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23화 (913/1,794)

템빨 49권 - 21화

『가짜가 아닙니다. 저들은 칠공작이 맞습니다.』

독일인 요하네스는 세기의 피아니스트로 주목받았던 젊은 천재다.

하지만 그는 끔찍한 사고를 겪게 된다. 영국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에 휘말려 한쪽 팔과 두 다리를 잃은 것이다.

물론, 현대 의학은 그에게 훌륭한 의수와 의족을 선물해 주었다.

요하네스는 실제와 거의 차이가 없는 새 팔과 다리를 얻었다.

그래,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요하네스는 본래 자신이 지녔던 감각을 99퍼센트까지 복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100퍼센트 구현하지는 못했다.

스스로의 연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젊은 천재에게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좌절 끝에, 요하네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한데.

『제가 황실 연회장에서 직접 저들을 보았었습니다.』

요하네스는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했다.

Satisfy에서 온전한 육체를 갖게 된 그는 음악가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그 무한한 재능을 마음껏 뽐냈다.

악장(樂匠)을 꿈꾸며, 급기야는 실력을 인정받아 사하란 황실 악단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는 제국의 사교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실물을 볼 기회조차 없는 대귀족들의 말투와 습관까지 상세히 기억할 정도로.

<베리드 레이드>를 중계 중인 독일의 한 방송사에 패널로 출연한 그가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렌할 공작과 바사라 공작은 칠공작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권력가입니다. 그렌할 공작의 영토가 공작들의 영토 중에서 가장 크다고 들었고, 바사라 공작은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지요. 또한 모르이즈 공작을 포함해 세 사람 모두 패배를 모르는 역전의 용사라 하더군요. 그들 모두 자긍심이 대단하죠.』

요하네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마침 카메라가 그렌할 공작의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요하네스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그렌할 공작은 오직 황제에게만 고개를 숙입니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은 황제 단 한 명뿐이라는 뜻이겠지요.』

『허, 저런. 다른 황족들이 괘씸하게 여기겠는걸요?』

『아니요. 그렌할 공작은 개국공신의 후손인 데다 자신 역시 숱한 공적을 세워 온 인물입니다. 더군다나 실제로 거느린 세력이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보다 대단하다고 하니 황자들조차도 감히 그에게 반감을 품지 못합니다. 도리어 황자들이 그렌할 공작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소문이 돌 정도죠.』

카메라가 이번에는 모르이즈 공작의 모습을 담았다.

『모르이즈 공작은 뭐랄까… 건달 같은 사람입니다. 품격이 부족하고 난폭하죠. 다른 귀족들과는 성격이 달라요. 그가 종종 입궁할 때면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죠. 그는 정말이지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오늘만 사는 사람 같아 보일 정도로.』

끝으로 카메라가 바사라 공작의 모습을 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기 때문인지, 카메라는 유난히 오랫동안 그녀에게 멈춰 있었다.

『그녀는 가장 품위 있는 사람입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신중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온화하죠. 황궁의 모두가 그녀를 존경합니다. 한데 늘 눈을 감고 다녀서 장님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네? 지금은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상한 겁니다. 세 공작들의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그들이 타인을 향해서 저토록 경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

이쯤 돼서야 해설진이 사태를 파악했다.

시청자들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제국과 적대하고 있는 그리드가 어째서 칠공작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 표면적인 상황에 주목하고 있었지만, 칠공작들의 성격을 알고 있는 요하네스는 보다 심층적인 부분을 주목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들은 늘 그리드에게 감탄해 왔죠. 그리드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그리드는, 칠공작들의 상상조차 뛰어넘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도대체 어떤 점에서 칠공작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는 거지?

이십만대군 분쇄검.

이름부터 요란한 그 스킬은 분명 대단한 위력을 선보였다.

크라우젤 일행을 덮쳐 온 수만 자루의 칼날 비를 말 그대로 분쇄시켜 버렸으니까.

하지만 ‘스킬을 상쇄시킨다.’는 개념을 지닌 스킬은 이미 종종 목격돼 왔다.

물론 흔히 볼 수 있는 스킬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칠공작들이다.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어왔을 그들에게도 이십만 분쇄검이 그토록 특별한 경지의 스킬이었을까?

장님이라는 오해를 살 정도로 늘 눈을 감고 다녔던 바사라가 눈을 뜨게 만들 정도로?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다.

