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9권 - 19화
크라우젤 일행의 합류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우선, 요새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악마들을 기다리다가 요격할 뿐이던 하켄 왕국의 병사들이 요새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협곡 사이 구불거리는 길목마다 서서 악마들과 싸우는 크라우젤 일행을 도왔다. 더 이상 거북이처럼 웅크리지 않고 맹수처럼 용맹하게 악마들을 토벌했다.
“죽어! 이 악마새끼들!”
“지옥으로 꺼져!!”
“우리들의 땅에서 사라지라고!!”
키에에엑!!
거센 반격.
악마 군단의 행렬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제 악마들은 성벽 가까이 붙지 못했다.
그러자 산성액과 불을 내뿜는 악마들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마다 줄어들었던 성벽의 내구도가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발의 스태미나처럼 말이다.
“포병대, 엄호!”
성벽 위.
스태미나가 회복되는 동안 잠시 전장에서 물러난 지발은 직접 병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하켄 왕국의 귀족 출신이자 7대 길드의 수장이었고, 현재는 또 제국의 군인인 그의 통솔력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궁병대와 포병대가 지발의 명령을 받고 사격할 때마다 전쟁터의 아군 병사들이 목숨을 구원 받았다.
물론, 모두를 지킬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엄호오! 엄호 사격하라고!!”
“아, 아직 장전 중입니다....!”
‘빌어먹을!’
활이라는 무기는 궁사의 솜씨와 풍향에 너무 큰 영향을 받았고, 대포라는 무기는 연사가 불가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지발과 병사들은 악마에게 잡아먹히는 아군 병사를 때때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큰 분노와 증오를 느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 베리드에게 지독한 살심을 품었다.
‘저 개새끼.’
지발의 시선이 지평선을 등지고 있는 소규모 격전지로 향했다.
성벽 아래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베리드와 키리누스, 그리고 레이첼이 치열한 공방을 펼치는 중이었다.
스르륵-
물 흐르듯 선회하는 키리누스의 창술과,
까강! 까가가가강!!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폭발적인 기세를 자랑하는 레이첼의 창술.
일견하기에도 극의에 오른 두 사람의 창술이 베리드를 압박했다.
베리드는 그들의 협격을 연금술로 방어하며 반격을 시도했으나.
파사삭-!
키리누스와 레이첼의 무형지기는 베리드의 연금술이 형(形)을 이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베리드가 연금술을 발동할 때마다 산산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연금술의 무용(無用).
무력감에 휩싸인 베리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의장용 검을 뽑아 쥐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채앵-!
조잡하고 얄팍한 검으로 레이첼의 붉은 창을 막아낸 베리드가 동공 없는 흰 눈깔을 뒤룩뒤룩 굴렸다. 마치 비웃는 듯했다.
““의념의 힘이라는 건 무한하지 않을 텐데요.””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서대륙 최고를 논하는 키리누스와 레이첼쯤 되는 고수들일지라도 무형지기를 연속으로 사용하는 건 큰 부담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무형지기가 베리드의 연금술을 흩어지게 만드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베리드의 연금술 생성 속도가 그들의 무형지기 발동 속도를 압도하게 될 것이었다.
아니, 속도를 따라잡히기 전에 두 사람 모두 자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키리누스와 레이첼의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으니까.
하지만 키리누스와 레이첼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우리의 목적은.”
“너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알아서 적당히 하겠네.”
“암, 그렇고말고.”
““....?””
어느새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
매일 같이 창을 맞대며 서로를 호적수로 인정하게 된 키리누스와 레이첼은 어느새 죽이 척척 맞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베리드 앞에 선 이유를 잊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만의 승부.
베리드에게 누가 더 많은 상처를 입혔느냐가 관건이지, 목숨을 바쳐서 베리드를 토벌할 계획은 없다.
그들은 적당히 상황을 봐서 빠질 것이다.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되도록이면.
