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17화
‘일단 저 양반은 무시하자.’
긴 세월 동안 옥살이한 탓인지, 드워프 케를 옹의 상태는 영 좋지가 않았다. 오락가락 하는 태도를 보니 치매가 의심 될 지경이다. 당장 그와의 대화에 집중했다가는 드워프라는 종족에게 품고 있던 환상마저 무너질 것 같았다.
신을 겨누는 검.
내생 최고의 걸작을 놓고 한 손가락도 아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명검이라 표현한 케를의 발언에 큰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리드는 애써 그를 외면했다.
그리고 철판 위에 위태로이 서있는 코크에게 신발 한 켤레를 건네주었다.
플라이 마법이 귀속 된 브라함의 부츠였다.
“이거 신어.”
“이, 이건....!”
브라함의 부츠는 그리드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템이다.
그리드가 무쌍을 찍을 때마다 브라함의 부츠는 늘 함께였다.
그것을 내게 빌려준다고...?
‘저를 그만큼이나 신뢰해주시는 겁니까....’
코크의 눈동자가 떨린다.
그를 똑바로 마주본 그리드가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죽었다가 그 신발 날리면 평생 잔소리 들을 줄 알아.”
“....네! 반드시 살아남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코크는 눈치껏 행동했다.
즉시 신발을 착용해 플라이를 전개한 뒤, 레쉬를 품에 안고 발 디딜 틈을 찾아 무사히 착지했다.
“제가 그리드 님을 보좌하겠습니다. 레쉬 님께서는 죄수 목록을 확보하고 공작들을 찾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공간의 특성 상, 비프론즈와 싸우려면 ‘하늘을 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섣불리 싸움에 낄 수 없었던 레쉬는 감옥 탐색에 착수했고 코크는 전투태세를 갖췄다.
“흐음....? 설마 너, 내 동족이야?”
짙은 어둠에 잠식 된 허공.
비프론즈는 그리드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다소 놀랐다.
‘유의미한 대화가 가능한 상대인가?’
비프론즈는 무저갱을 ‘틈새’라고 칭했으며 자신이 틈새에서 태어났다고 밝혔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눈치였고 어린 아이 같은 말투에서는 순수함마저 느껴졌다.
그리드는 비프론즈의 질문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대화의 가능성을 엿보고 역으로 질문했다.
“내가 왜 너의 동족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우리들의 냄새가 비슷해.”
‘악마력 때문인가?’
악마력은 마기로 치환 된다.
그리드가 흑화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다.
신중하게 고민해본 그리드가 다시 질문했다.
“우리가 동족이라고 하면, 너는 내게 협조해줄 의향이 있는 건가?”
현재 비프론즈는 몬스터가 아닌 NPC 판정을 받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지옥에서 만났던 마족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스템은 일부 마족을 수인족, 엘프족, 드워프 등의 다른 이종족과 똑같이 NPC로 분류했다.
무조건 몬스터로 분류되는 대악마나 마물과는 많이 다른 취급이다.
“응? 아니? 나는 인간에게 협조해.”
“난 인간이다.”
케를도 놀랄 만큼 빠른 태세 전환!
그리드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자 비프론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지만 침입자잖아. 넌 제물도 안 가져왔으니까 인간이라도 적이야.”
“사실 네 동족이다.”
“그럼 적이야. 나는 내 동족이랑 싸워보고 싶었어.”
“.....”
역시, 대상이 몬스터인가 NPC인가는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Satisfy에서 이야기란, 이미 준비 된 설정대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한숨 쉰 그리드는 결국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하지만 조금 더 대화를 시도해봤다.
그는 비프론즈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사후 지상과 지옥의 사이에 봉인 된 우리 일곱....
제7악 타락의 말이었고,
“무저갱의 밑바닥이 즉 인계의 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옥과 맞닿는 장소로서 마기가 들끓는다고 하죠.”
레쉬의 말이었다.
이때까지 그리드는 눈치 채지 못했었다.
워낙 둔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비프론즈가 무저갱을 틈새라고 부른 순간, 그리드는 뒤늦게 눈치 챘다.
이곳은 칠악성의 봉인처일 가능성이 높다.
“너는 이곳을 틈새라고 불렀지. 지상과 지옥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를 뜻하는 게 맞나? 너는 왜 이곳에서 태어난 거지? 너 말고도 이곳에서 태어난 마족이 많은 거냐? 제국과는 언제부터 교류해왔던 거고? 너는.... 칠악성에 대해서 알고 있나?”
“몰라. 하나도 모르겠어. 나는 그저 이곳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양식을 주는 인간에게 협력했을 뿐이야.”
비프론즈는 비교적 친절한 성격이었다.
가능한 질문에 대답해주고 싶다는 의욕 정도는 보였다.
다만, 아는 게 없다는 게 문제다.
‘쯧.’