『스킬을 스킬로 상쇄시킨다는 공식 자체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닐 텐데요. 물론 베리드의 스킬이 여태껏 보지 못한 대단위 스킬이긴 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스킬’로 인한 결과물인 이상 이론적으로 충분히 상쇄가 가능하잖습니까? 키리누스와 레이첼이 풀 컨디션 상태였다면 그들 역시 무형지기를 이용해서 칼날 비를 모조리 없앨 수 있었을 테고요.』

『음… 그리드 등장 후로 레이첼이 계속 굳어 있는 걸 보면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레이첼의 반응이 특히 이상하군요? 저건 완전히 귀신 본 표정인데요?』

『…일단 더 지켜보도록 하죠.』

전문가들은 괜히 함부로 추측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그리드와 관련된 일이다.

알량한 지식과 정보를 믿고 떠들었다가 또 추측이 틀려서 된통 욕먹는 수가 있었다.

반복 학습의 힘이라는 것이다.

시청자 채팅창은 패널들 밥값 안 하냐는 비난으로 도배되고 있었으나, X문가라는 욕설을 듣고 자존심이 처참히 박살 나느니 차라리 밥값 못한다고 욕먹는 게 나았다.

***

[이십만대적검의 반동으로 내상을 입었습니다.]

[50퍼센트의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큭……!”

<이십만대군 분쇄검(열화판)>Lv.1

반월의 검광을 날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공격력의 200퍼센트 피해를 입히고 적의 공격 스킬을 분쇄합니다. 분쇄된 스킬은 효력을 잃고 사라집니다.

단, 분쇄하는 스킬의 종류가 많고 위력이 클수록 반동이 커집니다.

스킬 자원 소모:마나 8,000, 검기 50. 또는 투기

스킬 반동 효과:생명력 하락(최소 10퍼센트 최대 50퍼센트)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분

십만과 이십만.

단위부터 다르다 싶더니 위력도 상상 초월이다.

십만대군 봉쇄검과 마찬가지로 시야 단위 범위를 지닌 주제에 피해량은 봉쇄검의 10배다.

물론 상태 이상 ‘봉쇄’를 유발하진 못했지만 적의 공격 스킬을 ‘분쇄’해 버린다는 막무가내의 부가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확률이 아닌 확정 효과다.

‘미쳤다.’

여태까지 이런 스킬은 없었다.

이건 진짜 역대급 개사기 스킬이다.

생각하며, 황급히 물약을 꺼내 마신 그리드가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대충 손으로 닦아 냈다.

대량의 생명력 소모라니……. 아무래도 부담이 크다.

‘그나마 쿨 타임은 마음에 드네.’

30분도 물론 길다.

엄청 길다.

30분 이상 유지되는 전투는 지극히 드물기 때문에, 실전에서 2번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스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십만대군 봉쇄검의 재사용 대기 시간도 30분이다.

그보다 상위 스킬인 이십만대적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30분이라는 건 그나마 위안이었다.

‘쿨 타임 긴 스킬은 익숙해.’

초(超)만 해도 40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지녔다.

남들에게 그리드는 무적의 존재일 테지만, 실상 그리드는 온갖 약점과 고충에 시달려 온 인물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 같은 것에 일희일비할 짬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한테는 신장도 있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초기화시켜 주는 패시브 스킬.

체감상 발동 확률은 50퍼센트에 훨씬 못 미쳤지만, 뭐 어찌 됐든 보험이긴 하다.

‘그건 그렇고.’

스윽.

뜨거운 시선을 느낀 그리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칠공작들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패왕의 검술을 목격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하다.

한동안 제국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무패왕의 후예가 설마 템빨왕이었을 줄이야, 라고 오해하면서 머릿속으로 온갖 혼란을 느끼고 있을 테지.

그리드가 단언해 보였다.

“루반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무패왕의 후예와 나는 동일인이 아니오.”

하지만 발할라에서 적기사 로렉스를 살해하고 카일의 한쪽 팔을 빼앗아 간 무패왕의 후예는 내가 맞다.

라는 설명을, 그리드는 굳이 늘어놓지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확실히. 아니겠네요.”

지혜로운 바사라는 그리드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즉시 간파했다.

무패왕의 후예가 한동안 소란을 일으켰을 당시 템빨왕은 무엇을 했었는가.

그 행보를 역으로 추적해 보고 진위 여부를 가린 것이다.

물론 그리드에게 호감이 없었다면 굳이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노력조차 안 했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드가 공작들 앞에서 무패왕의 검술을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공작들과 쌓은 신뢰 관계를 믿었기 때문이다.

국대전이 끝나고 지난 수개월.

이런저런 사건에 휩쓸려 온 그리드는 수많은 성과를 거뒀다.

이십만대적검을 습득할 수 있는 레벨을 달성했고, 템빨포 창조, 비급 획득, 검무 강화 등의 업적을 이뤘다.

