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50권 - 2화
““네노옴!””
““괘씸한...!””
““크아아아아!!””
쉴 틈 없이 연계되는 검무의 세례 속에서, 베리드는 탄생 이래 최대의 굴욕을 느꼈다.
긴 허리에 자상을 입고 포효한 그가 안력을 돋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는 그리드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쿠와아앙-!
바람이, 폭풍으로 변한다.
그리드의 신속이 만들어낸 파장이다.
그리드가 시야에서 사라진지는 오래였다.
이내.
퍼엉!!
천둥소리와 함께 다시 나타난 놈은 검무의 마지막 동작을 밟고 있었다.
“극(極).”
서걱!
베리드의 정수리를 베어버리는 그리드.
그의 피부는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묵색의 마기를 피어 올리며 입 꼬리를 사악하게 비틀고 있었다.
흑화다.
지난 세월 동안 누적 된 악마력이 강력한 무력으로 치환 돼 그를 강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아모락트여!’
그리드의 귀에 달린 <다크버스의 귀걸이>를 눈치 챈 베리드가 꽈드득, 이를 갈았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
오직 자신만이 야탄 신의 충실한 하수인이라고 자처하는 그 괘씸한 놈은, ‘모든 악마를 위한다.’는 돼먹잖은 명목으로 인간들에게 다양한 힘을 내려왔다.
야탄교 신도들이 인계를 장악할 수 있게끔 지옥의 비보들을 건넸고 저 귀걸이 또한 그중 하나였다.
‘어리석다!’
정녕 멍청한 짓이다.
인간에게 힘을 줬기에 이런 사달이 발생한 것이다.
기껏 얻은 도구를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고 빼앗긴 어떤 빌어먹을 인간 탓에 내가 지금 이런 굴욕을 겪고 있다.
‘아모락트, 아모락트! 아모락트여!!’
네놈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네놈이 인계에 남긴 지옥의 비보들이 변수가 되어 눈앞의 변종을 탄생시켰다!
‘네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굴욕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벨리알은 그리드의 진화 이유가 순전히 흑화에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부정이 그를 각성시켰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드가 서사시를 완성하고 격이 상승함과 동시에 흑화를 발동시켰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
퍼엉-!
마침 그리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곧바로 <극살(極殺)>의 마지막 보폭을 밟았다.
[브라함식 웨폰 인챈트의 술식이 발동합니다.]
[현재 착용 중인 무기의 공격력이 5초 동안 60퍼센트 상승하고 20퍼센트의 방어력 관통력이 부여됩니다.]
본래, 파그마의 검무에 귀속 된 웨폰 인챈트 마법은 ‘검무가 유지되는 시간 동안’ 무기의 공격력을 50퍼센트 올려줬었다.
하지만 서사시의 효과로 강화 된 그리드의 검무는 웨폰 인챈트의 효과를 상승시켰고 훨씬 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콰아아아아아─
인챈트 웨폰에 휩싸인 열망의 무아검이 백열한다.
그리드의 검로가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궤적을 남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됐다.
하지만 베리드에겐 더없이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대체 그 마법은....!!””
그리드가 검무를 사용할 때마다 자연 발동하는 마법들은 한낱 인간의 것이라 보기 힘든 묘리를 담고 있었다.
워낙 기초적인 마법들뿐이라 위력 그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방어력과 저항력이라는 개념을 무위로 되돌리며 베리드의 연금술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단언컨대, 베리드는 오늘처럼 많은 상처를 입어본 경험이 여태 단 한 번도 없다.
서걱!
푸욱!
푸줏간에 걸린 고기마냥 선홍빛을 띄는 베리드의 몸이 베이고, 찔린다.
한 움큼 피를 토하는 녀석의 생명력은 어느새 45퍼센트 미만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리드가 등장했던 시점의 녀석은 50퍼센트가 조금 넘는 생명을 지니고 있었으니, 여태까지 그리드 혼자서 억 단위의 데미지를 입혔다는 뜻이 된다.
누구 하나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기대감에 휩싸였다.
지난 수개월 동안 플레이어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대악마가 토벌당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드디어 다시 찾아올 평화를 반기고자 준비했다.
쩌엉-!
쩌저저저저정!!
<대장장이의 분노>까지 활성화시킨 그리드가 더욱 더 베리드를 몰아붙였다.
베리드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연금술로 수백 개 금속 가시를 연성한 녀석이 그것을 자신의 주변에 둘러쳤다.
푸우욱!
