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21화
두근!
거친 맥박과 뜨거운 피의 역류가 차가운 금속을 타고 전해져온다.
육신을 봉인당한 채 영혼만이 떠돌던 시절의 이야루그트는 이 감각을 탐했다.
생을 멸함으로서 생을 느꼈기에.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했기에.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의 이야루그트는 육신을 되찾아가는 과정에 있었으니.
살생이라는 행위로 안도를 얻었던, 비굴하고도 비참한 시절과는 작별했다.
-피했나.
흑금색의 투명한 검신으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검귀 이야루그트의 음성이었다.
그가 다소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에게 말했다.
-대상의 심장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다. 최선의 기습이었는데 잘 대처한 걸 보니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로고.
“이야루그트, 나는 네가 내 부름에 응해줄 줄 몰랐어.”
<자아 부여>
대상 아이템에게 자아를 부여합니다.
자아를 지닌 아이템은 에고 아이템으로 분류되며,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眞-(신과 대적하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을 마스터하고 있으므로 자아 부여 횟수가 총 10회 가능합니다.
자아 부여 가능 횟수:9/10
자아 부여의 설명은 이처럼 빈약하다.
또한 사용 횟수에 엄격한 제한이 있으므로 그리드는 이를 함부로 실험해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국가대항전이라는 가상의 무대가 그리드에게 기회를 줬다.
마왕토벌전 당시, 마장기에 브라함의 자아를 부여해본 그리드는 총 네 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자아 부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리드와 대상 자아가 서로를 인지하고 있어야한다.
둘째, 대상 자아가 그리드의 부름에 응해야만 자아 부여가 발동한다.
셋째, 대상 자아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부름에 응하는 순간 강제력이 발생, 반드시 대상 아이템에 귀속 된다.
넷째, 자아가 귀속 된 아이템이 파괴될 경우 대상 자아는 본래 있던 자리로 회귀한다.
그렇다.
자아 부여 스킬은 사용자보다 대상 자아의 의지와 권리가 우선시되는 시스템이었다.
대상 자아가 그리드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경우 발동 자체가 안 됐으니까.
그리드는 솔직히 감동이었다.
이야루그트.
그리드에게 충성하기는커녕 호의조차 적은 마족.
그가 과연 내 부름에 응할까 반신반의했는데 바로 부름에 응해줬으니 놀라웠다. 마침 긴박한 위기를 겪고 있던 입장인지라 더욱 기뻤다.
-네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워낙 간절했어야 말이지. 험험.
“....?”
어째 말투가 많이 어색하다.
다소 냉소적인 평소의 말투와 달라 굉장한 이질감이 든다.
“뭐야. 못 본 새 내가 좋아지기라도 한 거야?”
그리드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자 이야루그트가 일갈했다.
-닥치고 두 발 물러나라.
“....!”
그리드가 즉각 반응했다.
높은 집중력이 이야루그트의 외침을 빠르게 뇌에 전달시켰고, 높은 민첩성 스탯은 뇌의 명령을 받음과 동시에 그리드의 몸을 뒤로 두 보 물렸다.
츠칵-!
빛의 입자가 회오리치는 검광이 그리드의 콧등을 스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얼굴이 베였으리라.
“쿨럭, 쿨럭.... 놀랍군.”
급소라는 시스템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Satisfy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급소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소위 약점으로 분류됐다.
똑같은 공격을 당하더라도 피격 지점이 급소냐, 아니냐에 따라서 입는 피해의 격차가 컸다.
“그새 또 성.... 쿨럭! ....장을....! 쿨럭, 쿨럭!”
계속 기침하는 리미트의 입과 코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핏대 가득 선 두 눈은 붉게 충혈 된 채 흔들렸고 두 다리도 후들거렸다.
출혈과 쇠약 등의 물리적인 상태이상이 리미트를 덮친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틈을 줘선 안 된다.
스아아아-
리미트를 마주보는 그리드의 시야에 수백 개의 실선들이 표기 됐다.
대부분의 실선들이 검게 표기되거나 도중에 끊겨있는 반면 2개의 실선은 적색으로 빛나며 끝까지 이어졌다.
이야루그트가 알려주는 ‘최선의 검로’였다.
치링- 치리리리링-
빛의 입자들이 리미트의 전신에 스며들고 있었다.
검기가 리미트의 상처를 회복하는 광경이었다.
철컥!
그리드는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검을 고쳐 쥔 그가 검무를 밟기 시작하자 푸른 꽃잎이 나부꼈다.
“어림.... 없다!”
리미트가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는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에게는.... 이뤄야할 염원이 있으니!”
누구에게나 고충은 있다.
가난한 자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제국에서도 최고라 손꼽히는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리미트에게는 중대한 의무가 있었다.
재능과 실력을 입증하고 신민들의 선망과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해야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의무였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리미트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하늘이 내린 천재 하나가 그의 앞길을 망쳤기 때문이다.
피아로.
그의 재능과 실력은 늘 리미트보다 앞서갔고 신민들의 선망과 황제의 신임은 오직 그에게만 향했다.
가장 밝은 곳에 있었어야할 리미트는 짙은 그늘에 가려지고 말았다.
치욕이며 고통이었다.
리미트의 삶은 상처로 점철됐다.