그리드가 혀를 차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수집해온 칠악성의 정보와 무저갱의 정보가 맞물립니다!]
그리드의 의문에 시스템이 반응했다.
그리드가 무저갱과 칠악성을 함께 언급한 것을 계기로 알림창이 마구잡이로 갱신됐다.
[제7악, ‘타락’은 자신들이 지옥과 지상 사이에 봉인되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수수께끼의 마족 ‘비프론즈’는 무저갱이 지옥과 지상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임을 간접적으로 밝혔습니다.]
[칠악성의 봉인처와 무저갱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히든 연계 퀘스트 ★해답에 도달하는 장소(1)★가 진행됩니다!]
<해답에 도달하는 장소(1)>
★히든 연계 퀘스트★
수수께끼의 마족 비프론즈를 쓰러뜨리고 ‘열쇠’를 얻어 무저갱의 심처까지 이동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비프론즈 포박.
퀘스트 실패 조건:비프론즈와의 전투에서 패배. 혹은 비프론즈의 사망.
퀘스트 클리어 보상:해답에 도달하는 장소(2) 퀘스트로 연계.
“....!”
찌릿! 찌릿!
깜짝 놀라는 그리드의 피부 위로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스쳐 지났다.
그것은 쾌감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베리드 레이드 이후.
그리드는 게임에서 추구할 수 있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빼앗긴 상태였다.
필요 경험치의 급상승 탓에 레벨 업의 재미를 느낄 수 없었고, 레이드 아닌 일반 사냥에서 득템 못하는 거야 운 없는 그리드 입장에서 뻔한 일상이었으며, 제국과의 관계 개선이 수포로 돌아간 후 어떤 스토리 진행도 없었으니 하루하루가 무료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나마 ‘내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게 맞긴 맞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가끔가다 국왕 퀘스트를 진행할 때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한동안 접근할 수 없던 메인 스토리에 한달음 가까워진 것이다.
그리드는 비로소 즐거워졌고 의욕이 들끓었다.
‘그동안 칠악성 스토리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이유는 관련 스토리가 제국 심부에 숨어있었기 때문이군.’
제국과 적대 중인 내 입장에서는 접근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단서조차 찾지 못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기뻐 몸서리치는 그리드에게.
“빨리 싸우자. 침입자는 죽여야 돼. 안 그러면 밥을 못 먹을 수도 있어.”
비프론즈가 쾌속으로 접근,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왔다.
베리드의 힘의 지속 시간은 끝난 상태.
더 이상 자동 연성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그리드는 비프론즈의 기습에 완전히 노출됐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수했다.
자신의 높은 민첩성과 격, 그리고 알렉스의 신속 장갑을 믿고 검 한 자루로 비프론즈에게 맞섰다.
까강-!
“....!?”
까가가강-!!
“큭....!”
1초 동안의 공방.
비프론즈가 11회 휘두른 공격 중 9회는 간신히 방어했지만 나머지 2회에는 반응하지 못한 그리드가 피를 토하며 뒷걸음쳤다.
[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6,1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 이렇게 세?’
초당 11회의 공격 속도에다가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를 꿰뚫는 공격력이라니?
짐짓 당황한 그리드가 반사적으로 <흑화>를 발동시키려다가 말고 <섬화>를 전개했다.
마족이며 어둠에 익숙한 비프론즈에게 빛의 정령의 빛은 더욱 더 치명적으로 작용할 거라는 계산이 그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비프론즈는 빛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잠시 시야를 상실하고 실명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뿐. 태양을 본 뱀파이어처럼 괴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놈이 실명에 걸린 동안 5회의 평타를 꽂아 넣고 거리를 벌린 그리드가 표정을 굳혔다.
‘이 자식 뭐지?’
신을 겨누는 검으로 5회나 공격했는데 총 3만의 데미지밖에 안 들어갔다.
신을 겨누는 검이 신성 속성 공격력을 20퍼센트 추가하고 보스 몬스터, 네임드 NPC에게 50퍼센트의 추가 데미지를 입힌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비프론즈의 방어력은 수위에 꼽을 정도로 높은 것이었다.
비프론즈는 신성 공격에 취약한 마족인데다가 이름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네임드 NPC였으니까.
“역시 인간은 강하네....”
힐끔 보니, 비프론즈는 자신의 가슴에 생긴 상흔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중이었다.
분노하기보다 흥미롭다는 눈치였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약한 인간을 본적이 없어. 인간이야말로 세계를 지배할 거라는 그자의 주장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아.”
무저갱의 특성 상, 방문자나 수감자 모두 한 가닥 하는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니 비프론즈의 편견은 이해 못할 수준이 아니었다.
한데 ‘그자’란 누굴까?
“그자? 황자들이나 황제를 말하는 건가?”
“으응? 아니, 아니. 그 왜. 안 죽는 사람 있잖아.”
“....?”
안 죽는 사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랜드 마스터?”
