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36화 (926/1,794)

템빨 50권 - 9화

“여기가 마지막 섬인가.”

놈은 스스로를 제10위 대악마라고 밝혔다.

“내 이름은 레라지에. 지옥을 지배하는 33군주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지.”

레라지에는 깊이 눌러 쓴 모자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새빨간 입술은 쥐새끼라도 잡아먹은 것 같았다.

“나는 무력과 지략을 겸비한 훌륭한 군주이다. 그 증거로 이곳 66번 섬까지 쉽게 돌파하였지. 후훗.”

““.....””

타인과의 만남은 실로 오랜만이다.

어렴풋이 가늠해 보건데 족히 수십 년만은 아닐까.

하지만 기쁘지 않도다.

벌써부터 시시하니 나른해지노라.

방정맞은 악마 놈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나의 특기는 투쟁. 누구와 무엇을 겨루든지 승리하려는 습성을 지녔으며 반드시 승리하는 패왕이다. 그 증거로 앞에 섬을 지키고 있던 전대 전설들도 손쉽게 해치웠지. 악마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는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 놈조차도 나의 상대는 되지 못하였다. 후후훗.”

““.....””

“흐음.... 자아조차 없는 데스나이트 따위와 대화를 시도한다는 건 무리였나. 재미없군. 하지만 기대는 된다. 네놈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보아하니, 네놈은 필시 검성 뮐러이겠지. 살아생전에 헬가오를 비롯한 대악마들을 여럿 봉인하였다면서? 그 명성을 익히 들었고 늘 만나고 싶었다. 내가 헬가오보다 뛰어남을 증명할 기회로 삼겠다.”

““짐은 뮐러가 아니다.””

감히 짐을 누구로 착각하는가.

입을 열자, 레라지에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호오, 데스나이트가 말을 해? 그래, 네놈이 뮐러가 아니라면 누구지? 생전에 너는 무엇이라 불리었느냐?”

“마드라. 짐은 루반나의 왕이었도다.”

“마드라...? 몇 번 들어본 것은 같다. 실망이군. 마지막 섬에서만큼은 뮐러를 만나지 않을까 기대하였는데... 최후의 전투 또한 시시하겠어.”

““.....””

허무가 강해진다.

파그마, 네놈은 고작 이까짓 놈들이 두려워서 짐을 부활시킨 것이더냐?

““이십만대군 분쇄검.””

“....!”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두 번째 삶.

짐은 아무런 의욕도 없었고, 섬에 홀로 갇힌 이후 단 한 차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선 채 하늘만을 보았다.

하지만 짐의 실력은 녹슬지 않도다.

오만으로 점철 되어있던 레라지에의 눈빛에 공포가 깃드노라.

***

아직 그리드가 이십만대적검을 익히기 전.

<마드라의 일기장>으로 재생 된 과거는 바로 여기, ‘일곱 번째 장’의 중간 지점에서 멈췄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399레벨을 달성하고 이십만대적검을 습득한 그리드는 뒷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컥...! 쿨럭...! 데스... 데스나이트 따위에게 이 내가....!!”

““고작 이 정도도 막아내지 못하는 녀석이 패왕을 자처하였더냐.””

“루반나의 왕이라 했더냐! 네놈은....! 뮐러도 아닌 네놈이 어찌 이런 검술을....!!”

““짐의 이명은 무패왕. 짐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패배를 겪어보지 못했노라.””

“허풍을...!”

레라지에는 저항했으나 소용없노라.

짐의 검이 놈의 살을 바르고 뼈를 취했노라.

‘.....’

이어지는 일기장의 내용 속에서.

그리드는 이십만대적검의 진정한 위력을 엿봤다.

열화판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십만대군 분쇄검 앞에서 레라지에는 말 그대로 분쇄 당했다.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쳐 보아도, 무구를 휘둘러 봐도 마드라의 분쇄검 앞에서는 평등하게 찢겨나갈 뿐이었다.

‘다시 봐도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구나.’

차원이 다르다.

그리드가 엿봤던 파그마와 브라함의 편린, 그리고 양반 가람으로써도 마드라에게는 비비지 못한다.

