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13화
363레벨의 하이랭커 레쉬.
어려서부터 판타지 소설과 영화를 섭렵해온 그에게 있어서 가상현실게임 Satisfy의 출시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기사(騎士).
오랜 세월 선망해온 그 환상의 직업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됐으니까.
철저한 준비와 계획 끝에 Satisfy를 시작한 레쉬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고 드디어 꿈을 이뤘다.
무려 2황자 듀란달의 전속 기사가 된 것이다.
아직 NPC들과 비교하면 레벨이 낮아 말단에 불과했지만, 선임기사 밑에서 수학하며 신뢰를 얻은 그는 ‘하루에 4시간씩 듀란달의 곁을 지키는’ 일일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제국의 황자를 수행하는 기사....
그것은 고귀한 지위였고 레쉬의 매일은 충만했다.
레쉬는 자신이 선망했던 소설 속 기사들처럼 행동했다.
오직 주인에게 충성하며 주인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였고, 그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껴왔다.
“괘씸한 녀석!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형님인 나를 문전박대하다니!!”
“.....”
회궁하는 듀란달 황자의 기색이 심상찮다.
오전에 4황자의 궁전을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사달이 발생한 듯하다.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으며 침실로 들어가는 듀란달 황자에게 공손히 읍한 선임기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비린내가 나는군.”
“피비린내요?”
사하란 제국은 현재 전시 상태다.
아니, 늘 전시 상태였다.
소수민족들과 전국 각지에서 전쟁 중이었으니.
하지만 그건 황자 직속 기사들과는 관계가 없는 얘기였다.
황자들이 직접 전장에 나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레쉬는 전화(戰禍)와 거리가 먼 입장이라는 뜻.
한데 피비린내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쉬에게 선임기사가 속삭였다.
“현재 황도 곳곳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네. 공작 각하들께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셨어.”
“세 분의 공작 각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렌할, 모르이즈, 바사라.
얼마 전 그들은 황제를 알현하겠다고 황도를 찾아왔다.
하지만 마침 황제가 자리를 비운 까닭에 당분간 자신들의 별장에서 대기하기로 했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하, 어디 사냥이라도 떠나신 게 아닐까요?”
레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공작들은 제국에서도 최강의 실력을 지닌 인물들.
애초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지닌 그들을 누군가가 해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이 실종됐다는 표현은 부적합하다는 것이 레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임기사의 생각은 달랐다.
“4황자가 수상하네. 며칠 전 4황자의 명령으로 무저갱이 열렸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무저갱....?”
레쉬의 얼굴이 굳었다.
무저갱은 제국 역사상 최악의 지하 감옥.
황실에 반역하거나 국가 전복을 시도한 일급 정치사범들만을 가두는 장소로서 이름그대로 무척 살벌한 곳이다. 수감자를 미치게 만든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다.
“무저갱에 가둔다는 것은 사형 이상의 처벌일세.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저갱이 열렸다는 기록이 없을 정도야. 한데 공작 각하들께서 실종되신 순간에 4황자가 그곳을 열어버렸네. 여러모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거....’
레쉬는 직감했다.
그것은 오랜 경험을 쌓아온 하이랭커의 직감이었다.
역시나.
[히든 퀘스트 ★무저갱 탐색★이 발생합니다!]
“후작 이상의 대귀족과 황자 전하들은 죄수를 무저갱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을 지니셨네. 하지만 죄수 목록을 열람하는 권한은 오직 황제 폐하만이 지니셨지.”
“.....”
“듀란달 전하께서는 무저갱에 갇힌 죄수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계시네. 무저갱에 갇힌 죄수들이 만에 하나 실종 된 공작 각하들이실 경우....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심한 고초를 겪고 어떻게 망가지실지 몰라. 4황자가 그분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이용해서 분란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 듀란달 전하의 추측이시네.”
“잠시, 잠시만요.”
사건의 규모가 너무 크다.
말단 근위 기사에 불과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너무 과장 된 억측이 아닐까요? 4황자에게 공작 각하들을 체포할 권한이나 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한은 없어도 무력은 있지.”
“....?”
“2황자 전하께서 공식적으로는 부정하고 계시지만, 마장기라는 고대병기는 사실 엄청 굉장한 무력을 발휘하거든. 그리고 4황자가 타고난 ‘적기’는 1황자 전하와 비견되는 수준이니 제아무리 공작 각하들이라도 방심할 수 없어.”
