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41화 (931/1,794)

템빨 50권 - 14화

“변태 새끼들.”

398레벨과 399레벨.

비록 하나의 레벨 차이라 할지언정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최소 2배 이상일 것이다.

라고, 그리드는 추측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틀린 추측이었다.

2배 이상이 아니라 최소 10배 이상이다.

무신의 유적지에 틀어박힌 지 보름.

<궁극 연성>을 위해 레이단을 방문할 때를 제외하면 오직 사냥만 했는데도 경험치가 0.09퍼센트밖에 오르지 않았다.

무신의 유적지가 현존하는 사냥터 중 가장 고난도의 사냥터라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이건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이 모양 이 꼴이니까 베리드를 잡고도 렙업을 못 했지. 이쯤 되면 레벨 올리지 말라는 건가?’

그리드는 스스로의 강함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평범한(?) 하이랭커와 자신의 레벨이 동등할 경우, 본인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뻔히 안다.

자신의 압도적인 사냥 능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경험치 요구량을 과연 다른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드는 어렵다고 보았다.

‘1년 후쯤에는 399레벨이 사실상 만렙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도....’

대부분의 유저들이 399레벨에 정체 되는 시기가 찾아오리라.

생각하며, 그리드는 레벨을 올려주는 퀘스트가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이쯤 되니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후 겪었던 마이너스 레벨 구간의 가치도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드하다, 하드해....”

몸서리치던 그리드가 문득 불쾌감에 휩싸였다.

고통 받는 내 모습을 운영자들이 낄낄 거리며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킨이라도 뜯으면서 말이다.

‘....아니, 치킨까지 뜯어가면서 구경할 정도로 변태는 아니겠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리드에게 귓속말이 날아왔다.

무신의 변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유적지는 통신 마법과 전이 마법을 제약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드 님, 그리드 님! 제가 꽤 좋아 보이는 퀘스트를 물어왔습니다!

-오, 그래? 축하한다.

-이거 그리드 님도 함께 깨실 수 있어요!

-나도 같이?

공동 퀘스트인가?

그리드가 코크의 귓속말에 흥미를 보였다.

그가 궁금한 것은 퀘스트 내용 따위가 아니라 보상에 있었다.

만약 경험치를 주는 퀘스트라면, 내용이 어찌됐든 무조건 참가하고 싶었다.

-퀘스트 보상이 뭔데?

-일단 유니크 등급 스킬북 1개입니다!

코크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무려 유니크 등급의 스킬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

코크의 입장에서는 정녕 꿈만 같은 기회였으니 그리드도 당연히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드의 반응은 영 심드렁했다.

-그게 끝이야?

-아, 아뇨! 칭호도 줍니다! 누구랑 호감도도 오르고요!

-.....

템빨단원들을 상대로 조사해봤을 때, 하이랭커의 칭호 보유량은 평균 12개 내외였다.

하지만 온갖 시련을 겪고 극복해온 그리드는 30개 이상의 칭호를 보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칭호가 최상급이었다.

이제 와서 새로운 칭호를 얻어봤자 딱히 기대감이 없었다.

그나마 흥미가 생기는 건 누군가와의 호감도다.

-누구랑 호감도가 오르는 건데?

-그건 저도 잘....

-우리 코크가 많이 컸네~ 말장난도 다 하고~

-그, 그리고 레벨도 올라요!!

-우리 예쁜이 어디야?

***

“여러모로 수상한데요.”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라우엘이 미심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어느 누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히든 퀘스트를 공유해주겠습니까? 제가 봤을 때 이건 함정이거나 장난일 확률이 99퍼센트 이상입니다.”

“래시가드 님은 기사도 사이트에서 15년 넘게 활동하신 원로 회원이고 평소에 보여주는 품행도 엄청 훌륭한 분이세요. 저는 그분의 신용도가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봐요, 코크 님. 인터넷처럼 가면 쓰기 좋은 공간이 어디에 있다고 품행을 운운합니까? 그리고 기사도라는 사이트가 뭐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그곳에서 활동한 15년이 신뢰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거죠?”

“기사도는 기사를 선망하는 이들이 모여 오직 기사에 대해서 토론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로서 20년 역사의 전통을 자랑하는....”

