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15화
“엄청 공들인 맵이군요....”
레쉬의 감상이었다.
그리드와 코크 또한 공감했다.
Satisfy는 지구와 비견되는 크기를 자랑하는 세계였고 그만큼 많은 장소가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무저갱의 퀄리티는 특별했다.
모든 지형지물과 물리현상의 표현도가 ‘현실과 99.9퍼센트 일치하며 분위기와 현상은 다소 과장되게 연출하는’ 기존의 다른 장소들과 달리, 무저갱은 현실과 100퍼센트 일치한다고 할까.
지형지물의 형태, 냄새, 색상, 질감, 그로 인해서 발생되는 물리현상과 기후의 변화 등....
모든 것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현실적인지라 도리어 소름이 돋을 정도.
보통 맵과 달리 BGM도 깔리지 않아서 더욱 더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임철호 회장은 역시 소문대로 외계인 아닐까?’
똑. 똑....
갈라진 석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적막한 동공에 메아리친다.
세월의 흔적을 표현하는, 온갖 형태로 깎아진 암석들이 곳곳에 울퉁불퉁 솟은지라 이동이 불편하다.
무저갱은 오직 직선으로 뚫린 지하가 아니었다. 내려갈수록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해졌고 천장이 나타나 햇빛마저 가렸다.
“긴장되네요.”
1미터 이상의 시야는 확보 불가능할 정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동공에 울리는 코크의 목소리가 떨린다.
긴장 된다는 그의 소감에는 일체의 과장도 없어보였다.
그리드가 핀잔을 주었다.
“군대 안 갔다 왔어? 나처럼 최전방 부대 출신들은 맨날 땅굴 들어가서 각개전투 했어갖고 이런 분위기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데.”
“최전방에 계셨었습니까? 역시 그리드 님은 군대부터 대단한 곳을....”
“뻥이야.”
게임에서 군대 얘기라니.
대한민국 남자들이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타국 플레이어들은 이토록 자연스럽게 군대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 던전 한두 번 다녀본 것도 아닌데 뭐 이 정도에 겁을 먹느냐, 식으로 서두를 꺼냈을 테고 게임 플레이에 적합한 대화를 나눴겠지.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죄다 한국인이었고 바로 그게 문제였다.
묘한 동질감을 느낀 레쉬 또한 대화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최전방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랑거리는 아니죠. 제가 XX사단 출신인데 우리는 오히려 보초 서고 경계할 일이 많아서 후방부대보다 훈련을 적게 했습니다.”
“대신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잖아요.”
“뭐 서로 장단점이 있고 자부심을 느낄 부분도 따로 있고 하겠지.”
쏼라쏼라.
이곳이 현실인가 게임인가.
무저갱인가 군대인가.
예비군, 민방위들의 군대시절 이야기가 꽃피는 와중에.
바들바들.
그리드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귀신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했지만 그리드는 달랐다.
미친놈이야 힘으로 때려잡으면 되지만 귀신을 만나면 도통 해답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 칸의 조상 귀신들을 보고 오줌을 쌌던 그리드는 여전히 귀신이 무서웠다.
체통이 있어 내색은 못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음습한 무저갱의 분위기가 지옥 같았다.
물론 코크와 레쉬는 그리드가 겁먹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못 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드는 세계 최강의 남자.
위엄마저 갖춘 템빨왕이다.
그가 겁쟁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 빛돌이 일 잘한다.”
그리드는 공포심을 몰아내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시야를 밝혀주는 동그란 빛의 정령한테 괜히 말을 시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긴장을 이완시켰다.
안 그래도 빛의 정령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던 레쉬가 넌지시 물었다.
“템빨단원 대다수가 정령을 소유 중이던데 대현자 스틱세이의 도움을 받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 양반이 대단하긴 해도 길드원들한테 정령 돌릴 정도는 못 되요.”
“그럼 설마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신 건지....?”
“네, 정령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나 보군요?”