“아, 아니. 그래도 이상한데요. 바사라 공작 각하는 4황자에게도 6촌 아닙니까? 6촌을 무저갱에 가뒀다고요?”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 겐가? 듀란달 전하와 4황자는 이복형제인데도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에게 검을 겨눠오지 않았는가?”
“....아.”
중세.
파벌, 권력, 황위.....
레쉬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토록 꿈꿔왔던 기사의 세계는 결코 아름답고 고귀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은 레쉬의 어깨를 선임기사가 두드려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의 귀환 일정이 나흘 뒤로 미뤄졌다는 소식일세. 그러니 시간은 충분해. 앞으로 6일 내로 무저갱의 죄수 목록을 확보해오시게.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저, 저 혼자서 무저갱을 어떻게....”
이거, 제대로 똥 밟았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예 개죽음 당할 각 아닌가?
나, 정말로 큰일 난 것 같다.
“누가 혼자서 가라고 했나?”
순간.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조금 전 활성화 됐던 히든 퀘스트의 상세 정보가 레쉬의 눈앞에 떠올랐다.
<무저갱 탐색>
★히든 퀘스트★
선임기사 벨은 방랑 기사 출신이었던 당신의 인맥에 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인맥을 동원하여 무저갱을 탐색하고 <죄수 목록>을 확보하십시오.
*2명의 플레이어를 퀘스트에 참가시킬 수 있습니다! 퀘스트 참가 멤버는 전원 동일한 보상을 획득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
1.던전 ‘무저갱’의 지도를 15퍼센트 이상 활성화시킬 것.
2.무저갱 죄수 목록 확보.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3. 듀란달 황자와의 호감도 개방. 유니크 등급 스킬북 1개. 칭호 ‘지하의 끝을 엿본’ 획득.
퀘스트 실패 시:레벨 마이너스 5.
“.....”
어마어마한 보상.
난이도는 극악에 실패 시 페널티도 상당하다.
퀘스트 거부 권한?
당연히 없다.
기사의 상명하복은 군인의 그것보다 더 절대적이었으니까.
“....기필코 해내보이겠습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레쉬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편한 길만 걷는 것은 기사가 아니다.’
당연히 시련과 역경이 따르는 법이다.
그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영웅이 되는 기사들의 모습에 레쉬는 반했었던 것이다.
‘하자. 하는 수밖에 없어.’
다만 문제는 2명의 조력자를 어디서 찾느냐다.
현실세계의 레쉬는 훌륭한 대인관계를 자랑했고 그만큼 인맥도 많았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인맥 중에 하이랭커는 없었다. 이런 고난이도의 퀘스트를 함께 수행할만한 동료를 과연 어디서 찾아야할지 그는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거기서 찾아볼까?’
레쉬는 <기사도>라는 이름의 커뮤니티를 떠올렸다.
기사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는 작은 커뮤니티.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역사는 깊었고 회원 대부분이 Satisfy가 출시되자마자 Satisfy를 시작했다.
레쉬는 특히 ‘펩시는 역적’이라는 해괴한 아이디의 신규 회원을 주목했다.
‘그 사람이 올렸던 게시글이나 댓글들을 보면 하나 같이 고레벨 입장의 견해들이었어.’
그에게 협력을 요청해보자.
생각한 레쉬가 곧바로 로그아웃해서 기사도 사이트에 접속했다.
***
[‘래시가드’님께서 쪽지를 남기셨습니다.]
“응? 이분이 무슨 일이지?”
이선웅.
Satisfy에서 코크라는 이름으로 활약 중인 청년이 스마트워치에 떠오른 알람을 보고 기뻐했다.
로드 왕자의 기사가 된 후 가입한 커뮤니티, 기사도.
래시가드는 그곳에서 만난 회원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어딘가의 기사다.
코크는 래시가드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래시가드가 공유해주는 정보들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제목:펩시 역적님께.
안녕하십니까, 펩시님.
제가 이번에 상관에게 아주 큰 임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나라의 지하 감옥을 탐색하고 죄수 목록을 확보하는 일인데 여기에 엄청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요. 저를 포함해 총 3명의 플레이어가 참가할 수 있는 퀘스트인데 난이도가 매우 높고 그만큼 보상도 대단합니다. 혹시 펩시님의 레벨이 340이 넘으시고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으시다면 퀘스트 참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꼭 답장 부탁드립니다.