‘최대한 오래 버텨야겠지.’
푸욱-!
단련과 수행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매우 먼 종족.
타고난 강함을 앞세워 군림할 뿐인 대악마 베리드의 어설픈 검술을 쳐내고 녀석의 몸통에 창을 꽂아 넣은 두 사람이 힐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크라우젤이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악마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키리누스와 레이첼은 적어도 크라우젤에게만큼은 시간을 벌어줄 각오였다.
크라우젤이 악마군단을 토벌할 때까지 자신들이 앞에서 버텨줄 계획이었다.
키리누스에게 크라우젤은 유일한 제자이자 친구였고.
레이첼에게 크라우젤은 ‘내 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꽤나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기에.
‘이런 곳에서 죽게 놔둘 순 없지.’
끄덕.
눈빛을 교환한 키리누스와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동률의 실력을 지닌 두 사람.
그렇기에 더욱 더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그들이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등을 맡겼다.
“월하창술 오의.”
“드하켈식 창술 오의.”
“월식.”
파칭-
원형을 그린 키리누스의 창이 주변의 빛을 집어삼킨다.
경로를 읽을 수 없다.
“샐러맨더!”
화르르르르륵!
직선으로 쏘아지는 레이첼의 창이 노란 불꽃을 토했다.
알고도 막을 수 없다.
““....!””
베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을 베이고 몸부림치는 녀석의 심장이 화염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베, 베리드의 생명력이 크게 줄어듭니다!』
각국의 해설진이 침을 튀겨가며 상황을 중계했고 모든 중계방 채팅창들은 난리가 났다.
경악, 엄지, 박수 등의 이모티콘이 잔뜩 도배됐다.
대륙제일창 키리누스와 창성 레이첼의 실력은 소문 이상이었다.
대중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최강’이라는 개념을 두 사람이 동시에 부셔버렸다.
수 년 전 벨리알 레이드에서 활약했던 템빨국의 농부조차도 저들 앞에서는 하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난 몇 년 동안 피아로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기에 이 깨달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내가 좀 더 세게 때린 거 같은데.”
“내가 약점을 노출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
“어쨌든 내가 더 많은 피해를 입힌 건 맞잖아?”
“내 덕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공헌도는 내 쪽이 더 높다 이 말일세.”
“얼굴이 두껍네?”
“그대야말로.”
키리누스와 레이첼은 피를 토하며 뒷걸음치는 베리드를 쉴 틈 없이 몰아붙이면서도 언쟁을 펼쳤다.
남들이 봤을 때는 유치한 말싸움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무려 2달 이상 내지 못했던 승부의 향방이 걸린 문제였으니 안 중요할 수가 없다.
콰차착-!
2개의 창대가 베리드의 턱과 옆구리를 세차게 때린다.
커다란 충격을 받고 말에서 떨어진 베리드가 지면에 얼굴을 처박았다.
꿈틀꿈틀, 비쩍 마르고 길쭉한 베리드의 몸이 고통에 움찔거렸다.
천하의 대악마가 단 두 명의 인간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미 앞서 베리드 레이드에 도전했던 수천, 수만의 랭커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얻을 수 있던 유의미한 결과를 키리누스와 레이첼은 너무나도 손쉽게 쟁취했다.
수준 차이라는 것이다.
300레벨 플레이어에게 100레벨 플레이어 수백 명이 덤벼봤자 무의미한 것처럼, Satisfy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닌 개인의 강함이다.
최상위 보스를 상대할 때만큼은 키리누스와 레이첼 두 사람이 어지간한 랭커 수천보다 더 나았다.
키리누스와 레이첼 두 사람이 수천 명의 랭커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힘들 것이고.
뭐, 어찌됐든.
키리누스와 레이첼은 대악마 베리드를 상대로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템빨국이 벨리알을 토벌했을 당시, 사하란 제국이 템빨국을 크게 대단하다 추켜세우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절정 강자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제국 입장에서는 대악마를 두려워할 필요가 하등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결국 오만이었다.
