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20화
전투 초반은 의외로 치열했으나 팽팽한 긴장감은 그리드 일행 사이에만 감돌았다.
그리드 일행의 실력을 가늠할수록 리미트는 여유를 되찾아갔다.
콰르르르륵-!
리미트의 검술은 급류와도 같았다.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되 가파르게 바뀌는 지점이 있어 대처하기 힘들었다. 한 눈을 파는 즉시 휩쓸려 죽게 되리라.
“허억.... 허억....”
수십 합의 공방 끝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크와 레쉬는 등딱지에 숨은 거북이마냥 방패 뒤에 숨은 채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리드 본인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는 코크, 레쉬와 달리 검을 휘두르며 리미트에게 맞서고 있었지만 방어에 급급할 뿐이었고 그마저도 완벽하지 못했다. 반격의 기회는 좀처럼 찾지 못했다.
여태껏 보지 못한 검술의 묘리가 그를 철저히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리드는 두 팔과 다리가 꽁꽁 묶인 기분이 들었다. 샌드백 신세가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검 한 자루로 우리 셋을 동시에 제압하다니....’
검공.
검호의 윗 단계.
다만 검성보다는 한 급 아래일 테지만,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아니다.
검성 크라우젤은 아직 미완의 존재인 반면 검공 리미트는 완전체.
현재 시점에서는 검성보다 검공이 상위에 있는 존재였다.
츠카칵-!
“큭....!”
일방적인 생명력 손실이 거듭된다.
또 다시 반격에 실패하고 어깨를 베이는 그리드의 시야에 벽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핏줄기들이 비췄다.
대부분의 피가 그리드 일행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절망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버텼다.
그는 희망을 엿보고 있었다.
2천을 돌파하고 있는 통찰력 스탯에 품은 희망이다.
<통찰력>
대상을 간파합니다. 위험을 예측합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확률이 상승합니다.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은 설명이지만 ‘경험’이라는 힘을 지닌 그리드는 알고 있다.
대상을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통찰력 스탯의 간파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쩌정-!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쩌면 고작 몇 분에 불과할 시간.
하지만 그리드가 체감하기로는 1시간, 2시간보다 더 길었던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다 보니 역시나.
쩌저정!!
보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눈으로 봐도 대처하지 못했던 리미트의 검술에 그리드가 처음으로 ‘노리고’ 반응했다.
운이라는 요소가 일절 개입하지 않은, 오직 뛰어난 눈썰미와 민첩성으로 리미트의 검로를 차단하고 반격을 가한 것이다.
“....?”
리미트가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 신호였다.
전투의 양상이 급변했다.
그리드가 리미트의 검로를 더 많이 간파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반격을 꽂아 넣었다. 덕분에 숨통이 트인 코크와 레쉬가 그리드를 철저히 보조했다.
전투는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았다.
경험과 재능을 겸비한 하이랭커 세 사람은 마치 오랜 동료처럼 훌륭한 호흡을 맞춰 리미트에게 대항했다.
급기야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리미트가 검막을 펼친 뒤 물러났다. 그의 왼쪽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백 개의 변초를 자랑하는 내 검술을 벌써 간파 했다라.... 가히 천재적인 재능이로군. 리갈과 디워스가 당할만했어.”
전투 내내 리미트는 ‘검무’를 의식했다.
그리드의 검무를 필사적으로 차단시킴으로서 검술 실력의 우위를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이제 무의미하게 됐다.
그리드가 자신의 검무에 적응하게 된 지금, 리미트에게는 코크와 레쉬를 억압함과 동시에 그리드의 검무까지 차단할 여력이 없었다.
“하니.”
리미트가 자세를 바꿨다.
칼 손잡이의 중앙을 쥔 채 칼끝을 아래로 늘어뜨렸던 기존과 달리, 칼 손잡이의 가장 안쪽을 쥐고 칼끝을 곧추세웠다.
“그 재능을 경계하여 새로운 검술로 상대해주지.”
“....?”
귀를 의심하는 그리드의 눈에 섬광이 비췄다.
초속의 찌르기였다.
***
[대상에게 24,5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7,8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상이 당신의 공격을 방어했습니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입은 피해량의 절반을 파티원 ‘레쉬’가 대신 받습니다. 총 6,9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파티원 ‘코크’가 대상의 방어 동작을 차단시켰습니다!]
“좋ㅇ.... 흡!”
우당탕!!
[6,3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오, 썩을!!”
벌떡!
벌써 몇 번째 자빠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물 흐르듯 연계되는 검술을 구사하던 리미트가 갑자기 스타일을 바꾸자 그리드는 계속 낭패를 겪었다.
복서의 잽처럼 짧게 끊어 치는 찌르기.