피아로를 넘어서는 것이 목표임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던 아스모펠과 달리, 그는 감히 피아로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던 범재였기에.
그렇기에 더욱 더 노력하며 검술을 단련시켰다.
두 명의 천재들이 말했던 ‘감’, 혹은 ‘깨달음’에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기술에 숙달하고자 정진해왔다.
“나는.... 피아로를 넘어섰음을 증명해야한다!”
피아로는 살아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던 이유는 젊은 시절 상실했던 자격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된다.
또 다시 천재라는 장벽에 굴복해선 안 된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 피아로와 대결하고 승리함으로서 마음의 족쇄를 끊을 것이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제국 모든 이들에게 천재라고 불려온’ 리미트는 찢어진 심장으로부터 전해져오는 격통을 견디고 검기를 제어했다. 손상 된 육체를 빠르게 회복시켜갔다.
-대단한 놈이다. 집중해라.
“화(花).”
파직-! 파지지직!!
검무를 완성시키는 그리드의 검이 최선의 검로 중 하나를 따라 그렸다.
동시에 휘몰아치는 푸른 꽃잎들은 브라함식 라이트닝을 내포한 채 리미트를 덮쳤다.
그리드는 리미트에게 최대한 많은 표식을 각인시키는 것이 일단의 목표였다.
하지만 리미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화로이 나부끼다가도 벼락처럼 떨어지는 꽃잎들을 검막으로 모조리 분쇄시켰다. 동시에 회피 동작까지 전개했다.
뱀처럼 파고드는 그리드의 검 끝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루그트는 리미트의 회피 방향을 예측하고 있었다.
극검인가 뭔가 하는 그 정신 나간 인간 놈과 함께하는 기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혹사당한 이야루그트는 총 6회의 한계 돌파를 진행한 상태였고 과거의 역량 중 절반 이상을 회복했다.
피아로에게 한 수 접어뒀던 시절의 그가 아니라는 뜻이다.
푸욱-!
“....큭?!”
빠르기만 할뿐, 특별할 것 없이 단순하던 이자의 검술이 도대체 왜 갑자기 신묘해졌단 말인가.
여태껏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아니다.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이자는 전투 도중 갑자기 발전했다.
‘천재....’
리미트가 그리드로부터 피아로를 엿봤다.
어째서 그리드가 피아로를 거뒀고, 피아로는 어째서 그리드를 섬기게 됐는지.
리미트는 모든 내막을 알게 됐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 첫눈에 서로의 재능을 알아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의기투합했던 게로군....’
리미트가 크게 오해하는 순간.
츠카카칵!
그리드의 검이 재차 리미트를 베었다.
[대상에게 14,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폭발합니다!]
[...옵션 효과로 붉은 벼락이 소환됩니다!]
퍼펑-!
콰자자자자작!!
좋다.
운이 따른다.
단 두 번의 공격에 성공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무기의 옵션이 빵빵 터져주고 있다.
‘이길 수 있어.’
이야루그트가 함께해주고 있으니 승산을 점치는 건 자만이 아니다.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아이템 합체가 유지되는 동안 끝낸다.’
꿀꺽, 물약을 복용하며 엘핀스톤의 반지에 귀속 된 ‘흡혈’ 옵션의 쿨타임이 돌아왔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이야루그트는 3개의 최선의 검로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중 하나의 검로를 따라 그린 그리드는 초연화를 전개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리미트의 몸에 새로운 상처와 표식이 늘어간다.
비산하는 붉은 피는 온통 그의 것이었고 그리드의 생명력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흡혈의 힘이다.
츠카카칵-!
서걱!!
리미트가 새로운 상처를 입을 때마다 이야루그트가 알려주는 최선의 검로가 늘어났다.
리미트가 약화됨에 따라서 이야루그트가 더 많은 허점을 엿보게 된 것이다.
이제 리미트는 이야루그트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죽어....!”
그리드가 쌍심지를 켰다.
과거의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깊은 상처를 안긴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또 세 공작들을 위협하는 황비파의 앞잡이.
검공 리미트를 그리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극살(極殺)!!”
푸푸푹-!
끝이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고 비틀거리는 리미트의 주변을 붉은 실선 수백 개가 감쌌다.
어디를 공격해도 리미트를 쓰러뜨릴 수 있노라고 이야루그트가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드가 그대로 기세를 탔다.
처억-!
한 발을 크게 내딛으며 리미트를 몰아붙였다.
연살화극(極殺花落)의 전초였다.
양반조차도 위축되게 만들었던 4융합 검무의 위력은 제국 최강자라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오오오오오-!
폭풍과도 검기를 발출하기 시작한 그리드가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이야루그트가 다급히 외쳤다.
-함정이다!
고수는 곧 죽어도 고수다.
죽을 위기에 빠질수록 한 수를 남겨두게 마련이다.
완전한 빈틈을 드러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시나.
“...큭큭!”
그리드의 검과 직면한 리미트는 웃고 있었다.
치리링....! 치리리리리링!!
리미트를 감싼 채 그를 회복시키고 있던 빛의 입자들이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폭발의 징조였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리미트는 동귀어진을 노리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작에 당할 그리드가 아니었다.
“응, 안 통해.”
펄럭-
웬 보자기가 그리드의 앞으로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