하이랭커의 정보력쯤 되면 스틱세이를 알아도 이상할 게 없다. 대현자 스틱세이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축복에 대해서 알고 있는 하이랭커는 드물지 않을까?
인간인 이상 세계수의 숲을 쉽게 출입할 수 없게 마련인데, 세계수가 축복까지 내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레쉬의 정보력이 그리드는 내심 놀라웠다.
레쉬는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잘 알리 있나요. 아무래도 황궁에 있다 보니 이런저런 풍문을 많이 듣게 돼서 겉핥기식의 잔지식이 좀 있을 뿐입니다.”
“음....”
그리드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지만 코크는 달랐다.
지금이야말로 레쉬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빼낼 기회가 아닐까 판단하고 끼어들었다.
“듀란달 황자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조금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고 인내심이 부족해서 다혈질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면서도 또 아랫사람들은 잘 챙기는 도량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황자쯤 되면 레벨이 엄청 높겠죠?”
“음.... 칠공작들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와우, 그럼 엄청 강하겠네요?”
“레벨이 같다고 해서 능력치나 스킬까지 같은 건 아니니까요. 사실 싸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못 봤지만 그리 강해보이시진 않습니다. 다만 1황자 롤랑과 4황자 에단은 제국에서도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고 하더군요.”
“....!”
코크가 크게 놀랐다.
최소 2명의 황자들은 칠공작과 비견되는 실력자들이라는 뜻 아닌가?
금수저 물고 태어나 편히 자란만큼 나태할 테고 개인의 실력은 별로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레쉬가 쓴 미소를 그렸다.
“황자들이야말로 치열하게 살고 있습니다. 특히 배 다른 형제가 황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는 입장들이니.....”
“뭘 그렇게 놀라? 특별한 NPC일수록 강한 무력도 동반되게 마련인데 그들이 강한 건 당연하지. 아마 황제가 어마어마할 걸.”
레쉬의 말을 들으며 연신 놀라는 코크에게 그리드가 간단히 말하자.
역시 그리드 님, 이라는 추임새를 넣은 코크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듀란달 황자와 황실은 우리 템빨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코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순간.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군요.”
레쉬가 질문을 끊었다.
“두 분께 도움 받게 된 입장이니만큼 깊이 감사하며, 평소부터 그리드 님의 팬이었던 만큼 최대한의 호의를 보일 의향은 있지만, 문제의 소지가 생길 부분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아, 그럼요. 당연히 이해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떠드는 바람에 레쉬 님의 입장만 난처해지셨군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사과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코크와 웃으며 화답하는 레쉬.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그리드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코크가 정보를 캐내려고 했던 거구나.’
사냥한 몬스터의 시체를 섭취하고 섭취한 몬스터의 스킬 하나를 확률적으로 습득.
코크의 기본 특성이다.
십공신들이 그를 급성장시킬 수 있었던 원천이기도 하다.
존재 자체가 육식이랄까.
실제로 강하기도 엄청 강했다.
한데 이제 보니 슬기로운 면도 있다.
‘이게 바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는 건가.’
그리드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모바일 게임으로 치면 최고 등급 카드를 뽑은 기분이다.
한 세력의 장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에 취해 충만감을 느끼던 그는 문득.
‘아.’
몸의 떨림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무저갱의 음습한 분위를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사람의 힘이다.
툭툭.
그리드가 민망하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코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귀여운 녀석. 이제부터 시작인 듯하니 정신 차려라.”
“앗, 넵!”
확실히, 걷고 또 걸어 지하 깊숙이 내려와 보니 군데군데 이물질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위적인 흔적.
낡은 쇠창살들이었다.
길게 이어진 석벽 곳곳에 자연 발생한 작은 굴들을 ‘감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치한 것들이다.
“여기부터가 진짜 무저갱이다.”
위험을 알리는 경고창의 출현 빈도가 잦아졌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신을 겨누는 검>을 조립하여 손에 쥐었다.
열망의 무아검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검은 불꽃의 연쇄 폭발 여파로 땅굴 내벽이 무너지기라도 했다가는 깔려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크르륵. 크르르륵.
