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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46화 (936/1,794)

템빨 50권 - 19화

사하란 제국은 서대륙의 패권을 거머쥔 국가이다.

대량의 자원과 별처럼 많은 인재를 지녔으니 나날이 기술이 발전하며 강성해진다.

신규 캐릭터를 생성할 때 등장하는 소개문이다.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소속 국가를 제국으로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라의 규모에 걸맞게, 제국은 매 시대마다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검의 극의를 엿본 자는 늘 제국 밖에서 탄생했다.

이른 나이에 검호의 경지에 올랐던 피아로가 제국에서도 특별히 큰 기대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다.

“오랜만이외다. 대략 4년 만이던가.”

검공(劍公) 리미트.

천장으로부터 표표히 강림하는 그의 생김새는 무척 인상 깊었다.

강인한 눈매와 짙은 눈썹은 거칠고 남성적인 반면에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면도가 잘 된 턱은 꼼꼼한 성격을 엿보게 했으니,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리미트의 등장은 그리드의 분노를 차갑게 식혔다.

세 공작의 상태를 보고 이성의 끈을 놓았던 그리드는 어느새 다시 이성의 끈을 단단히 붙잡아 묶었다.

검성 리미트는 너무 큰 거물이었으니 일단 냉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공작 중 최강이라는 레이첼과 동급, 혹은 그 이상.

피아로와 아스모펠 시대에는 두 사람의 그늘에 가려졌던 인물이라지만 지금은 아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은 폐인이 된 채 긴 세월을 허비했던 반면, 처세에 능한 리미트는 황제와 황비의 진영을 오가며 꾸준히 정진해왔으니까.

지금의 그는 제국을 상징할만한 최강자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는 위치에 있었고 그리드는 그 사실을 실시간으로 체감 중이었다.

[투기가 오릅니다.]

[투기가 오릅니다.]

영웅왕의 반응이 심상찮다.

그리드의 몸을 감싸는 적자색 투기가 짙어지는 속도가 역대 최고속이라 평해도 좋을 만큼 빨랐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려온 리미트가 그리드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멈춰 서서 말했다.

“템빨왕 그리드여. 요즘 그대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들려오더군. 타국의 왕인 그대가 어찌하여 제국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이오? 귀국과 본국이 현재 전쟁 중이라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그대의 행동에는 제국에 해악을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으로 보이외만. 일국을 대표하는 자가 어찌 그리 경솔하고 파렴치할 수 있다는 말이오?”

제국인들은 제국 외 모든 국가를 소국이라 칭하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리미트는 달랐다.

그는 템빨국을 소국이 아닌 타국이라 지칭했을 뿐더러 귀국이라는 존칭까지 사용해주었다.

좋아할 일이 아니다.

리미트가 템빨국을 쉽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드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염병. 차라리 무시하고 방심이라도 해주지.’

생명력 회복 물약을 바로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이 욱신거린다.

리미트가 쏜 강기의 집약체에 얻어맞은 그리드가 입었던 피해량은 무려 3만 2천.

그리드가 템빨왕이라 불리기 시작한 이후, 이만큼 큰 데미지를 한 번에 입은 경우는 두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저놈은 진짜야.’

야수화 상태의 모르이즈는 풀버프 상태의 그리드와 비슷하거나 조금 상회하는 무력을 발휘한다.

창성 레이첼의 평시 상태가 야수화 상태의 모르이즈와 최소 동격이다.

그리고 검공 리미트는 레이첼과 최소 동격이다.

다섯 기둥 중에서도 최약체로 분류되며 어수룩한 면이 있는 카일보다 차라리 더 난이도 높은 강적이라고 봄이 옳다.

‘근데 방심도 안 하면 뭐 어쩌라고?’

양반 가람보다도 답 없는 상대가 아닐까?

능력치야 가람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겠지만, 가람에게는 ‘방심한다.’는 속성이 있었으니 빈틈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진지하게 생각하며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리드에게 리미트가 검을 겨눴다.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검신이 서늘한 예기를 발산했다.

최소 전설 등급 이상의 무기로 보였고, 숨겨진 옵션 또한 상당히 많을 듯했다.

그리드는 아쉬움을 느꼈다.

‘파그마의 눈이 이럴 땐 문제가 되네.’

파그마의 눈은 전설적 대장장이의 눈이 진화한 형태이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눈은 단순히 대상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던 반면 파그마의 눈은 대상 아이템의 이해도를 높이고 복제가 가능하다는 기능이 추가됐다.

압도적으로 좋아진 셈.

그로 인해 발생한 반동이 1시간으로 늘어난 재사용 대기 시간이다.

