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16화
“허....”
“무슨....”
“말도 안 돼....”
그리드와 파티 플레이 2시간 째.
무저갱의 탐사가 진행될수록 레쉬는 감탄하고, 경악하고, 전율했다.
슈슉-!
츠카카카카칵!!
플레이어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스탯을 아무리 올려도, 버프 물약이나 마법을 몇 번이나 중첩 적용 받아도 극복할 수 없는 시스템적인 한계.
대표적인 예가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였다.
스킬이나 마법으로 구현되는 공격이나 이동기가 아닌 이상에야, 플레이어의 일반 공격은 ‘초당 6회’가 한계였고 일반 이동은 ‘초당 18미터’가 한계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레쉬는 허무와 좌절을 느꼈다.
자신이 계속 노력하고 성장한 끝에 큰 성과를 이룰지라도, 종국에는 한계에 발목을 붙잡힐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인 이상 자신은 평생 선임기사가 되지 못할 거라는 그런 좌절감이 레쉬의 열정을 다소 꺾어놨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콰자자자작!!
키에에엑!
그리드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한계?
극복할 수 있음을.
그리드는 매 초마다 9회씩의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스킬을 사용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제아무리 지존이라도 자원이라는 개념의 제약을 피하진 못할 테니까.
“초월자....”
한계를 초월한 그리드의 모습은, 레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내렸던 좌절감과 허탈감을 뿌리 채 뽑아냈다.
레쉬는 희망을 느꼈다.
아직 마주하지 못한 한계에 벌써부터 절망하고 위축 될 필요가 없음을 그는 깨달았다.
“하...! 하하하핫!!”
눈앞의 안개가 사라진 기분이다.
막연한 걱정을 벗어던지고 기쁨에 몸서리친 레쉬가 크게 웃으며 간수들을 베어나갔다.
무저갱에 울려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그리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뭐지? 파티장 습득 아니었나?’
갑자기 혼자서 좋다고 웃다니?
나 몰래 혼자서 득템이라도 한 건 아닐까?
의심에 휩싸인 그리드가 파티 상태를 점검했다.
파티명:무저갱 탐사
파티장:그리드
파티원:코크, 레쉬
아이템 습득 방식:파티장 습득
‘휴.’
아이템 습득 방식은 정상이다.
나 몰래 레쉬 혼자서 득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왜 혼자 갑자기 웃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앞의 간수를 베어 넘기는 그리드에게 코크가 속삭여왔다.
“스킬 숙련도가 오르는 걸 보니 기쁜가 봅니다.”
“....아.”
무저갱 초입.
출몰하는 간수들의 레벨은 380에 불과했고 399레벨인 그리드의 캐릭터 경험치와 스킬 경험치는 미동도 안 하는 상태다.
하지만 코크와 레쉬는 경우가 달랐다.
아직 360레벨대에 불과한 그들에게 380레벨 몬스터는 썩 괜찮은 사냥감.
파티장 그리드와의 레벨 차이 때문에 캐릭터 경험치는 습득 못한다고 하나, 스킬 경험치는 가파르게 수직 상승 중이었다.
“잘 됐네.”
이게 바로 자원봉사자의 심정이 아닐까?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 그리드는 사람들이 왜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끔씩은 타인에게 봉사하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가 로그아웃하면 수재민들한테 성금이라도 보내볼까....’
어마어마한 변화.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건 호구다, 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왔던 그리드가 변해가고 있었다.
계기는 이름조차 모르는 카페 종업원과의 대화였다.
그날의 대화 덕분에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그리드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감사를 느꼈고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심적 변화를 겪게 됐다.
이는 결국 그리드 본인에게 이롭게 돌아오는 변화가 될 것이다.
번쩍! 번쩍!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며 시야를 밝혀주던 빛의 정령이 갑자기 더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주위가 더 어두워졌다는 뜻이었다.
“엄청 좁아지는군.”
어딘가에 갇혀있을 공작들을 찾아서 계속, 계속 전진하던 그리드 일행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은 아주 좁은 동굴과 마주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입구.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칼은커녕 주먹 휘두르기도 벅찰 만큼 좁은 길이네요.”
뻔한 위험이 예견되는 길이다.
이곳을 이용해서 이동하다가 몬스터라도 만났다가는 반격도 못하고 얻어맞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탐사 난이도 급격히 상승할 거라고 직감한 레쉬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방패를 세우고 전진하면 몬스터의 공격을 견디면서 출구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동굴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요? 생각보다 길어서 공격을 몇 분 이상 계속 허용하게 되면 당신, 죽을 겁니다.”
“물약은 넉넉합니다. 간수들의 공격력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요.”
“간수들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출현하면?”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어차피 그 외에는 방법이 없....”
“방법이야 많은데요.”
스파앗-
대화 도중 그리드가 갑자기 허공으로 손을 뻗자 그의 손에 지팡이가 쥐어졌다.