무패왕 마드라야말로 최강의 존재였다.

두근! 두근! 두근....!

그리드의 심장 박동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마드라를 향한 그의 동경심이 마드라와의 동화율을 부추겼다.

단 한 번의 패배도 몰랐던 자.

나는.... 무패왕 마드라다.

[★주의★ 일기장 속 마드라와 동화되어 그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한 상태입니다. 심리적으로 큰 불안과 고통을 느낄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시스템이 당신의 뇌파와 맥박을 체크합니다. 위험하다고 판단할 경우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을 봉인합니다.]

[위험! 위험! 마드라의 일기장을 봉인합니다!]

“....!”

일곱 번째 장의 끝.

마드라와 완전히 동화됐던 그리드가 번쩍 두 눈을 떴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그는 이를 악 물고 노력했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기 위해서.

자신은 마드라가 아니라 그리드임을.

그리드이기에 앞서서 신영우임을 자각하고자 사력을 다했다.

두근! 두근....! 두근....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혼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당신의 바이탈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였음을 확인합니다.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의 여덟 번째 장이 펼쳐집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허억, 허억.... 그래, 확인하겠다.”

@%$P)@!#$~$X##!!!!!!!

“.....”

이번 도전도 실패다.

이십만대적검 습득 후.

그리드는 일기장의 뒷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일곱 번째 장을 다시 읽었다.

‘인간이 아닌 것이 된’ 마드라를 체험하는 일은 실로 큰 고통이며 절망이었지만 감내했다.

그리드는 여덟 번째 장을 읽고 싶었다.

마드라를, 파그마를 더 이해하고 싶었고 삼십만대적검을 엿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덟 번째 장의 내용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왜?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리드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게 됐다.

‘혼돈기였나.’

번헨 열도를 침공한 대악마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마드라는 홀로 수백 년을 존재했었다.

그에게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으니 언어의 필요성을 점차 상실해갔을 것이다.

그가 일기장에 써내려간 사고(思考)는, 편의에 의해서 자기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미 언어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기의 여덟 번째 장은 마드라 본인만이 읽을 수 있다는 뜻.

‘일기장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건가?’

내심 예상은 했었다.

번헨열도에서 만난 데스나이트 마드라는 삼십만대적검을 사용하지 못했었으니까.

수백 년의 풍파를 겪은 언데드의 나약한 육신으로는 삼십만대적검의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사건을 고려해 봤을 때, 애초에 일기장에는 삼십만대적검이 서술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설령 있다고 해도 삼십만대적검을 익히려면 499레벨이 돼야할 텐데 어느 세월에 499렙을 찍겠어?’

499레벨.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최소 5~6년쯤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일 듯하다.

‘렙업 진짜 답도 없네.’

그리드가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399레벨.

경험치는 97퍼센트.

베리드를 잡고도 레벨 업을 못했다.

물론 레이드 파티원 중에는 레벨이 아주 높은 NPC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으니, 대부분의 경험치가 NPC에게 분배 됐을 것임을 고려해야한다.

파티원 간의 레벨 격차가 클수록 레벨이 낮은 쪽이 불리하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니까.

하지만 상대는 대악마 아니던가.

드롭하는 경험치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을 텐데, 솔직히 이건 너무 심하다.

‘1렙업도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399레벨이 된 시점부터 레벨 업 필요 경험치가 또 2배 이상 늘어난 것 같다.

‘이러다가 사냥으로는 레벨 업이 불가능한 시점이 오는 거 아니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그리드는 습관처럼 만들고 있던 속옷 제작을 중단했다.

재단 기술을 꾸준히 성장시킨 덕분에 남성용 속옷뿐만 아니라 여성용 속옷까지 제작할 수 있게 된 그의 손에는 의외로 예쁜 디자인의 브래지어가 들려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속옷 도둑으로 오해하고 변태라고 손가락질할 광경이었지만, 템빨단원들의 눈에는 지극히 익숙하고 평범한 광경이었다.

‘너무 큰데....’

‘지슈카 껀가.’

‘사이즈는 어떻게 아는 거지?’

‘그야 뭐.... 동거도 했던 사인데 뭐....’