종래와 비교해도 두드러지는 급성장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가장 큰 의미를 두는 발전은 개인의 성장보다 인맥의 확대에 있었다.

칠공작의 호감을 얻은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고, 공작들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지금 타이밍에서는 무패왕의 검술을 보여 주는 게 도리어 좋지.’

제국이 두려워하고 적대하는 무패왕.

원래라면, 그리드가 무패왕의 후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제국은 그리드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리드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게 된 칠공작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힘을 그리드가 지녔다는 점에 도리어 기꺼움을 느낄 터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무패왕의 후예… 아니, 후예가 될 자격을 얻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 최소 두 명 이상이었던 거군요.”

“그중 하나가 그리드 전하라는 사실이 든든하고 기쁠 따름입니다.”

“…하하.”

다행히 잘 풀렸다.

안도하며 미소 짓는 그리드의 귓전에 기괴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잡종이군요.””

“잡종?”

그리드가 베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공 없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녀석의 피부는 썩은 폐의 색깔을 하였다가 창백한 푸른색으로 바뀌었고, 이내 또다시 선홍색을 띠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협곡을 잠식하고 있는 이 지독한 악취는 지네처럼 긴 녀석의 허리에 송송 뚫린 작은 구멍으로부터 피어오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절로 혐오감이 드는 모습이다.

그래, 혐오감.

그리드의 감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공포심은 품지 못했다.

무신 제라툴을 만나고 온 직후인지라, 대악마라고 해 봤자 별 감흥이 없는 것이다.

그리드의 감정을 읽은 베리드의 입가가 뒤틀렸다.

““파그마, 브라함, 마드라, 뮐러……. 온갖 존재의 힘이 당신의 속에 잠재되어 있군요. 과연 교만할 만합니다.””

술렁.

전대 전설의 이름이 무려 넷이나 거론되었다.

현장의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전 세계 시청자들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힘이 정녕 당신의 것일까요? 아니죠.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은 그들의 힘을 그저 잠시 빌렸을 뿐이지 직접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니까요. 자격을 상실하는 순간 결국 다시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그때가 지금 당장이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만 번의 거짓이 진실을 왜곡합니다.]

[퍼스트 클래스 <파그마의 후예>를 일시적으로 상실합니다.]

[<파그마의 후예>와 관련된 모든 효과와 스킬이 사라집니다.]

[세컨드 클래스 <지공>을 일시적으로 상실합니다.]

[<지공>과 관련된 모든 효과와 스킬이 사라집니다.]

[칭호 <영웅왕>을 일시적으로 상실합니다.]

[<영웅왕>과 관련된 모든 효과와 스킬이 사라집니다.]

[스킬 <십만대적검>과 <이십만대적검>을 일시적으로 상실합니다.]

“……!?”

벼락에 얻어맞은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동상처럼 굳었다.

상태 이상으로 분류하기도 애매한.

그렇기에 저항조차 차단되는 절대 판정.

시스템 그 자체를 왜곡시켜 버리는 베리드의 권능 앞에서 그리드는 혼란을 느꼈다.

베리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으세요.””

번헨 열도에서 배수의 진을 펼쳤던 파그마는 대악마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이다.

그의 적통인 그리드는 제아무리 베리드라도 간과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리드는 벨리알과 아스타로트의 힘을 품고 있었다.

이미 2명의 대악마를 토벌했다는 증거다.

놈을, 베리드는 최우선 순위로 없애고자 했다.

그리고 그건 베리드 입장에서 굉장히 손쉬운 일이었다.

대상에게 1회에 한해서 반드시 적용시킬 수 있는 ‘거짓’은 대상을 철저히 무력시킬 수 있는 필승의 도구였으니까.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베리드가 그리드라는 인물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발생한 변수였다.

[서드 클래스 <서사시의 마검사>가 퍼스트 클래스를 대체합니다!]

[<(브라함의 호의가 깃든) 검호 파그마의 검무>가 활성화됩니다!]

신화가 될 서사의 주인공.

파그마와 브라함의 계승자.

그러므로 파그마의 후예를 초월하는 격.

지금 이 순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첫 번째 서사시를 써 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테일렌 협곡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파그마의 검무.”

그리드는 도리어 완전해졌다.

“초연화(超聯花).”

““…어찌?””

[그는, 붉은 피로 염색한 협곡에 푸른 꽃잎을 뿌렸다.]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가 그리드를 묘사한다.

요하네스의 머릿속에 악상이 떠올랐다.

위대한 서사시의 서막이었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