선구자 칭호의 설명을 본 그리드가 눈치챘다.
이거, 원래 크라우젤 거다.
‘…큼.’
아주 조금 미안하다가도.
‘걔는 오픈 초기부터 쭉 이거 갖고 꿀 빨았던 거네?’
괘씸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알림창은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었다.
[400레벨을 달성하여 주력 능력치들이 4차 각성을 맞이합니다.]
[체력 1당 생명력 수치가 30, 방어력 수치가 1.2로 상향 조정 됩니다.]
[근력 1당 생명력 수치가 9, 공격력 수치가 0.8로 상향 조정 됩니다.]
[지력 1당…….]
…….
…….
[<파그마의 후예>의 히든 피스, <봉인된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합니다.]
[스킬 <광물 창조>의 효과가 변경됩니다.]
<광물 창조>
여러 개의 광물을 혼합하여 새로운 광물을 창조합니다. 혼합 광물 재료로 파브라늄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브라늄 자체가 대마법사의 지식의 정수이므로 이제 혼자서 새로운 광물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광물 창조에 필요한 기간:즉시
광물 창조에 필요한 재료:파브라늄 포함 총 다섯 종류의 광물
광물 창조 가능 횟수:1회
*창조 광물의 중량은 현재 보유 중인 파브라늄의 중량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광물을 창조한 이후, 대마법사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광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개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300레벨을 달성했을 때 그리드가 얻었던 스킬은 <아이템 합체>다.
안 그래도 이번에는 어떤 스킬을 얻을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다.
“하핫…….”
3년? 아니, 햇수로는 4년 만인가?
300레벨 달성 이후 정말 긴 시간이 지나서야 400레벨에 등극한 그리드.
단지 기쁘다는 단어로는 축약할 수 없는, 깊은 감동에 휩싸인 그가 환한 미소를 그릴 때였다.
[<아이템 합체>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검이 분리됐다.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한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속삭여 왔다.
-저놈을 조심해라.
“누구?”
-저 마족 말이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냄새가 나. 씨불, 그건 그렇고 나는 대체 언제까지 극검 그놈이랑…….
이야루그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거스를 수 없는 강제력에 이끌린 그가 회귀했다.
“…뭐지.”
극검이랑 말투까지 닮아 가는 걸 보니 사이가 좋기는 정말 좋은가 보다.
뒷말은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리드가 비프론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석벽에 기대어 있었다.
지옥 제일 마수가 두려워하고, 검귀 이야루그트가 경계하는 존재.
‘일단 나쁜 놈은 아니니까 천천히 지켜보도록 하자.’
당장 신경 써야 할 문제는 비프론즈가 아니라 세 명의 공작들과 케를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죄수들도 궁금했지만 검공의 사망을 감지한 에단이 달려올 수도 있으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 했다.
“비프론즈, 다음에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무사해라. 혹시 모르니까 이 열쇠는 다시 너한테 줄게.”
“안 그래도 난처했는데 고맙군.”
짧은 인사를 나눈 그리드가 공작들과 케를을 챙겨서 무저갱을 탈출했다. 레쉬는 이미 죄수 목록을 확보한 상태이므로 퀘스트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간, 천상궁.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가 오랜 시간 지켜보고 있던 마법의 수정구를 옆으로 치웠다.
“리미트의 방해를 받았군.”
초월자가 되고도 공작 따위에게 고전할 줄은 몰랐다.
“내가 미리 리미트를 처리할 걸 그랬나.”
아니, 아니다.
리미트에게 고전했을 정도이니 히드라를 돌파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수백 년을 기다려 온 순간이다.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랜드마스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백 년 만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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