그리드의 검이 베리드를 베는 순간 금속의 가시들이 솟구치며 그리드의 몸을 꿰뚫었다.
“윽....!”
[19,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반사 데미지가 그리드를 단번에 넝마로 만든다.
하지만 그리드는 멈추지 않고 재차 베리드를 공격했다.
회전하며 검을 휘두르는 그가 2명으로 나뉘었다.
까강!!
푸우욱-!
재차 발생하는 반사 데미지에 새로운 상처를 입는 그리드.
이를 악 물고 베리드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는 그가 4명으로 나뉘었다.
<암흑의 룬>에 귀속 된 벨리알의 힘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4개의 시야를 갖게 된 그리드는 혼란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시야를 관조하며 본체와 분신 전부를 일사분란하게 통제했다.
“연살화극(聯殺花極).”
“연살화극(聯殺花極).”
“연살화극(聯殺花極).”
“연살화극(聯殺花極).”
빛의 정령이 <섬화>를 발동하는 사이에 베리드를 고립시킨 네 명의 그리드가 동시에 검무를 펼친다.
[브라함식 웨폰 인챈트의 술식이 발동합니다.]
푸욱-! 푹푹!!
푸푸푸푸푸푹!!
백열하는 네 자루의 검이 총 28회의 찌르기로 베리드의 전신을 난도질했고.
““....!””
베리드는 종전과 비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이었다.
““....!?””
수십 줄기의 윈드 커터가 금속의 가시 장벽을 찢어발겼다.
전격을 머금은 꽃잎들이 가시 장벽의 틈새로 내려앉아 베리드의 상처들 위로 스며들었다.
이어서.
콰앙-!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그리드와 베리드가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싸웠다면, 지반이 무너지고 협곡이 매몰됐을 것만 같은 기세의 폭발이었다.
[크리티컬!!]
[칭호, <한 방에 한 놈!> 효과로 크리티컬 데미지가 40퍼센트 추가됩니다!!]
[대상에게 8,990,6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899,06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899,06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899,06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신장>의 효과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연살화극의 전개 직후.
검을 회수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던 4명의 그리드가 신속을 발휘하여 재차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곧.
“연살화극(聯殺花極).”
“연살화극(聯殺花極).”
“연살화극(聯殺花極).”
“연살화극(聯殺花極).”
조금 전과 동일한 보폭을 밟으며 동시에 다시 등장했다.
““....전설.””
쇄도해오는 4자루의 검을 보면서, 베리드는 깨달았다.
눈앞의 인간은, 마족의 힘을 빌려서 진화한 게 아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와.... 으아아....』
전 세계 모든 방송사의 중계진은 벌써 몇 분 째 본분을 잊고 있었다.
시청자들에게 전황을 해설해주기는커녕 버벅거리거나 탄성만 내지르길 반복했다.
이건 마치 시청자의 태도다.
시청자들의 비난이 쇄도할 것을 직감한 PD들은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들의 걱정과 달리 중계진을 비난하는 시청자는 무척 적었다.
시청자들 또한 중계진과 마찬가지로 넋이 나가있었기 때문이다.
무쌍을 찍는 그리드의 전투에 완전 몰입한 시청자들은 중계진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중계진이 해설한답시고 떠들었다면, 도리어 소음으로 느끼고 음소거로 돌렸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채팅창 렉걸린 거임?
2차례의 연속 폭발 이후.
베리드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어느 한 중계방의 채팅창에 한 줄의 채팅이 떠올랐다.
그것이 신호였다.
-미쳐따.
-갓갓!
-나 그리드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번엔 갓리드 인정....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청자들의 채팅이 채팅창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스트리밍 사이트조차도 갑자기 올라오는 텍스트의 범람을 감당하지 못하고 렉이 발생했다. 수천 개의 중계방이 일제히 혼선을 겪었다.
화면 속.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하는 그리드의 피부가 혈색을 띠고 있었다. 검게 칠해졌던 흰자위도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중이다.
흑화가 끝난 것이다.
분신까지 회수한 그리드는 거의 탈진 상태처럼 보였다.
템빨콘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지닌 백마가 그를 자신의 혀로 핥아주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딱히 불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드가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아직 그리드의 곁에는 칠공작들이 남아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대로 그리드가 베리드를 레이드해주리라 믿었다.
““.....””
땅에 처박힌 채 움찔거리던 베리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까지 절대자로 인식되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줬던 그가 완전히 넝마가 된 채 비틀거렸다.
생명력 게이지는 여전히 40퍼센트대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더없이 초라한 모습이다.