‘지슈카 부럽다.’

‘....?’

템빨단원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그리드는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 목록을 불러왔다.

<재단 기술 단련>

전직 퀘스트

대장 기술에 이어서 재단 기술까지 습득한 당신의 발전가능성은 더욱 더 커졌습니다.

만약 대장 기술과 재단 기술을 결합하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대장장이로서 당신의 저변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재단 기술을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중급 재단 기술과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중급 재단 기술이 도리어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의 퀄리티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재단 기술을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과 결합하기에 손색이 없을 수준까지 단련시키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재단 기술을 고급 마스터까지 단련.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6. 장인급 재단 기술 개방.

그리드가 틈만 나면 남의 속옷을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할 수 없는 전직 퀘스트.

그리고 엄청난 보상.

처음 이 퀘스트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단지 장인급 재단 기술을 기대하고 열망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남 팬티 좀 그만 만들고 싶다.’

장인급 재단 기술은 더 이상 탐나지 않는다.

설령 장인급 재단 기술이 개화할지라도 대장기술에 응용할 계획이지 속옷은 그만 만들고 싶다.

그리드는 재단 기술보다도 ‘6개의 레벨’이라는 보상에 초점을 맞췄다.

‘이게 진짜 대박이었어.’

대악마를 잡아도 레벨 하나 올리기 힘든 사태가 도래한 지금.

무려 6개의 레벨을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의 가치는 천문학적이라는 표현도 손색없을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그리드는 판단했다.

‘너무 급하게 클리어하려고 하지 말자.’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가치가 오르는 보상이다.

아끼다가 똥 된다는 격언이 있듯이, 너무 묵혀두는 것도 안 좋겠지만 당장 조급하게 노릴만한 보상도 아니다.

그리드는 조금 더 느긋해질 필요가 있음을 자각했다.

‘당장 초점을 맞춰야할 부분은....’

일단 남은 경험치 3퍼센트를 올려서 400레벨을 달성하는 것.

그래서 모든 능력치를 4차 각성시키고 그 다음에 베리드의 부산물을 이용해서 아이템을 제작하는 게 옳다.

“좋아. 그 전에.”

계획을 세우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소리쳤다.

“스틱세이!”

진X구가 도라X몽을 부를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리드는 스틱세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이 들떴다. 스틱세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줄 거라는 신뢰가 있었다.

“하.... 수업 중인데 왜 부르십니까.”

템빨아카데미의 교장과 정령학 교수를 겸임 중인 스틱세이.

며칠 전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 개발한 ‘원거리 통신 이어폰’ 탓에 ‘일정 거리 안’에서 언제든지 그리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그가 한숨을 쉬며 등장했다.

그리드는 곧장 용건을 꺼냈다.

“레이단으로 이동시켜줘.”

“아니, 그쯤이야 도시 간 워프 시설을 이용하시면 혼자서도....”

“라인하르트의 마력이 낭비되잖아. 그거 다 돈이야.”

“라인하르트의 마력핵 충전도 어차피 제가 하고 있습니다만?”

“그, 그랬었나? 역시 스틱세이는 대단하다니까?”

“하아.... 매스 텔레포트.”

스틱세이는 바쁜 몸이다. 템빨국의 동량이 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게 그의 임무였으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고, 그리드는 순식간에 레이단으로 전송됐다.

평범한 플레이어는 평생 접해보지 못할 대마법의 낭비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구,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사막 도시 레이단.

예고 없이 발생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고 달려온 기사들이 그리드를 알아보고 부복했다.

마침 성에 있던 크리스도 곧바로 현장에 도착해 눈살을 찌푸렸다.

“워프 시설을 이용할 게 아니면 미리 귓속말이라도 보내던가. 적이 쳐들어온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미안, 미안. 다음에는 꼭 귓말 보낼게.”

웃으며 사과한 그리드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연금술 시설이 있는 방향이었다.

눈을 반짝인 크리스가 그리드의 곁을 쫓았다.

“베리드의 힘이 드디어 충전 된 건가?”

“응.”

대답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진짜배기 연금술의 위력을 감상해 보자고.”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