“아주 그냥 기알못들만 모인 곳이네. 중세시대 기사 중 절반은 양민을 약탈해서 연명하는 건달이거나 입만 열면 구라가 튀어나오는 허세꾼들이었는데.”

“라우엘 재상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니, Satisfy의 기사 플레이어들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중세시대 기사들이 그랬다고요.”

“절 쥬드로 아십니까? 지금 기사도 회원들을 조롱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야, 너희들 싸우지 말고 진정해봐.”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그는 정체불명의 제보자를 불신하고 있는 라우엘과 생각이 조금 달랐다.

“라우엘 네가 삐딱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우리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네 의심은 좀 틀렸어. 세상에 어느 누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히든 퀘스트를 공유해주겠냐고? 당연히 친구가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

인싸는 모르는 아싸 감성이다.

한때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그리드는 래시가드라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반드시 2명의 일행이 있어야 클리어할 수 있는 퀘스트를 받았는데 친구가 없어. 그럼 어쩌겠어? 인터넷에서라도 사람 구하고 그래야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냥 빠르게 가자. 일단 친추 맺고 퀘스트 사실여부부터 파악하는 게 좋겠어.”

“어쨌든 함정일 수도 있으니 주의를.”

“봐서 영 수상하면 차단할게.”

“알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친구 신청하신 후 레벨이랑 소속 세력을 공개 모드로 설정해주십시오. 그쪽에서도 레벨과 소속을 밝히게끔 자연히 유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냐를 판별하기 위한 절차인 셈.

납득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인 후 ‘레쉬##3’에게 친구 요청을 보냈다.

##3은 그 아이디를 3번째로 만든 사람이라는 뜻.

20억 유저 중 레쉬라는 아이디가 수천, 수만 개는 될 텐데 그중에서 3번째로 만들어진 아이디라면 필시 초창기 플레이어다.

역시나.

이름:레쉬

레벨:363

소속 세력:없음

“하이랭커 레쉬....!”

친구목록에 떠오른 레쉬의 정보를 확인한 코크가 깜짝 놀랐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우엘도 다소 놀란 눈치였다.

그리드만 어리둥절했다.

“왜? 누군데?”

“5년 동안 통합 랭킹 1,000위권을 유지해온 랭커입니다.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길드 활동조차 안 해서 모든 게 베일에 싸인 인물이지만 이름값 하나는 최고 수준이죠.”

“5년....?”

누구나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이다.

크라우젤이나 상위권 템빨단원들처럼 격이 다른 천재가 아닌 이상,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랭킹의 굴곡을 겪었다.

경쟁자가 수십 억 단위인 Satisfy에서 최상위 랭킹을 5년 동안 꾸준히 유지했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와, 레쉬가 한국인이었다니.”코크가 살짝 흥분했다. 아무래도 평소부터 레쉬에게 관심이 있던 눈치 같았다.

상황을 계속 의심하고 불신하던 라우엘의 태도도 한층 누그러졌다.

“일단 접촉해보셔도 될 것 같군요. 잃을 게 많은 사람인만큼 전하를 섣불리 함정에 빠뜨릴 가능성도 적겠죠.”

***

사하란 제국 황도 타이탄.

접선지에서 레쉬를 만난 그리드와 코크는 내심 놀랐다.

설마 레쉬가 2황자의 기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일개 플레이어가 황자 직속의 기사로 승진했을 정도면 굉장히 많은 공적을 쌓아올렸으리라.

“사실 조금 망설였었지만.... 그리드 님과 공작들의 관계가 가까웠던 걸 떠올리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레쉬는 모든 걸 솔직히 밝혔다.

이번 퀘스트는 제국 내부의 일.

제국과 전쟁 중인 템빨국의 왕과 협력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매우 고민했다고.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고 한다.

베리드 레이드 현장에서 그리드는 제국 공작들과의 친분을 과시한 바 있기에.

“이거.... 상황이 심각하군요.”

퀘스트를 공유 받고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그리드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템빨국과 제국의 관계를 개선시켜줄 공작들이 위기에 빠졌으니 여러 정황을 의심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황제가 템빨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치 않고 공작들을 탄압한 것일 수도 있다.

레쉬가 안심시켰다.

“공작들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미 황제는 황도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번 일의 배후에 황제가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으며 의심할 사람은 단 한 명, 4황자 에단뿐입니다.”

“흠.....”