반면 그리드의 곁에는 무려 4명의 칠공작과 대륙제일창 키리누스, 그리고 크라우젤 일행과 지발이 있었다.
곧 끝난다.
저 빌어먹을 악마 놈이 잿빛으로 산화하기까지 이제 머지않았다.
사람들의 믿음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몸은 이제 못 쓰겠군.””
베리드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분명히 베리드의 목소리였다.
한데 베리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그리드도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뒤늦게 눈치 챘다.
지금 들려온 이 목소리의 주인은, ‘저것’이다.
“.....!”
시청자들이 경악했고 그리드는 경계했다.
병든 말.
베리드가 처음 등장했던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베리드를 등에 태우고 있던 녀석이 주둥이를 움직였다.
““나름 애용하던 인계용 의복이었는데 말이지.””
쩌억-
말이.
다름 아닌 베리드가 주둥이를 크게 찢었다.
마치 고무를 잡아당긴 것처럼 길게 늘어난 입이 2미터가 넘는 크기로 벌어지더니 그대로 ‘베리드였던 것’을 집어삼켰다.
콰작콰작!
살이 분쇄되고 뼈가 부러진다.
베리드의 입속에서, 베리드였던 분신은 여물처럼 씹어 삼켜졌다.
““꺼억.””
베리드가 트림 한다.
흰색의 혈액이 기다란 주둥이를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뿌득!
뿌드드득!!
베리드의 골격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어깨와 골반이 좌우로 크게 벌어지면서 왜소한 몸 곳곳에 비대한 근육들이 형성됐다. 앞발의 발굽으로부터 3개의 손가락이 뻗어 나왔고 뒷다리는 이족보행에 적합하게끔 두꺼워졌다.
이내 두 발을 딛고 서는 녀석의 키는 무려 4미터가 넘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리드를 집어삼켰다.
말대가리가 그리드를 내려 본다.
““내가 본래의 육체를 갈구하도록 만들었으니,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당대의 전설은 모두 미완성이라 들었는데 아니었구나.””
3번째 페이즈의 발동이었다.
다소 비리비리해 보였던 기존의 모습과 달리, 말의 대가리에 인간의 몸을 지닌 베리드의 실체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선사했다.
-....ㅈ나 세 보이는데....
기껏 희망을 품었던 시청자들이 다시금 근심에 휩싸인다.
그리고 베리드는 증명했다.
맞는 옷을 입었을 때의 자신은, 이만큼이나 강하다는 사실을.
퍼엉-!
기존에는 ‘재료의 수집’과 ‘물질의 재구성’이라는 단계를 밟으며 발동했던 연금술이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완성되어 그리드에게 쏘아졌다.
금속의 창은 이미 그리드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흑화 상태의 그리드가 보여줬던 것과 비견되는 신속이, 베리드의 연금술에 담겨있었다.
<용의 날개>를 꺼내 회피하려던 그리드가 행동을 멈췄다.
까가강!!
어느새 날아온 수십 자루의 검이 자신을 에워싸며 지켜주었으니까.
““....하.””
베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이 안 되는 용모의 인간이 그리드의 곁에 서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베리드도 알고 있다.
검성.
지닌 이름의 무게는 경계할만하나, 고작 그뿐인 놈.
““당신은 저의 상대가 안 됩.....?””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던 베리드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언제부터지?
그리드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자루의 검이 왜 나의 몸에 박혀있는 거지?
당황하는 베리드를, 크라우젤은 무시했다.
거리를 측량할 수 없는 은하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에는 그리드의 모습만이 담겨있었다.
“뒤는 우리에게 맡기고 잠시 쉬어라.”
말하는 크라우젤의 곁으로.
저벅.
피아로와 키리누스, 그리고 칠공작들이 나란히 다가와 섰다.
단 한 사람.
오직 레이첼만이 여전히 멀리 선 채 피아로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전하께서 저보다 더 강해지실지언정 전하는 제가 지킬 것입니다.”
피아로의 선언에.
“그래.”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부탁한다.”
상대는 크라우젤.
나와 달리 영리한 사람이니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지옥 소환’ 페이즈가 남아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며, 유라와 루비가 있는 템빨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베리드를 최대한 소모시켜놔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래, 내게도 소중한 분이다.”
피아로를 지키고자하는 마음이, 그에게도 있었다.
툭.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주먹이 맞부딪친다.
이어서.
“심검(心檢).”
아직은 불완전한, ‘상상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검술을 크라우젤은 검성의 자격으로 구현했다.
푸화하하하학-!
베리드의 어깨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