이미 제국은 <아스타로트>에게 낭패를 겪었던 바가 있지 않은가.
대악마는 인류의 천적.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당신들 말입니다.””
입에 들어온 흙을 잘근잘근 씹으며, 길쭉한 몸을 서서히 일으킨 베리드.
그가 나란히 서있는 키리누스와 레이첼에게 질문을 던졌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당신들은 저의 사냥감에 불과할 텐데요.””
“하?”
레이첼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그녀도 알고 있다.
자신과 키리누스가 베리드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기술과 체력이 고갈될 테니까 서서히 상황은 역전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베리드의 주특기로 보이는 연금술을 봉할 수 있는 지금만큼은 우리가 전투를 주도할 수 있다.
....라고, 레이첼은 생각했지만.
““당신들, 이미 죽어가고 있다고요?””
“....?”
베리드의 주특기는 연금술 하나가 아니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만 번의 거짓.
그의 거짓은 세상 전체를 속인다.
“쿨럭....!?”
별 황당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첼이 허리를 굽히며 피를 토했다. 그녀의 투명한 피부 곳곳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그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입은 상처들이 전신에 가득했다.
키리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언제 다리를 베였었단 말인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키리누스는 자신의 양쪽 다리를 관통하고 있는 상처를 똑똑히 보았다. 철철 흘러넘치는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는 광경을 머리에 각인시켰다.
쩌적. 쩌저적.
베리드가 질겅질겅 씹고 있던 흙이 그의 입속에서 금속으로 변해간다.
끝이 뾰족한 못 수십 개가 그의 입속 가득히 들어찼다.
““말했잖아요. 정신력은 무한하지 않다고. 하물며 하등한 인간의 정신력 따위야 빠르게 소모되는 법이죠.””
순간.
“....!?”
레이첼의 몸 가득했던 상처들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상처와 함께 동반됐던 온갖 종류의 고통들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키리누스의 다리에 새겨져있던 깊은 상처 또한 마찬가지였다.
키리누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지를 붉게 적셨던 혈흔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 있었다.
세상 그 자체를 속이는 거짓.
환상의 영역을 이루는 베리드의 거짓말이 효력을 잃은 것이다.
자신들이 조금 전 겪었던 일이 환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이첼과 키리누스가 다급히 창을 고쳐 쥐었으나.
푸푹-!
푸푸푸푹!!
이미 늦었다.
베리드가 입으로 쏘아낸 수십 개의 못이 두 사람의 몸을 덮쳐 넝마로 만들어버렸다.
그건 거짓이 아닌 현실이었다.
“크윽....!”
전신에서 피를 뿜으며, 못 박힌 키리누스와 레이첼이 잠시 경직되었다.
그들의 정신력이 일시적으로나마 피폐해졌다.
베리드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하하, 인간은 정말로 단순하네요.””
모멸서린 미소를 흘린 그가 주변의 만물을 금속으로 변형시켰다.
날카로운 수십 개의 칼날이 빠르게 생성되며 키리누스와 레이첼을 조준했다.
““죽으세요.””
촤르르르르륵!
베리드는 굳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신속하게 눈앞의 장애물들을 처리했다.
조금의 지체 없이 칼날을 날려 키리누스와 레이첼의 몸을 난도질했다.
『이, 이건 안 됩니다....』
급격히 줄어드는 키리누스와 레이첼의 생명력을 확인한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침음했다.
시청자들 또한 잠시나마 엿봤던 희망을 잃고 탈력감에 주저앉았다.
‘사하란 제국이 나서기 전까지 베리드는 토벌되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이미 오래 전 예측이 다시 화두에 올랐다.
여유를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바빠진 키리누스와 레이첼.
베리드의 칼날 비를 피하고자 발악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헛된 꿈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