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8화
제국 최대 규모의 항구도시 갈레스트는 전쟁 중에 수인족들의 침공을 받았었다.
공작들의 발 빠른 지원 덕분에 사상자는 적었지만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은 자명한 사실.
황제 쥬앙데르크는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명목 하에 친히 갈레스트로 행차했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제국은 영원하리!!”
황제의 방문에 감격한 갈레스트의 백성들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환호했다.
사하란 황실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신앙처럼 절대적인 바.
황제는 신 그 자체로 받들어졌고 쥬앙데르크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신격.
역대 황제들이 인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굳이 이런 곳에서 만나자 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갈레스트 성.
성주에게 물러나라 명한 황제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황제의 곁에 선 베인은 기둥의 뒤편에 그늘진 장소를 지긋이 응시하였고, 그 그늘 속으로부터 황실의 골칫덩이가 등장했다.
3황자 브누아였다.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만, 어려서부터 쓸데없는 것들에 흥미를 품고 황제의 속을 썩여온 아픈 손가락.
모친의 죽음 이후로는 방황만 일삼았기에, 황제는 그를 이미 진즉에 포기했었다.
한데 이제와 할 말이 있다며 만남을 요청한 것이다.
“대사하란의 적법한 주인이자 대륙의 패자, 응당 영생의 축복을 얻으셔야할 위대하신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브누아는 탐탁찮은 시선을 보내오는 황제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것은 신하의 예법.
부친과 수년 만에 재회한 자식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황궁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으니 결례를 무릅쓰고 이곳까지 모시게 되었습니다.”
갈레스트는 전장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그 누구도 황제의 방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 만남의 장소로 적합했다.
대답을 듣고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황제의 안색을 살핀 브누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참에 민심도 얻고 좋지 않습니까?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예까지 친히 행차하신 폐하의 일화는 새로운 미담이 되어 제국 전역의 신민들이 폐하를 찬양하게 되겠죠.”
“빈정거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라. 우리가 은밀히 만나야할 이유가 무엇이냐? 네 녀석이 소환한 대악마가 대륙에 더 큰 화를 입히기 전에 토벌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함이냐?”
“베리드가 토벌 당했다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대악마 소환 의식에 필요한 기본 제물은 소환자의 영혼이다.
브누아 황자는 자신이 소환한 대악마들에게 영혼을 저당 잡혔었다.
하지만 얼마 전 그의 영혼은 해방됐다.
벨리알이 토벌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다.
베리드가 토벌 당했다는 증거였다.
“대악마의 토벌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대악마를 소환한 장본인이 바로 네 녀석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가는 세상천지가 네 녀석을 비난하고 증오할 터. 너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테지.”
“그 사실이 알려질 경우 피해를 입는 건 저뿐만 아니라 황실 전체겠지요. 제국신민들은 물론이고 세상 전체가 폐하를 의심할 겁니다.”
“...그리고 네가 대악마를 소환했다는 사실을 야탄교는 이미 알고 있고 말이지?”
“과연 폐하십니다.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고얀 놈. 야탄교와 결탁해서 짐을 협박할 작정이었다면 부질없게 되었다. 야탄교의 입은 이미 철저히 봉하였으니까. 이제 용건은 없겠지? 짐은 이만 물러나겠다. 네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구나.”
“한데.”
“....?”
황제의 방문 소식을 접한 갈레스트의 영주가 급히 준비한 옥좌.
갈레스트 성의 실용적인 내부구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화려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던 황제가 문득 행동을 멈췄다.
자신을 올려보는 브누아 황자의 눈빛에 깃든 지독한 원망과 분노를 엿본 까닭이었다.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린 브누아 황자가 으르렁거렸다.
“한데 왜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은 모르시는 겁니까?”
“....?”
세상에 황제가 모르는 일은 존재치 않는다.
황제의 의지는 황제가 없는 곳에서도 실현된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를 기만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사실.
브누아 또한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실상은?
황제는 자신의 바로 곁에서 일어난 일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황후 아리아떼를 해친 배후가 황비 마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고, 심지어 아리아떼의 빈자리를 마리로 대체했다.
나의 모친에게 향했어야할 사랑이 내 모친을 살해한 역적에게 향하게 된 것이다.
“당신은....”
“.....”
“당신은....! 당신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브누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언을 황제에게 쏟아 내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는, 황제가 나의 부친이라서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께서 사랑하셨던, 세상에 유일한 단 한 사람이 바로 눈앞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만큼은.
나 한 사람만큼은 지하에 계신 어머니를 슬프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유일하게 이룰 수 있는 효(孝)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여.
“....당신, 폐하께는 황후 아리아떼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브누아는 황제를 향한 원한과 분노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말해나갔다.
“.....!”
브누아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황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는.”
모든 진실을 고한 후.
브누아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멍하니 있는 황제에게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밝혔다.
“폐하가 지독히도 원망스럽습니다. 어머니께서 겪으신 고통과 분노를 폐하께서도 느끼게끔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하에 계신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면 그 또한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차라리 떠나겠습니다. 폐하께서 마리 황비를 처단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후, 그대로 이 지긋지긋한 나라와 작별하겠습니다.”
차별이 당연시되는 나라.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한 나라.
그렇기에 음모와 위해가 끊일 수 없는 나라.
굳이 마리 황비가 아니었어도, 어머니는 평생 위협에 시달리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원망과 저주로 들끓는 이 나라가 자초한 것이다.