에단.

아스모펠을 세뇌하고 피아로를 반역자로 내몬 황비 마리의 아들이다.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결국 나 때문에 위기에 빠진 건가.’

피아로를 노출시킨 게 화가 된 듯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에단이 황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고 공작들을 처리했으리라.

‘여기서 또 야탄의 정수가 나왔다가는 심각해질 것 같은데.’

Satisfy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 중 가장 사기적인 아이템을 꼽자면 단연코 야탄의 정수다.

야탄의 정수는 악신의 권능이 깃들었다는 미명 하에 개연성을 파괴하는 만능을 발휘했다.

그리드는 이미 아스모펠 에피소드와 엘프 에피소드를 통해서 야탄의 정수의 위력을 엿봤었다.

‘황비 마리는 야탄교와 협력 관계에 있다. 에단 또한 야탄의 정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서둘러야한다.

야탄의 정수에 중독 된 공작들이 과거의 아스모펠처럼 세뇌 당했다가는 모든 상황이 비틀릴 것이다.

“당장 무저갱으로 출발합시다.”

이제 그리드에게 중요한 것은 퀘스트 보상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템빨국의 왕으로서, 공작들의 친구를 자처했던 몸으로서 의무감을 느꼈다.

“늦기 전에 어서 공작들을 구출해야겠소.”

“우리의 임무는 공작들의 구출이 아니라 죄수 목록을 확보....”

“공작들을 구출하다보면 확보할 수 있겠지.”

“.....”

레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드의 가장 큰 저력이 ‘인망’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했지만, 당연히 과장되고 포장 된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왔었다.

대부분 유명인들의 실상은 언론에서 묘사되는 것보다 못했으니 당연히 그리드도 마찬가지일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단지 개인의 친분 때문에 NPC들을 위해서.

심지어 적국의 귀족들을 위해서 위험을 불사할 줄이야.

그리드에게 있어서 우정의 가치는 영화 속 그것처럼 아름답고 절대적인 개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한 인재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이유가 있었군....’

그리드의 뒤편에 공손히 시립하고 있는 젊은 랭커, 코크의 모습을 힐끗 확인한 레쉬가 잊고 있던 열정을 되찾았다.

“알겠습니다. 공작들을 구출할 수만 있다면 저의 주군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죠. 저도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

제국 최대 최악의 지하 감옥, 무저갱은 규모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거대한 땅굴이었다.

대륙이 반으로 쪼개진 것은 이곳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구심이 들 정도로 새카만 땅굴은 인간의 공포심을 극한까지 자극했고 그 탓인지 주변에는 인기척이 존재하지 않았다.

“황무지 가운데 존재하는 땅굴. 아무 것도 없는 이곳을 굳이 찾아올 사람은 없기 때문에 외곽 경비가 없습니다.”

“찾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요. 근처만 와도 오금이 저리네요.”

코크가 몸을 덜덜 떨었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겁을 먹은 눈치였다.

그리드가 그의 등짝을 팡, 하고 후려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방심할만한 곳이 아니다.”

실제로 초월자의 격이 알리고 있었다.

[당신의 직감이 위험을 감지합니다.]

[행동에 주의를 요합니다.]

지금이라도 동료들을 소집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끔 만드는 알림창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3명 제한의 퀘스트.

이 이상 인원을 늘렸다가는 시스템적인 제약이 발생할 수도 있다.

“무저갱의 밑바닥이 즉 인계의 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옥과 맞닿는 장소로서 마기가 들끓는다고 하죠. 내부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경비를 선다고 들었으니 어려운 전투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요. 부디 무운을 빌며, 제가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레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퀘스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앞장서 무저갱으로 입장했다.

짙은 어둠이 일행의 시야를 잠식한다.

***

밤이 되자, 신비한 목재와 석재로 세운 천상궁이 오색찬란한 빛깔을 영롱하게 쏘아내기 시작했다. 사방천지가 밝게 물들어 밤과 낮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천하를 오시하는 그랜드마스터가 기거하는 궁전답게 화려하고 웅장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해답을 엿보는 계기가 되는가....”

마법의 수정구를 지그시 관찰하는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의 눈동자에 미세한 흥미가 번졌다.

수정구 속에는 무저갱으로 몸을 날리는 템빨왕 그리드의 모습이 영상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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