‘빌어먹을 쿨타임 때문에 함부로 쓸 수도 없고.’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한다.

플레이어나 NPC처럼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 대상의 아이템 정보를 사전에 확인한다는 것은 승률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정작 예전에는 제대로 활용 못 했었지만.’

게임의 고수가 되어가는 그리드이다.

이제는 사전 정보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느끼는 아쉬움이 더 컸다.

아주 찰나.

그리드의 이와 같은 생각들은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딱 1초 감소되는 동안 이어진 것이었다.

빠르게 사고하며, 그리드는 리미트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단언컨대 제국에 해악을 끼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소. 나는 그저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을 뿐이고 도중 우연히 공작들이 불공평한 처사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그들을 도우러 온 거요.”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천공왕 리갈과 취공 디워스를 시해하고 수만의 제국 병사들을 학살한 것이오?”

“그건 부득이한 정당방위였소. 내 영토를 침략하고 내 백성들을 해친 자들을 어찌 간과한단 말이오?”

“저들 세 공작이 이곳에 갇힌 것 또한 정당한 처벌이외다. 저들에게는 적국의 왕인 그대와 결탁했다는 정황이 있었으니 조국을 배반했다고 볼 수 있지. 저들이 저 사달이 난 것은 다름 아닌 그대의 탓이라는 말이오. 한데 그대는 또 이곳에 나타나 저들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구려.”

“내가 저들과 결탁한 것은 본국과 제국의 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를 되찾을 의도였지 제국에 해악을 끼칠 의도는 전혀 없....!”

“우리가 그 말을 어찌 믿소? 애초에 의도가 어찌됐든 적국의 왕인 그대와 결탁했다는 것 자체가 중죄요.”

리미트의 주장은 합당했다.

물론, 숨겨진 비밀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X발....!”

그리드의 인내심이 빠르게 바닥났다.

이대로 대화해봤자 진전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반사적으로 욕설을 뱉은 뒤 고함쳤다.

“개소리 작작하고 솔직하게 말해, 이 씨X놈아! 피아로의 반역죄가 사실은 누명이었음을 알게 된 공작들이 황제에게 진실을 알릴까봐 두려워 그들을 가둔 거잖아, 이 개X끼야!!”

“.....”

“너지? 너와 4황자 에단이 저들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든 거지!?”

두려움에 붙잡았던 이성의 끈을 다시 놓치는 그리드였으나 리미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듣는 상소리에도 불구하고 예의 무표정을 유지했다.

“저급하군. 속내야 어찌됐든, 사람은 위에 오를수록 언행을 조심해야하는 법이며 그게 바로 품격이외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일말의 품격조차 없군. 태생은 속일 수 없는 겐가.”

“품격은 개뿔! 저들을 꼭 저렇게까지 만들어야했냐고!!”

“그대에게는 알 권리가 없소만.”

“익....!”

후로이를 데려왔어야 했다.

그래야 저놈이 얼굴에 깐 철판을 주둥이로 처참히 때려 뭉갰을 것이다.

진심으로 큰 아쉬움을 느낀 그리드가 기사 소환을 떠올렸다.

‘되나?’

절체절명의 위기.

굳이 혼자서 극복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힘을 빌리자.

“기사 소환!”

그리드가 즉시 스킬을 전개했다.

하지만 역시나.

[퀘스트가 진행 되는 동안 입장 인원에 제한이 생긴 장소입니다.]

[기사 소환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거부를 당했다.

이미 예상했던 사태다.

“피아로라도 부르려고 한 게요? 못 불러서 아쉽게 됐군. 그를 꺾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지.”

리미트가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세 공작의 가신들이 황도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 된 상태요. 그들이 상황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내가 신경 써서 처리할 일이 아주 많소.”

바쁜 몸이다 이거다.

“그대에게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군.”

치리리링-

리미트의 검에 별무리와 같이 밝은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하란 공작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형벌을 내리겠소. 우선 제국의 귀족과 군대를 학살한 죄를 물을 것이고.”

서걱-!

그리드와 리미트의 거리는 현재 5미터가량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리미트는 굳이 거리를 좁히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고, 어둠을 양단한 순백의 검광은 그리드에게 도달했다.

‘스킬 맞지?’

공격 모션은 무척 짧지만 빛의 입자라는 형태로 검기가 드러난 공격이다.

평타일 리 없다.

스킬의 이펙트 자체는 별로 화려하지 않지만 상당히 강력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노에, 섣불리 나서기보다 대기하고 있다가 확실한 틈이 보일 때만 보조해줘.”