더 이상 이딴 나라와는 얽히고 싶지 않다.
어차피 대악마를 소환한 죗값도 치러야한다.
“....그럼 이만.”
인간의 몸으로 지옥문을 연 대가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왼팔을 움켜 쥔 브누아 황자는, 조용히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났다.
황제는 차마 그를 붙잡지 못했다.
***
황도 타이탄 외곽.
작은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그렌할 공작의 초대형 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수십 채의 건물들이 풍비박산되어 쓰러졌고, 승마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타이탄의 전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던 전망대는 폭삭 내려앉았다.
그 중심에.
“쿨럭! 쿨럭, 쿨럭....!”
한 명의 장년이 홀로 버티고 있었다.
호흡할 때마다 피를 토하는 그의 근육질 상체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상처는 나라와 백성을 지켰던 흔적이며, 훈장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런 다 망가진 몸으로 언제까지 기고만장할 작정이셨소? 눈치껏 뒷방으로 물러날 것이지 뭘 그리 의욕을 앞세워서 제 무덤을 파신 겐지. 쯧쯧.”
4황자 에단.
외가의 도움을 등에 업은 그가 발굴에 성공한 마장기는 총 6대.
하지만 실제로 운용하고 있는 마장기는 5대에 불과하다.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는 수준의 <라이더>가 지극히 드물기 때문.
거인족의 유물을 인간이 완벽히 통제하는 일은 아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완벽한 통제를 급히 갈구할 이유가, 에단에게는 없었다.
평균 30초대의 운용이 가능할 뿐인 마장기라고 해도, 제국 최강자쯤이야 우습게 꺾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폐하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소?”
아직 운용이 불가능한 마장기 <트라우카>, 그리고 지발이 운용 중인 <레이더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는 마장기 <네바르탄>.
그 칠흑의 거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에단이 한껏 조소를 머금은 채 질문하자.
“마리 황비의 죄를 알리려 하였소.”
그렌할은 솔직하게 답했다.
사자와 표범을 닮은 마장기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당장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에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당당한 태도였다.
“눈은 좀 깔고 말하지? 수틀리면 뽑아버리는 수가 있는데.”
“차라리 죽이는 게 좋을 거요.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 어머니의 잘못이 만천하에 낱낱이 공개되고 말 테니.”
“응, 안 죽여.”
현재 에단의 입장에서 우려해야할 최악은 ‘모친이 저지른 죄가 밝혀져’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는 경우 딱 하나다.
하지만 그렌할을 죽여 버리면 더 큰 최악을 염려해야한다.
자기 자신 또한 모친과 마찬가지로 범죄자가 되어 황위계승서열 자체를 잃을 테니까.
하니 흥분을 가라앉혀야한다.
후우, 에단이 심호흡을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진정하자. 성격대로 하고 싶어도 참자.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건 황제가 된 이후에 시작하면 충분하다. 그때 가서 즐기면 된다....”
“풋...! 푸하하하하!!”
에단의 혼잣말을 듣게 된 그렌할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진심으로 재미있었다.
“4황자여, 그대는 본인이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믿소?”
“그럼 누가 돼?”
에단이 진지하게 반응했다.
“1황자 롤랑은 너무 유순하고 2황자 듀란달은 조급한 면이 있어 무능한데다가 ‘적기’조차 수준미달. 3황자야 거론할 필요도 없는 또라이인데 내가 아니면 누구를 황제의 재목이라 할 수 있겠소? 설마 황녀들? 바사라? 계집 따위를 황좌에 앉힐 수도 없잖소?”
“자질은 성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오.”
“성별에 따른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오이다. 당장 내 어미를 보시오. 멍청해서 일처리 하나 제대로 못해갖고 꼬리를 남겨놨고 그 탓에 내가 지금 이런 수고를 하게 됐잖소. 설마 피아로가 살아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쯧, 하여튼 계집들은 무능하단 말이지.”
“....인격 파탄자로군.”
“황제가 되는 자격 중에 인격이 포함되던가? 큭큭.”
“황자 전하!”
“음?”
이죽거리는 에단에게 기사 하나가 달려와 뭐라고 속삭였다.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검공이 모르이즈와 바사라의 신변을 확보했다는군. 이제 레이첼을 쫓으러 가야하니 우리의 담소는 여기서 끝내도록 합시다.”
슬쩍.
에단이 눈짓하자 기사들이 그렌할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지발을 통해서 마장기의 짧은 기동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렌할은 전투 내내 도주에 초점을 맞췄었고 그 탓에 완전히 진이 빠져있었다.
맥없이 포승줄에 묶이는 그렌할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던 에단이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설마 인간의 몸으로 마장기를 따돌리려 할 줄이야.... 레이더스가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였었나 봐. 뭐, 덕분에 귀공을 쉽게 생포하게 되었으니 탈영병에게 포상이라도 내려야하나.”
“도대체 우리를 붙잡아서 뭘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요? 폐하께서 귀환하시면 우리의 석방부터 명하실 테고 그때 가서 모든 진실이 밝혀질 텐데 이런 짓에 무슨 의미가 있소?”
“누구에게나 계획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소. 걱정일랑 마시오. 내가 당신들을 알아서 잘 써먹어줄 테니. 아, 그 전에.”
스윽-!
“....!?”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동반되는 어둠.
에단이 슬쩍 그은 칼에 두 눈을 잃은 그렌할이 비명을 삼켰다.
에단은 웃고 있었다.
“눈 깔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