“흐음.... 340레벨 제한의 퀘스트라는 건가....”
어쩐지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싶더니 상당한 고렙이었다.
잠시 고민해본 코크가 래시가드에게 답장을 보냈다.
제목:래시가드님께.
안녕하세요, 래시가드님!
다행히 제 레벨은 340을 조금 넘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다고 하시니 조금 긴장이 되네요. 자세한 정보를 듣기 전에는 확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ㅠ.ㅠ
답장은 곧바로 도착했다.
제목:퀘스트 내용입니다.
<무저갱 탐색>
★히든 퀘스트★
선임기사 XX은 방랑 기사 출신이었던 당신의 인맥에 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인맥을 동원하여 무저갱을 탐색하고 <죄수 목록>을 확보하십시오.
*2명의 플레이어를 퀘스트에 참가시킬 수 있습니다! 퀘스트 참가 멤버는 전원 동일한 보상을 획득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
1.던전 ‘무저갱’의 지도를 15퍼센트 이상 활성화시킬 것.
2.무저갱 죄수 목록 확보.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3. XXX와의 호감도 개방. 유니크 등급 스킬북 1개. 칭호 ‘지하의 끝을 엿본’ 획득.
퀘스트 실패 시:레벨 마이너스 5.
펩시 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정보 유출을 방지하는 의미에서 일부 인물의 이름을 삭제했습니다. 나머지 정보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보시다시피 보상이 매우 높습니다. 최소 SS급 난이도의 퀘스트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희생하면서까지 참여해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단지 도움을 요청 드리는 겁니다.
“헐.....”
퀘스트 내용을 읽어본 코크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유니크 등급 스킬북에 칭호, 심지어 레벨 3개짜리 퀘스트라니?
이건 참여할 수만 있으면 참여하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래시가드가 이미 몇 년 전부터 기사도 커뮤니티에서 활동해왔던 사람이라는 점과, 그의 커뮤니티 활동 내역이 무척 깨끗하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신뢰도도 꽤 높다.
흥분한 코크가 곧장 쪽지를 보냈다.
답장도 바로 도착했다.
두 사람의 쪽지 대화는 실시간 채팅처럼 진행됐다.
펩시역적:혹시 다른 멤버는 이미 구하신 건가요?
래시가드:아니요. 아직 못 구했습니다.
펩시역적:혹시 제가 한 사람 추천해도 될까요?
래시가드:음.... 그럼 일단 펩시님은 참가할 의향이 있으시다는 건가요?
펩시역적:네.
래시가드:그럼 우선 Satisfy 상에서 만나도록 하죠. 펩시님과 실제로 만난 후에 우리의 전력을 가늠한 뒤 펩시님께서 추천해주시는 분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펩시역적:네, 알겠습니다. 근데 당연히 받아들이실 걸요.ㅎ
래시가드:?
펩시역적:아, 제가 추천드릴 분이 그리드 님이라서 ㅎㅎ
래시가드:ㅎ.....
‘가벼운 사람이었군.’
펩시의 적극적인 태도에 고무됐던 레쉬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갑자기 지존의 아이디를 언급할 줄이야.
도가 지나친 농담이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레쉬는 펩시가 사실은 아직 어린 학생이거나 철없는 어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안 보이는 인터넷상이라고 허풍만 치는 사람에게 속아온 건 아닐지 불안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가 다시 Satisfy에 접속했다.
펩시에게 친구요청을 걸라고 아이디를 알려주긴 했지만, 이제는 별 기대감이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구해봐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벌써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Saitsfy에 로그인한 그에게.
[플레이어 ‘코크’님이 당신에게 친구를 요청하였습니다.]
[플레이어 ‘그리드’님이 당신에게 친구를 요청하였습니다.]
곧바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레쉬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드랑 아는 사이라더니 진짜였네.”
Satisfy는 20억 플레이어가 즐기는 게임.
중복 아이디가 허용 된다.
이 그리드가 ‘템빨왕 그리드’일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친구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갱신 된 친구 목록을 불러옵니다.]
이름:코크
레벨:367
소속 길드:템빨단
“어....?”
이름:그리드
레벨:399
소속 길드:템빨단
“....네?”
진짜였어?
레쉬의 넋이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