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12화
텔리우스 평야.
이름그대로 확 트인 그곳에는 장애물이 존재치 않는다.
플레이어는 넓은 시야를 보장 받았고 맵 곳곳에서 리젠되는 몬스터를 원거리에서부터 요격하는 일이 가능했다.
텔리우스 평야가 마법사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이유다.
저마다 파티를 맺은 마법사들이 난사하는 마법의 폭격 앞에서 평야의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진짜 너무 편하네. 여기를 조금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320레벨 전에는 마법 저항력 깎는 패시브 스킬을 못 배우잖아. 320레벨 전에 왔다고 해봤자 저 은갑 기병들 못 잡았을 걸.”
“하긴 그렇군. 제때 온 거 맞구만. 흐흐, 경험치 쭉쭉 오르는 것 봐라. 이러다가 우리가 상위 랭킹 장악하겠네.”
“충분히 가능한 목표지. 기존의 하이 랭커들은 베리드 레이드에 도전했다가 몇 번이나 죽어나갔으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치고 나갈 타이밍이야.”
“템빨단원들도 전쟁 중에 엄청 죽었었고 말이지.”
대게 파티란, 다양한 직업군이 모여 편성하게 마련이다.
특정 직업군 하나만 모여서 파티를 짤 경우 발생하는 취약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텔리우스 평야는 마법사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냥터라고 평해도 좋은 사냥터였다.
300레벨 초중반의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하였는데 그중 ‘은갑 기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몬스터가 마법 저항력이 낮았다. 대신 물리 방어력과 생명력이 높았지만, 3차 전직 마법사들은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입히는 마법을 필수적으로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야의 몬스터들은 마법사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몸을 숨길 엄폐물 하나 찾기 힘든 평야에서, 몬스터들은 원거리 마법에 대항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퍼펑-!
퍼퍼퍼퍼펑!!
단합의 힘.
소문을 듣고 평야를 찾아오는 고레벨 마법사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사냥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그들의 레벨은 랭킹계를 격변시킬 정도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꿈만 같은 나날.
본래 로테몬 왕국령이었던 텔리우스 평야는 베리드에 의해서 주인을 잃었고, 그 빈 땅은 마법사 플레이어들에 의해서 완전히 잠식되어갔다.
‘베리드의 강림은 커다란 축복이었다.’는,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우스갯소리가 마법사들의 입버릇이 되기 시작할 무렵.
“어....?”
마법사들은 여태껏 평야에서 만날 수 없었던 몬스터들을 목격했다.
보랏빛 오러를 몸에 두른 데스나이트 3기였다.
“보스 몹? 여기도 보스가 있었어?”
“그런 얘기 못 들었지만... 포스 보니까 보스 몹 맞는 것 같다. 출현 주기가 엄청 느려서 그동안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고.”
“호오....”
출현 주기가 늦는 보스 몬스터일수록 더 강하다.
그리고 강한 보스 몬스터일수록 더 큰 보상을 준다.
저벅. 저벅. 저벅.
멀리서부터 조금씩.
천천히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데스나이트들을 바라보면서, 마법사들은 절호의 득템 기회가 찾아왔을 직감했다. 그들의 두 눈이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평야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마법사 100여명이 평야의 중심부로 집결해 각자의 파티별로 대열을 맞췄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즉시 궁극기부터 갈겨.”
“마나물약이랑 버프물약 아끼지 말고 팍팍 먹어! 딜 최대한 때려 박으라고! 1등 보상은 우리 파티가 먹는다!!”
“폭발형 마법 위주로 사용해. 데스나이트도 결국 언데드고 내구력이 약하니까.”
안식은 때때로 독이 된다.
평야에 머무는 동안 너무 쉬운 싸움만 반복해온 마법사들에게 위기의식은 전무했다. 그들은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오로지 사기충천했다.
하여.
“....!?”
어느새 사정권에 접어든 데스나이트들에게 마법을 폭격한 순간.
까자자자자자자장-!
갑자기 펼쳐진 무지갯빛의 장막이 자신들의 마법을 무력화시키자 당황한 그들은 위기 상태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했다.