한 눈에 봐도 마법사들이나 쓸법한 커다란 지팡이였다.
이어서 신을 겨누는 칼날을 손잡이로부터 분리, 자신의 주변을 공전하게끔 만든 그리드가 말했다.
“자, 갑시다.”
그리드는 레쉬에게 더 이상의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그를 재치고 앞으로 나서더니 먼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깨가 계속 벽면에 긁힐 정도로 비좁은 길을 5분쯤 걸었을까?
이 답답한 길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건지.
일행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할 무렵.
“스톱.”
걸음을 멈춘 그리드가 코크와 레쉬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다.
“헉....!”
그리드의 어깨 너머를 엿본 레쉬가 헛숨을 들이켰다.
앞길을 막아서며 나타난 새로운 몬스터의 기세가 심상찮은 까닭이었다.
<오염 된 꼽추 간수장>
비쩍 마른 몸에 ‘ㄱ’자로 굽어진 허리.
양팔에 크로우를 착용하고 있는 간수장의 체격은 무척 왜소했다.
하지만 왜소한 체격은 도리어 강점이었다.
이 좁은 동굴에서도 제약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심지어 정예 몹.’
불안하다 싶더니 곧바로 위기다.
이대로는 그리드가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생각한 레쉬가 안절부절 못했지만 그리드는 침착했다. 지팡이로 간수장을 조준한 그가 마법을 발사했다.
“매직 미사일.”
퍼엉-!
‘아! 이래서!’
레쉬의 굳었던 얼굴이 환하게 펴졌지만 잠시 뿐이다.
매직 미사일은 기초 마법에 불과했고 간수장의 생명력 게이지는 변화가 없었으니까.
정예 몬스터답게 큰 생명력을 지닌 간수장을 고작 매직 미사일로 사냥한다는 건 불가능....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 알람.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
“....???”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압도적인 물량공세.
그리드는 기초 마법의 짧은 쿨타임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쉬지 않고 매직 미사일을 발사하는 한편 알람의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알람까지 섞어 사용했고 거기에 또 매직 미사일을 저장시켰다.
키야아아아아!!
계속 얻어맞고 뒤로 한참을 밀려났던 간수장이 이를 악 물고 돌진했다.
놈은 더 이상 매직 미사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얻어맞다가 죽느니 침입자에게 크로우 한 번 휘둘러 보고 죽겠노라 각오했다.
놈과 그리드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피식.
무료함이 깃든 눈빛으로 간수장을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어서.
퍼퍼퍼퍼퍼퍼퍼퍼펑!
동굴의 천장 부분에서부터 매직 미사일 수십 개가 직각으로 쏟아져 내렸다.
마침 그리드의 코앞까지 도달했던 간수장의 허리는 물리력을 견디지 못해 더욱 더 앞으로 굽었고, 간수장의 흉측한 얼굴은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움찔, 움찔 몸을 떠는 녀석의 뒤통수를 그리드의 발이 지르밟았다.
“난이도 높은 곳이 맞긴 하네.”
체감을 못하겠어서가 문제지.
코크와 레쉬를 의식해 뒷말을 삼킨 그리드가 눈짓하자.
푸욱-!
신을 겨누는 칼날이 간수장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잿빛으로 산화하면서 정보가 공개 된 간수장의 레벨은 392.
무저갱의 지도가 아직도 3퍼센트밖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무저갱의 난이도는 분명히 높은 게 맞았다.
초입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이 380, 390대였으며 지형적으로도 불편한 요소가 많았으니 신의 유적지와 비견할만 했다.
단 3명이서 무저갱을 탐사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퍼펑-! 퍼퍼퍼퍼퍼펑!!
좁은 동굴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그리드는 총 4명의 간수장을 만났고 신을 겨누는 칼날과 함께 놈들을 모조리 물리쳤다.
도중에 마나가 부족해지자 템빨콘을 소환해서 쉬어가기도 했다.
그 끝에.
“장관이군....”
일행은 동굴을 벗어날 수 있었고 거대한 원형의 공동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이 존재하는 공동이었다.
원형의 벽면에는 수천 개의 감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중 몇 개 감옥의 안쪽으로 거뭇거뭇한 인영들이 보였다.
“잡혀있는 죄수가 의외로 많은데? 수십 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오래 전에 붙잡혔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웅웅.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툭─
제법 큼직한 바위를 집어 벼랑 아래로 던져봤지만, 그 어떤 소리도 없다.
“규모가 엄청나군.....”
“2시간 넘도록 3퍼센트밖에 안 밝혀졌던 지도가 이곳에 진입하자마자 16퍼센트까지 밝혀졌을 정도니까요.”
“이곳 어딘가에 죄수 목록이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무저갱 탐사 퀘스트의 첫 번째 클리어 조건은 지도를 15퍼센트 이상 밝히는 것이고 두 번째 클리어 조건은 죄수 목록을 확보하는 것이다.