“뭐라고 불리는지는 몰라. 늘 혼자 왔었으니까.”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 짓고 다니는 놈 말하는 거 맞지?”
“응, 맞아. 걔 이름이 그랜드 마스터였어?”
“....미친.”
그리드는 깨달았다.
이곳 무저갱에 숨겨진 비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반드시 공략해야하는 장소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비프론즈를 꼭 포박해야했다.
“흑화,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그리드가 버프를 전개했다.
그가 측정하는 비프론즈의 강함은 칠공작. 아니, 오공작 중 상위 실력자와 최소 동급.
“신격. 아이템 합체.”
전력을 다함이 옳았다.
스파앗-!
신을 겨누는 검 위로 열망의 무아지경의 칼날이 덧씌워진다.
퍼펑-!
퍼퍼퍼퍼펑!!
격전이 시작됐다.
무기 없이 본능대로 싸우는 비프론즈는 무투가에 가까웠고 공격 모션이 무척 작았다. 빠르고 변칙적인 패턴의 공격들이 연계되면서 비프론즈의 강력한 공격력을 극대화시켰다.
꽈광-!
꽈과과과과광!!
아이템 합체로 신화급 초월 무기를 거머쥔 그리드의 공격력은 어떤 과정을 서술할 필요도 없이 그냥 강했다.
“연(聯)!”
“집어삼키는 장막!”
콰콰콰콰콰쾅!!
연달아 발생하는 폭음이 공동을 무너뜨릴 기세로 뒤흔들었다.
결계 계열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한 비프론즈는 치명상만큼은 피했고 그리드의 부담감은 점차 커졌다.
흑화를 사용한 대가로 생명력의 절반을 소모한 그리드 입장에서는 비프론즈의 공격력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결계까지 쓸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갑옷을 합체할 걸!’
결국, 1대1로는 불사의 소모까지 감수해야한다는 판단을 내린 그리드가 노에를 소환했다. 랜디, 티라멧, 템빨골들에게는 완전한 비행 능력이 없었으므로 소환하지 못했다.
“냥핫핫! 야생의 지옥 제일 마수 노에님이 출몰하신 것이다냐....옹?”
만세 자세로 등장한 노에.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비프론즈에게 달려들던 녀석이 움찔, 놀라며 물러섰다.
“무, 무섭다옹.”
“....?”
무서워?
여태껏 노에가 두려워한 대상은 드래곤과 대악마밖에 없었다.
근데 비프론즈를 두려워한다고?
그리드는 당황하면서도 검무를 전개했다.
비프론즈가 노에에게 한 눈 판 찰나를 놓치지 않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초연화(超聯花)...!”
비프론즈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몬스터가 아닌 NPC로 분류되는 바.
녀석의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4융합 검무에 적중당할 시 죽을 우려가 있었다.
하여 그리드는 3융합 검무를 사용한 것이지만 굉장히 오만한 판단이었다.
쩌저저저정-!!
강철보다 단단한 비프론즈의 발톱이 초연화의 검로 중 하나를 파훼한다.
덥썩!
무너진 검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비프론즈의 손이 그리드의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그 과정에서 초연화의 검기에 노출 된 놈의 팔과 가슴은 완전히 걸레짝이 됐지만 인간의 가녀린 목을 꺾을 힘 정도는 남아있었다.
그리드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대로 목이 꺾여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
그리드의 목은 꺾이지 않았다.
비프론즈의 무력이 오공작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해도 단순히 목을 비트는 행위만으로는 그리드의 방어력을 관통할 수 없었다.
“이것도.... 켁! 막아 보던....가!”
콰아아아아앙!!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발동하는 즉발 공격 스킬.
<꺾을 수 없는 정의>가 폭발하며 비프론즈의 신형을 무너뜨렸다.
Lv.8의 꺾을 수 없는 정의는 물리 공격력의 90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혔으니 아이템 합체와 버프 상태의 그리드가 발동하는 꺾을 수 없는 정의의 위력은 비프론즈도 좌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초연화를 돌파하는 과정에 너무 큰 피해를 입었다.
[대상에게 159,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큭....!”
그리드를 손에서 놓친 비프론즈가 이를 악 물고 주먹을 휘둘러 반격했으나.
“신뢰의 도약!”
레전드리 등급의 방패 <수호의 거성>에 귀속 된 스킬을 전개한 코크가 그리드와 비프론즈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스킬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한 광역 데미지가 비프론즈를 덮쳤고 그리드의 방어력은 급상승한다.
그리드는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승화 된 검무를 추며 전진, 비프론즈의 가슴에 살(殺)을 꽂아 박았다.
“쿨럭....!”
치명상을 입고 눈을 뒤집는 비프론즈의 이마 위로 정체불명의 문자가 잠시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그리드와 코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어느새 은사를 꺼낸 그리드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비프론즈의 몸을 포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