끼기긱-!
“헉....!”
100여개의 마법을 무력화시키고 유리처럼 조각나 흩어지는 무지갯빛의 장막.
그것을 뛰어넘어온 3기의 데스나이트를 코앞에서 마주한 마법사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까이서 본 데스나이트들의 이름은 카오, 둠, 에이미.
그들의 이름은 보스 몬스터와 똑같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나, 앞에 하나씩의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바로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라는 수식이었다.
“미친....!”
사색이 되는 마법사들의 뇌리로 한 마리 리치의 형체가 스쳐지나간다.
그 이름, 무무드라고 했던가.
무지갯빛 마력을 폭사시키며 템빨왕 그리드마저 위기에 몰아넣었던 최상급 리치....
“캬하하하하하핫!!”
“아그너스....!”
역시나.
반전은 없었다.
데스나이트들의 검과 도끼가 마법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그너스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리치 무무드의 어깨를 두 발로 딛고 선 그의 번뜩이는 금안이 마법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왜...! 왜 우리를....!”
압도적인 힘.
저항이 무의미한 폭력 앞에 쓰러진 마법사들이 분노와 의문이 서린 시선으로 아그너스를 노려봤지만 아그너스는 콧방귀 뀔 뿐이었다.
아그너스는 마법사들의 분노를 비웃었고 의문은 묵살했다.
그저 웃으며 살육만을 반복했다.
***
평화는 봄처럼 짧았다.
베리드가 토벌당하고 3주가 지날 무렵.
사람들은 새로운 두려움과 대면하게 되었다.
『아그너스가 또 다시 학살을 자행했다는 소식입니다....!!』
일인군단 아그너스.
임모탈이라는 세력을 잃은 후 한동안 잠잠했던 그가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사냥터에 나타날 때마다 사냥터의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고 잿빛으로 산화했다.
무작위 학살.
그것은 미친개라고 불리던 시절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광기였다.
『제보 영상들을 분석해 볼 때마다 몹시 불쾌해지더군요. 아그너스의 폭력성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그는 역대 최악의 PK범이에요. 악인이 힘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산 증인이며....』
『랭커들 사이에 ‘아그너스 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소문입니다. 아그너스의 폭주로 인해서 전국 각지의 사냥터가 텅텅 비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으며 랭커들의 레벨이 정체되는 현상이 포착되는 등 커다란 문제가.....』
『응당 죗값을 물어야합니다. 이유 없는 학살을 자행하는 악당을 우리는 반드시 토벌해야합니다.』
『과연 이유 없는 학살일까요? 아그너스 입장에서는 합당한 복수 아닐까요?』
『뭐가 합당한 복수라는 겁니까?』
『바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그너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고 그가 우리의 강요에 응하지 않자 비난을 일삼았죠. 아그너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을까요?』
『비난 좀 당했다고 살인으로 되갚는다? 그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이요? 아그너스는 사이코패스외다. 그의 행동을 변호할 생각일랑 추호도 마시오.』
『비난하기에 앞서서 우선 원인을 분석하고 이해해보려고 하는 거죠.』
『아니, 사이코패스라니까? 그딴 놈을 이해하겠다고? 댁도 사이코패스요?』
『말이 심하시군요!』
아그너스, 아그너스, 아그너스!
베리드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세상이 이제는 온통 아그너스 이야기로 물들었다.
세계 각국의 언론들이 아그너스의 학살을 집중 조명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그너스를 비난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그너스를 옹호했다.
물론 옹호세력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그너스를 옹호한다는 것은 지난 날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해야한다는 뜻.
사람은 타인에게 엄격할지언정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법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까지 무작위 학살을 자행하는 아그너스를 비호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라우엘, 이거 어쩔 거야?”
템빨국, 라인하르트 성.
재상 라우엘의 집무실에 방문한 지슈카가 손에 든 종이를 팔랑거렸다.
대륙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초대형 길드 마스터들의 날인이 찍힌 <아그너스 토벌 격문>이었다.
26명의 길드 마스터들은 템빨단에도 참가를 부탁했다.