그만큼 빠르게 쏘아지는 리미트의 찌르기는 물리현상 ‘넉백’을 동반했고, 종종 허를 찌르는 하단 베기는 물리현상 ‘넉다운’을 유발시켰다.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검술이다.
밀려나고, 자빠지고.
타격을 허용할 때마다 바닥을 나뒹구는 그리드의 전신은 흙과 피로 범벅이라 거지꼴이 따로 없다.
‘열 받네, 이거.’
버티고 버틴 끝에 검술 스타일에 적응해놨더니, 페이즈 바뀌는 보스마냥 또 스타일을 바꿔?
뭐 이런 까다로운 상대가 다 있단 말인가?
꿀꺽.
동요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그리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약을 복용했다.
그의 현재 생명력은 53,097.
코크와 레쉬의 도움을 받고 <엘핀스톤의 반지>와 <도란의 반지>를 활용하고 있는 덕분에 5만 이상의 생명력은 유지 중이다.
리미트의 공격력과 그리드의 방어력을 고려해봤을 때 최소 즉사를 당할 일은 없다는 뜻.
물론 리미트가 궁극기를 시전하면 어찌 될지 몰라도, 모션이 큰 기술을 사용해주면 이쪽에서야 땡큐다.
그 틈에 이쪽도 검무를 전개하면 되니까.
그래,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이 균형이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까?
스태미나가 가장 큰 문제다.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해서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불리해.’
하지만 속전속결이 불가능한 상태다.
통찰력의 도움을 받아 리미트의 새로운 전투 스타일에 적응하기까진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절망적인 사실은, 다시 버티는데 성공하고 리미트의 검술을 파훼시켜봤자 또 새로운 스타일의 검술을 상대해야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검술들이 놈의 전부일 가능성은 적으니까.’
4융합 검무를 쓸 타이밍을 잡고 싶다.
리미트의 총 생명력이 5,000만이 안 된다는 점을 알게 됐으니, 4융합 검무를 써서 제대로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전황을 역전 시킬 가능성을 엿볼 수....
“....!”
그리드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리미트의 어깨가 움찔, 작게 미동함을 엿본 까닭이었다.
까아아앙-!
생각을 멈춘 그리드가 신속히 검을 세우자, 그 위를 리미트의 검 끝이 찌르며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속도 면에서는 그리드가 리미트를 앞서고 있었으므로 지금처럼 공격을 미리 간파할 수만 있다면 방어 확률이 무척 높았다. 간파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역시.’
그리드는 찌릿, 저려오는 손끝을 느끼며 확신했다.
리미트의 공격력은 발군이다.
찌르기, 베기 형태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삼겹갑>으로 갑옷을 스왑하고 <란스티어의 망토>까지 덧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리미트의 공격력을 결코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크와 레쉬의 도움이 부질없게도 균형은 진즉에 깨졌으리라.
‘역시 답은 템빨인데.’
리미트는 단지 기술만 앞세우는 노련한 검사가 아니다.
초월의 격을 이루지 못한 탓에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속도 면에서는 그리드보다 부족했지만, 그 외 모든 능력치가 그리드보다 우월했다.
그리드가 리미트보다 나은 점은 속도와 템빨 뿐.
그중 속도는 리미트의 검술 실력에 발목을 붙잡혀 이점을 제대로 살릴 수 없는 상태.
결국 남는 건 템빨이다.
이쯤 되자 그리드는 이야루그트가 아쉬워졌다.
‘이야루그트가 있었다면 해볼만 했을 텐데.’
이야루그트라는 무기의 강점은 하나가 아니다.
검귀 이야루그트 소환 효과 외에도 치유 감소, 콤보 위력 극대화, 그리고 또 ‘최선의 검로’를 알 수 있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이야루그트는 팔방미인처럼 많은 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최고의 명검이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야루그트가 알려주는 최선의 검로가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검공 리미트의 검술이 아무리 대단하면 뭐하는가?
검 한 자루로 대악마와 대적했던 이야루그트 앞에서는 애송이일 텐데.
이야루그트는 반드시 리미트의 검술을 파훼시켜줄 것이다.
‘가만.’
그리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아이템 변신> 스킬을 떠올렸다.
파브라늄을 특정 아이템으로 고스란히 변신 시키는 스킬.
대상 아이템의 제작법을 획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긴 했지만, 이미 몇 년이나 이야루그트를 사용했던 그리드가 이야루그트의 제작법을 모를 리 없다.
그리드의 이야루그트 이해도는 이미 오래 전에 100퍼센트를 달성했기에.
‘신을 겨누는 칼날을 이야루그트로 변신시킨 다음 열망의 무아검과 합치면.....’
위력은 위력대로 보장되고 최선의 검로까지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당탕!!
촌각을 다투는 지금,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하다.
해결책을 떠올린 이상 바로 실행한다.