일행의 탐사는 여기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의 목표는 퀘스트 클리어뿐만이 아니라 공작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이곳 어딘가에 공작들이 있기를 바라야겠어.”
수천 미터의 둘레를 지닌 공동.
하지만 발 디딜 곳은 단 하나뿐이다.
원형으로 이어지는 벽면의 앞으로 살짝 솟아난 채 이어진 바닥.
폭이 1미터에 불과하다.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벼랑 밑으로 추락하게 되는 구조였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겠네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코크의 소감이었다.
그리드는 집중하고 있었다.
안력을 한껏 돋운 채 수천 개의 감옥 하나하나를 일일이 관찰했다.
저곳 어딘가에 공작들이 있기를 바라며....
바로 그때였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비교적 가까운 곳의 감옥으로부터 일행을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보자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탓에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진 노인이 보였다.
팔다리가 난쟁이처럼 짧은 노인이었다. 수십 년 동안 이곳에 갇혀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몸에 근육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리드와 눈이 마주친 그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케를 옹이라고 하오! 귀하께서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살려주시오! 나를 이곳에서 꺼내주신다면 반드시 사례하겠소!!”
옹(翁)이란, 남자 노인을 높여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옹이란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고 애초에 잘못 된 표현이었다.
참 특이한 자기소개인 셈이다.
“드워프는 한 번 입은 은혜를 결코 잊는 법이 없소이다! 내 맹세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
드워프?
드워프라고?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짐과 동시였다.
“설마 침입자야?”
다른 감옥에서부터 새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끼기긱.
감옥 문이 열렸다.
안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수천 개의 열쇠꾸러미를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제물 없이 빈손으로 방문했기에 뭔가 했잖아? 이거 재밌네. 제 발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침입자는 난생 처음 봤어.”
비프론즈.
감옥으로부터 걸어 나온 사내의 이름이었다.
여태껏 만났던 간수들과 달리 피부가 녹지 않고 온전했으며 인간의 언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하지만 놈은 인간이 아니었다.
하얗게 질린 피부와 비죽 솟은 어금니, 그리고 흰자위 없이 온통 검은 눈.
흑화 상태의 그리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김새다.
다만 그리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귀가 엘프처럼 뾰족하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달렸다는 점이랄까.
과거, 그리드는 저런 존재와 마주해본 경험이 있다.
지옥의 한 마을에서.
“마족?”
눈을 동그랗게 뜬 그리드가 중얼거리자.
“그렇긴 한데.”
비프론즈는 한 쌍의 날개를 펼쳤다.
박쥐의 그것을 닮은 새카만 날개가 한 번 펄럭이자 비프론즈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이곳 ‘틈새’에서 태어난 나는 다른 마족을 만나본 경험이 없어. 내가 과연 순수한 마족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침입자랑 싸워보는 것도 처음인데, 과연 내가 잘 싸울 수 있을까?”
이상한 헛소리를 지껄인 녀석이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러자.
퍼어어엉-!
그리드 일행이 딛고 서있던 지면.
지나온 동굴과 이어지는 길목이 폭발해버렸다.
발 디딜 곳을 잃은 코크와 레쉬가 허우적거리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끝을 엿볼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생긴 그들은 그저 두 눈을 질끈 감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그리드가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
그리드의 외침을 듣고 두 눈을 뜬 코크와 레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폭발의 여파로 쏟아지는 돌무더기 아래로 하강한 그리드가 금속으로 된 철판 수십 개를 주변에 소환한 채 접근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투사체의 표적이 될 경우 이를 방어하는 금속의 방어막을 실시간으로 자동 생성하는 <자동 연성> 스킬의 응용이었다.
그리드는 코크와 레쉬를 구출하기 위해서 베리드의 힘을 꺼냈고, 자동 연성이 발동하게끔 일부러 돌무더기 아래로 하강했던 것이다.
“밟아!”
그리드가 외치자.
타앗!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어 올린 코크와 레쉬가 그리드의 주변에 맴돌고 있는 철판들을 딛고 올라섰다.
동시에.
펄럭-!
그리드가 날개를 펼쳤다.
드래곤의 날개를 고스란히 축소시켜놓은 듯한 날개였다. 박쥐의 것을 닮은 비프론즈의 날개와는 격이 다른 멋과 품격이 느껴지는.
“히익!! 요, 용족!!”
드워프 케를이 비명을 지르며 오줌을 지렸다.
그는 어이없게도 비프론즈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비프 간수장! 부디 저 사악한 침입자를 퇴치해주시게!!”
“.....”
왠지 좀 짜증나는 캐릭터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신을 겨누는 검을 조립해서 손에 쥐자 멍한 표정을 지은 케를이 경탄했다.
“....열 손가락에 꼽아도 좋을 명검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