그들은 아그너스가 템빨단을 배신한 사건을 주목하고 있었다.
템빨단 역시 아그너스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을 것이며, 아그너스의 폭주에 위협을 느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템빨단이 아그너스 토벌에 참여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26개의 대형 길드가 아그너스 척살령을 내린다라.... 아그너스 님의 행보에 꽤 큰 제약이 생기겠군요.”
“하지만 완전히 행동을 구속할 순 없겠지. 아그너스가 이번에는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행동하고 있잖아.”
“NPC는 일체 건드리지 않고 있다죠?”
“응, 현상범이 됐다가는 큰일 난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NPC는 차마 못 건드리겠지. 격문의 주장과 달라. 아그너스는 폭주 상태가 아니야. 철저히 계획적으로 복수극을 진행 중일 뿐이지.”
“복수극이라....”
과연 그게 전부일까?
임모탈 사태 당시, 라우엘은 아그너스가 의외로 영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미 엿본 바 있다.
그 아그너스가 뒷감당이 불가능할 무작위 학살을 단지 복수라는 명목 하에 진행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반드시 믿는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하면 살인할수록 강한 힘을 얻는다거나....’
바알의 계약자라는 클래스가 지닌 특수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바알의 계약자는 인류의 대적자.
그가 지닌 잠재력과, 잠재력을 개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라우엘에게 지슈카가 격문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냥 거절해버려.”
“거절이요?”
라우엘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슈카는 체다카 길드 출신이다.
그리고 체다카 길드 출신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지존을 꿈꿔왔었다.
자존심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
자존심이야말로 가장 큰 행동근거인 사람들.
그들의 성격 상, 세상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아그너스 토벌에 참여하자고 주장할 줄 알았다.
한데 참여하지 말자고?
“아그너스 님은 과거 우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협곡에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그 장면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목격했죠. 우리가 그에게 응징을 가하지 않을 경우,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에게 겁먹은 거라고 비웃으며 손가락질 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드와 우리는 베리드를 토벌했어. 그런 우리가 아그너스라는 일개 플레이어에게 겁먹은 거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만약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원숭이 이하의 지능을 지닌 사람이겠지. 안 그래?”
“....잘 알고 계시는군요.”
“나도 더 이상 골목대장이 아니니까. 시정잡배 같았던 체다카 길드와 지금의 템빨단은 차원이 다른 세력이잖아? 나는 더 이상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아.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감히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
“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라우엘 너는 아그너스 토벌에 참가하는 게 내키지 않는 거지? 그럼 그렇게 해. 참가하지 마.”
“어떻게 아셨죠?”
“그야 표정을 보면 알지. 오랜 친구인데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
라우엘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우정과 신뢰를 논하기에 앞서 이익만을 주장하고 쟁취해왔던 내게 친구라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라우엘은 솔직히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부끄러워하기는~”
짓궂게 말한 지슈카가 라우엘의 은발을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 태도가 흡사 그리드를 닮아있었기에 라우엘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번 사태 이후 아그너스 님의 무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엿봤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적대하는 건 내키지 않다?”
“네, 저는 개인적으로 바알의 계약자야말로 Satisfy 최강의 클래스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적대하지 않아도 아그너스가 우리를 먼저 친다면?”
“지슈카 님께서 예상하시는 것과 같이 현재 아그너스 님은 폭주 상태가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먼저 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저희가 다른 길드들과 협력해서 토벌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할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맞아. 내 생각도 같아. 그리고 한 가지 의견을 덧붙이자면, 아그너스의 성격은 언젠가 바뀔 수도 있다고 봐.”
아그너스가 아이린과 로드를 지킨 사건은 템빨단 내에서 유명하다.
지슈카는 아그너스와 굳이 적대하기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라우엘의 의견도 같았다.
“그럼 이건 거절하는 걸로.”
라우엘이 아그너스 토벌 격문을 휴지통에 버려버렸다. 한결 편해진 그의 표정을 확인한 지슈카가 한 시름 놓았다.
항상 혼자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라우엘이 늘 마음에 걸렸던 그녀다.
동료애라는 것이다.
템빨단의 결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