기습적으로 날아온 리미트의 하단 베기에 걸려 넘어진 그리드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이템!!”
“....?”
“변! 신!!”
[파브라늄을 어떤 아이템으로 변신시키시겠습니까?]
알림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수상한 낌새를 읽은 리미트가 더욱 거세게 그리드를 몰아붙였다.
전투 내내 코크와 레쉬를 의식했던 그가 처음으로 두 사람을 무시하고 오직 그리드에게 달려들었다.
푸푹-!
푸푸푸푸푹!!
폭우처럼 쏟아지는 찌르기의 향연.
몸 곳곳이 꿰뚫리는 그리드의 시야가 붉게 점멸한다.
쿨럭, 한 움큼의 피를 토한 그리드가 리미트의 공격을 최대한 회피하며 땡기미를 조작했다.
신을 겨누는 칼날이 손잡이로부터 분리되고 열망의 무아검이 조립된다.
“노에!!”
“니야옹! 무엄할지다!”
<무엄할지다(SSS)>
지옥 제일 마수 멤피스가 우레석의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립니다. 모든 종류의 공격을 원천 차단하는 전격의 방어막을 2초 동안 생성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30분.
*스킬 사용 후 1분 동안 탈진에 걸립니다.
파직-!
파지지지직!!
“....!?”
몸을 大자로 뻗으며 날아오른 노에가 전개한 방어막이 그리드의 전면으로 펼쳐지자 깜짝 놀란 리미트가 급히 허리를 비틀었다.
과연 노련한 인물답게 방어막의 속성을 즉시 간파한 그는 방어막이 길게 유지되지 않을 것이며, 방어막이 끝난 직후가 승부를 결정 지을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궁극기를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제길!”
“우리를 무시하지 마시오!”
코크와 레쉬가 리미트의 캐스팅을 끊어 놓고자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력으로는 리미트의 검막을 빠르게 돌파할 수 없었다.
리미트의 검 끝에 대량의 빛의 입자가 몰려들기 시작했고 노에의 방어막은 빠르게 기운을 잃어갔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이야루그트!!”
그리드는 신을 겨누는 칼날. 즉, 파브라늄을 어떤 아이템으로 변신시킬지 대답하고 있었다.
화르륵-!
파브라늄이 백열하며 형태를 바꾼다.
그 모습, 황금빛의 투명한 장도였다.
그것을 손에 쥔 그리드가 아직 남아있는 신격의 사용 횟수를 소모해서 <아이템 합체>를 전개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과 <이야루그트(변신)>의 합체에 성공합니다!]
화르륵....!
파직....! 파지지지직!!
흑금색의 투명한 검신을 검은 불꽃과 푸른 뇌전이 감싼다.
대자연의 힘이 응축 된 기세다.
“허업....!”
그리드가 새로이 거머쥔 검의 자태에 경악한 드워프 케를이 탄성을 뱉었고,
“지친다냥.... 후냐앙....”
진 빠진 노에가 차디찬 바닥 위로 맥없이 추락했다.
동시에 그리드를 비호하던 전격의 방어막이 걷히자.
“어림없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리미트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수백, 수천 개의 빛의 입자가 은하수처럼 쏟아지며 그리드를 덮쳤다.
그리드는 열망의 무아검과 결합 된 이야루그트가 최선의 검로를 알려주길 바랐으나....
“....?”
이야루그트는 침묵했다.
그리드에게 검로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찰나.
그는 이야루그트가 검로를 알려주는 원리를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이야루그트가 알려주는 최선의 검로는 이야루그트라는 무기가 아닌, 그 무기에 귀속되어 있는 이야루그트의 자아가 알려줬던 것.
아이템 변신 스킬만으로는 이야루그트의 자아까지 구현하지 못한 것이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그리드를 덮친다.
아이템 변신 과정에서 큰 폭으로 줄어들었던 그리드의 생명력이 결국 바닥나고 말았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불사의 발동.
위기의 신호다.
그리드 최후의 패가 소모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리미트의 검술을 완전히 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5초 내로 승부를 보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포기다.
절망과 좌절 속에 고개를 숙이는 그리드.
‘....아니.’
그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위기에 익숙한 그는 위기 속에서야말로 비로소 진가를 발휘했다.
저력이라는 것이다.
콰작-!
리미트의 하단 베기가 작렬한다.
지면에 얼굴을 처박으며 맥없이 쓰러진 그리드의 피투성이 손이 자신의 검 위로 향했다.
“자아... 부여....”
번헨 열도를 정화하고 얻었던 히든 스킬.
거스를 수 없는 강제력이 발동한다.
[검귀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당신의 무기에 스며듭니다.]
푸우욱-!!
“....!?”
리미트가 석상처럼 굳었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그의 심장을 그리드의 검이 꿰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