정령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저 너머로부터 불편한 마찰음이 들려온다.
두꺼운 쇠사슬 같은 것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듯한, 소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옵니다.”
그리드의 격려 덕분에 긴장을 떨쳐낸 코크가 검과 방패를 뽑아 쥐었다.
로드 왕자의 기사가 되었을 무렵.
그리드가 직접 만들어 그에게 하사해줬던 무구다.
아쉽게도 검의 등급은 유니크에 머물렀지만 방패의 등급은 레전드리였다.
하지만 등급이 중요할까.
무려 그리드의 기술과 노력이 담긴 정수인데.
심지어 강화 수치도 +8이다.
코크는 그리드가 자신에게 하사해준 이 무구들을 앞으로 몇 년이고, 또 몇 년이고 소중히 사용하겠다는 각오로 전 재산을 강화비용으로 털어먹었었다.
‘역시 템빨단이라 이거군.’
코크가 무장하고 있는 모든 아이템의 가치를 제대로 엿본 레쉬가 템빨단의 저력을 실감했다.
상위 사냥터를 장악한 상태로 온갖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하며 가치 높은 제작 재료를 확보하는 템빨단원들.
그들이 공급하는 재료를 이용해서 아이템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상위 템빨단원의 무장 상태는 레쉬를 비롯한 하이랭커들이 이상(理想)에 한없이 가까웠으니 템빨단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저벅.
한 발 앞으로 나선 레쉬가 그리드보다 전면에 위치했다.
그리드가 나보다 강할지언정 그는 어디까지나 조력자.
퀘스트의 주체는 나이므로 내가 전면에 서는 것이 옳다. 위험은 내가 감수해야한다.
레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먼저 난이도를 가늠해보겠습니다.”
레쉬가 말함과 동시였다.
크르르르르륵!
쇠사슬 끄는 소리가 빨라진다 싶더니 두 개의 인영이 어둠을 꿰뚫고 나타났다.
<오염 된 간수>라는 이름의 제국 병사들. 아니, 몬스터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제국의 상징이 음각 된 갑옷과 검을 무장하고 있었지만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피부는 점액처럼 녹아내리고 있었고 입에서는 독액을 뿜었다.
크르륵, 크르륵, 쇠사슬 끄는 소리는 사실 그들의 갈라진 목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소리였다.
꽈가가가강!!
푸욱-!
두 명의 간수가 동시에 찔러오는 검을 방패로 막아낸 레쉬가 방패 밑으로 검을 쏘아 간수 중 하나의 복부를 관통시켰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방어와 반격이 진행되었으니 그리드는 무척 놀랐다.
“스킬?”
“아니요, 평타입니다.”
코크가 설명해주었다.
“입는 피해량이 방패술의 레벨을 초과하지 않는 이상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방패를 사용하는 직업군의 최대 강점이죠.”
“반트너는 거의 방어만 하던데?”
“아.... 저게 엄청 어려운 기술이라.... 상대방의 실력에 따라서 반격 성공 확률은 한없이 떨어지게 마련이거든요.”
“오호.”
그리드가 반트너와 파티를 맺고 싸울 때는 거의 항상 레이드 때였다.
보스 몬스터는 대개 초월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반트너의 반격 성공률은 낮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동레벨 몬스터를 상대로도 반격 성공률은 40퍼센트에 수렴하죠. 어디까지나 저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무슨.”
동레벨 몬스터 상대로 40퍼센트?
근데 저 사람은 왜 저래?
그리드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레쉬는 간수들의 공격을 무조건 막아내고 동시에 반격까지 성공시키고 있었는데 성공률이 무려 7할에 이르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간수들의 레벨이 레쉬보다 높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컨트롤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저도 제 실력에 자신이 있는데 저분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요.”
“.....”
코크의 실력이야 그리드가 잘 안다.
페이커만큼 정밀하진 못했지만 분명히 수위에 꼽을 정도의 컨트롤 솜씨를 지닌 사람이 바로 코크였다.