빠르게 판단한 그리드는 리미트의 공격을 굳이 맞받아치기보다 회피를 선택했다. 옆으로 두 걸음 빠르게 이동하자 그가 등지고 있던 쇠창살에 리미트의 검광이 내리꽂혔다.

꽈아아앙-!

“....!”

폭음이 귓전에 울리는 순간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바로 머리 위에 리미트가 다가와 있었다.

“감히 제국의 귀족들을 회유하여 제국의 전복을 노린 죄를 물을 것이며.”

빠악!!

강철 부츠를 착용 중인 리미트의 발이 그리드의 관자놀이를 공 차듯 걷어찼다.

최초의 왕 효과로 왕관과 투구를 함께 착용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투구 째로 머리가 박살나지는 않았을까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6,7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국 영내에 불법으로 침입한 죄와.”

츠칵-! 츠카카카칵!!

물리적인 상태이상.

뇌가 흔들려서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 그리드의 몸을 빛의 입자가 난도질한다.

리미트의 공격 속도는 초당 6회의 검로를 그리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검로 하나하나에 깊은 묘리가 담겨있고 복잡해서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대역죄인 피아로를 비호한 죄를 물어.”

푸우욱-!!

그리드의 전신을 베어나가던 리미트의 검이 그리드의 심장에 박히고 나서야 멈춘다.

“사형이요.”

꿀렁....!

그리드의 가슴이 붉은 피로 젖었다.

꿰뚫린 발할라의 틈새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이 강물처럼 범람했다.

축 늘어지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리드의 몸을, 리미트가 슬쩍 옆으로 피함과 동시였다.

“어이, 고작 이 정도로 내가 죽을 것 같아?”

속수무책으로 당한 끝에 쓰러지는가 싶던 그리드가 간신히 자리에 버티고 서더니 반격했다.

솟구치는 황금빛의 검날은 리미트의 공격속도를 초월하는 쾌속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쩌정-!

기술의 차이가 속도의 차이를 메웠다.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어 공격을 막은 리미트의 고요한 두 눈과 그리드의 붉게 충혈 된 두 눈이 서로를 노려봤다.

피투성이가 된 그리드의 주변에는 주황빛 보호막의 잔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초의 왕 칭호 효과가 발생시킨 보호막이었다.

“네가 칼부림 좀 추면 상대가 누구라도 휙휙 뒤져나갈 줄 알았어? 양학만 해왔나 보지?”

“.....”

리미트의 높은 통찰력이 그리드의 손을 시야에 담았다.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반지 하나가 착용 된 상태였다.

붉고 투명한 그것은 강력한 흡혈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처억-!

리미트와 검이 맞물린 상태로, 그리드가 한 걸음 크게 내딛었다.

분노와 증오가 집약 된 검무의 첫 보폭이다.

까앙-!

리미트의 검을 밀쳐내면서, 그리드는 다시 반 보 전진했다.

치리리리링-

리미트가 다시 회수하고 수평으로 눕힌 검에 빛의 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고오오오오오-

리미트를 겨냥하는 그리드의 검 끝에는 지독한 살의가 깃들었다.

“살(殺)!”

“별 베기.”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두 자루의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순간에도 리미트의 표정은 담담했다.

자신의 검술이 그리드의 검술을 월등히 초월하고 있었으므로 기술의 다툼에서 질 리 없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오만도, 방심도 아니다.

몇 번의 합을 나눈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고 이는 통찰이라 한다.

다만 리미트가 간과한 부분은.

“....!?”

최소한 <그리드의 검무>만큼은 그리드 개인의 기술이 아니라는 점.

무려 두 명의 전설의 기술과 지식이 담긴 정수가 바로 그리드의 검무였다.

콰자작-!

힘의 충돌의 여파로 그리드와 리미트 두 사람의 몸이 튕겨나간다.

그리드는 바로 뒤에 등지고 있던 감옥 쇠창살까지 밀려났다가 멈춰 섰고, 리미트는 수천 미터의 둘레를 지닌 공동의 중앙 부분까지 날아간 후에야 간신히 멈춰 섰다.

주륵....

입에서 피를 흘린 리미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여태껏 평온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던 그의 얼굴에 당황과 곤욕이 떠올랐다.

통쾌함을 느낀 그리드가 손을 까닥였다.

“들어와. 덤벼.”

“....꽈득!”

이를 악 문 리미트가 그대로 허공을 돌파했다.

그리드와의 거리를 다시 좁힌 뒤 검으로 호선을 그렸다.

그의 후방을 코크와 레쉬가 기습했고 그리드는 이미 새로운 검무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퍼펑-!

콰콰콰콰콰쾅!!

네 사람의 치열한 격전이 공동을 뒤흔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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