그러니 코크조차 명함을 못 내밀게 만드는 레쉬의 컨트롤 솜씨는 엄청난 것이었다.
“컨트롤만 놓고 보면 페이커급인가?”
“페이커 님 보다는 한 수 아래, 하오 님과는 동급 수준으로 평가함이 옳겠네요.”
“하....”
세상엔 진짜 고수가 많구나.
그리드가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쩌엉!
“윽....!”
두 명의 간수가 계속 휘두르는 공격 중 한 방을 레쉬가 허용하고 말았다.
순간 팔에서 힘을 잃은 그의 방패가 하단으로 내려갔고, 그러자 노출 된 가슴으로 간수들의 연계기가 꽂혔다.
“강철의 심장!”
드디어 레쉬가 스킬을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방어력을 증폭시키고 입는 피해량을 감소시킨 뒤, 감소시킨 피해량을 검 끝으로 옮겨 다음 일격의 공격력을 증폭시켰다.
콰자자작!
키에엑-!
제대로 한 방 먹은 간수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멀찍이 나뒹굴었다.
레쉬는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옆에서 공격해오는 다른 간수의 공격을 피하며 돌진, 돌진 거리에 따라서 추가되는 공격력을 방패에 실어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간수의 대가리를 후려갈겼다.
뻐엉-!
그리고 이어지는 평타 공방.
꽤 치열한 결투 끝에 간수 하나가 잿빛으로 산화했고 레쉬의 생명력과 마나는 각각 10퍼센트, 15퍼센트 소모됐다.
이를 악 문 레쉬가 살아남은 간수가 쏘아내는 독액을 돌파하고 검을 역수로 쥘 때였다.
“레쉬 님 덕분에 적의 실력은 충분히 가늠했습니다. 이제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코크가 나섰다.
그는 간수의 공격을 레쉬처럼 정교하게 무력화시키진 못했다. 반격의 성공률도 낮았다.
하지만 레쉬보다 배 이상 빠르고 손쉽게 간수를 해치웠다.
1대1이라는 이유도 컸지만, 기본 능력치의 차이가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코크의 검이 간수를 찌를 때마다 간수의 생명력이 쑥쑥 빠져나갔고 간수가 코크를 베어봤자 코크의 생명력은 쉽게 미동하지 않았다.
그건 단지 템빨만의 영향이 아니었다.
코크가 그동안 수집해온 몬스터들의 패시브, 액티브 스킬이 코크의 능력치를 증폭시킨 결과였다.
코크와 레쉬의 실제 레벨 차이는 4였으나, 둘 사이의 격차는 10. 아니, 20, 30의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드가 제작으로 스탯을 올림으로서 동레벨 다른 유저들을 압도했듯이, 코크는 사냥으로 스킬을 올림으로서 동레벨 다른 유저들을 압도해온 제2의 그리드 같은 존재였으니까.
“.....”
레쉬의 표정이 멍해졌다.
레벨과 템빨 모든 면에서 자신이 코크보다 뒤쳐진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로 큰 격차가 날 줄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허무한 표정마저 짓는 그에게 코크가 소리쳤다.
“멘탈 잡으세요! 벌써부터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
갑자기 뭔 소리야?
레쉬의 어안이 벙벙해졌고,
크르륵. 크르륵!
새로운 간수 2마리가 어둠을 꿰뚫고 등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죽었다.
그리드가 죽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리드가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얘네 레벨 380밖에 안 되네. 여긴 아직 초입에 불과했어.”
“....아.”
이래서 멘탈 잡으라고 했던 거구나.
뒤늦게 납득한 레쉬가 방패에 묻은 독액을 슬금슬금 닦았다.
앞선 치열한 사투가 부끄러워진 그는 눈 둘 곳이 없었다.
그를 지켜보는 그리드와 코크의 눈빛에는 존경과 호감이 깃들어 있었다.
‘제대로 키우면 어마어마해질 관상인데....’
‘같이 대련하면서 컨트롤 솜씨 배우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각기 다른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일행은 무저갱의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