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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19화 (909/1,794)

템빨 49권 - 17화

사냥의 신 드비리온은 신화의 잔재로 말미암아 탄생한, 무수히 많은 토착신 중 하나에 불과하다.

레베카, 헥세타이아, 제라툴 등의 주신과 비교했을 때 격이 한참 떨어졌다.

사하란 제국에서는 잡신, 혹은 이단이라 분류하는.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존재였다.

하지만 지발에게는 드비리온이야말로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다.

“늘어나라!!”

[드비리온의 가호로 PvE 데미지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경험치 획득량이 소폭 상승합니다.]

전투 상태에 돌입하자마자 발동하는 패시브 효과.

이는 과거, 지발이 랭킹 2위를 유지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던 원동력이다.

<드비리온의 사자>로 막 전직했을 무렵의 지발은 자신이 크라우젤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었을 정도로 드비리온의 사자는 사냥과 성장에 특화 된 직업이었다.

단, PvP에서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기에 지발은 눈물을 머금고 <천공의 라이더>로 전직할 수밖에 없었다. 국대전 레이드 종목에서 그리드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사건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천공의 라이더로 전직한 지발은 드비리온의 사자의 모든 직업 특성을 상실했다.

하지만 드비리온은 자애로운 신이었다.

자신을 섬겼던 몇 안 되는 신도를 위하여,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지발을 벌하기보다 도리어 가호를 내렸고 덕분에 지발은 여전히 뛰어난 사냥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상이 어떤 종족일지라도 몬스터로 분류되는 이상, 지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늘어나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의봉의 기능은 간단하게 축약할 수 있다.

커지고, 작아진다.

그게 끝이다.

하지만 사용 난이도는 최상을 넘어서 극악으로 분류되는 무기가 바로 여의봉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부피와 무게가 늘어나는 순간에 발생하는 반동에 있었다.

[스킬 ‘늘어나라’를 최대치까지 전개하였습니다!]

[<+8 힘차게 꿰뚫는 여의봉>의 공격력이 대폭 상승하고 무조건 치명타가 발생합니다. 치명타 데미지가 3배 상승합니다.]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착용 중인 무기의 무게가 무척 무겁습니다. 당신의 근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른쪽 팔의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집니다!]

[오른쪽 팔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큭....!”

이를 악 무는 지발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된다.

강물처럼 뻗어나가 악마들의 머리통을 처부수는 여의봉을 쥔 그의 오른쪽 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리며 검게 변색됐다.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이대로는 여의봉을 손에서 놓치고 소유권을 잃게 될 것이다.

이 강력한 제약 탓에, 드비리온의 사자 시절 지발은 여의봉의 잠재력을 전부 다 끌어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페가수스!!”

유니콘과 쌍벽을 이루는 환상마.

지발이 창공의 라이더로 전직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

아름다운 게이트를 타고 등장한 녀석이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곧바로 지발의 변색 된 오른팔을 혀로 핥았다.

그러자.

쏴아아아아-

끊어진 연처럼 덜렁거리던 지발의 오른팔이 빠르게 회복됐다.

이 모든 과정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초.

20억 유저 중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답게 시간이라는 영역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지발은 손끝에 다시 돌아오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작아져라!’를 외쳤다.

부우우웅-

용수철의 탄성을 연상시키는 속도로 급격히 짧아진 여의봉이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간다.

“크음....!”

츠카카카칵!

지발은 되돌아온 여의봉의 반동을 감당 못하고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급기야 레이더스의 정강이에 등을 맞부딪치며 멈출 수 있게 된 그가 물약을 마시며 성벽 위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대열을 정비하라!”

악마의 종(種)은 최소 수백 가지다.

몬스터처럼 다양한 종족들이 존재했고 이는 베리드의 군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떤 악마는 곤충과 닮았고 어떤 곤충은 짐승과 닮았다.

곤충형 악마는 대부분 작고 왜소한 대신 성벽을 순식간에 기어오를 정도로 날쎈 반면 짐승형 악마들은 크고 육중하여 느린 대신 내구력이 무척 높았다.

지발의 여의봉으로도 쉽게 해치울 수 없을 정도였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며 입에서 불과 독을 쏘아 성벽 위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지발의 선전을 보고 기세가 올랐던 병사들이 갑자기 시야를 덮치는 화마에 휩쓸려 잿더미가 되었다. 성벽 아래로 마구 바위를 던지던 병사들은 자신들을 호위하던 궁병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놀라 뒷걸음쳤다.

키에엑!

키야아아아악!!

병사들의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성벽을 기어오르는 악마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지발의 선제공격을 보고 위축되었던 녀석들조차도 킬킬 웃으며 날개를 펼쳤다.

하늘 위에 파리의 모습을 닮은 작은 소악마들이 가득하다.

키르르르륵!!

파리들이 침을 쐈다.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든 얇은 바늘 수백 개가 병사들에게 쇄도했다.

“병사들은 우리가 지키겠네!”

플레티넘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성벽 위로 뛰어올라 마법을 사용했다. 병사들을 덮치는 악마들의 공격을 투명한 장벽들이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켄 왕국의 동량들.

베리드의 진군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진 왕실을 채찍질하여 일으킨 그 귀족들은 지발의 옛 상관이자 전우들이었다.

아직 초보에 불과했던 지발을 신뢰해주고, 신뢰에 부응한 지발에게 호감을 보이며 온갖 퀘스트를 내려주었던.

그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지발도 없었다.

“너무 무리들은 하지 마.”

귀족들의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발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플레이어 위에 군림했던 귀족들이 이제는 플레이어를 의존하고 있다니..... 시대의 변화가 와 닿는다.

“페가수스, 우리는 이틈에 돼지들을 처리하자.”

푸르릉!

지발을 등에 태운 페가수스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지발의 시야에 성벽 너머 득실거리는 악마 군단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저놈들부터.’

지발은 악마 군단의 선두에 있는 거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곰처럼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는 놈들은 회색털로 뒤덮여 있었고 하나의 머리에 4개의 안면을 달고 있었다.

기괴한 생김새는 차치하고 대체 어찌나 단단한지, 성벽 위 병사들이 쏘는 화살과 바위 대부분을 맨몸으로 막아내며 다른 악마들의 진격을 돕는 중이다.

악마계의 탱커인 셈.

녀석들을 가장 먼저 처리하는 게 좋다는 판단을 내린 지발이 여의봉을 휘둘렀다.

“늘어나라!!”

꽈드득!

여의봉의 크기와 무게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지발의 오른팔에 혈관들이 솟구쳐 올랐다가 이내 터져나갔다.

이를 악 문 지발이 고통을 인내했다.

콰아아아아앙!!

여의봉이 거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점에 지발의 오른팔은 완전히 넝마가 되어있었다.

극심한 격통을 느낀 지발이 부들부들 몸을 떨자 페가수스가 걱정스레 울며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거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발에게 향했다.

놈들은 지발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깎아가면서 휘두른 여의봉에 얻어맞고도 죽지 않았다.

“더럽게 단단한 놈들이군.”

거인들은 정예 몬스터도 아니고 일반 몬스터였다.

한데 궁극기라고 해도 손색없을 여의봉의 최대치 공격을 견뎌낸 것이다.

지발은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야를 가로지르고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악마 대군의 모습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꼈다.

베리드의 진격을 멈추기는커녕, 베리드와 대면하기도 전에 악마들에게 잡아먹히고 말거라는 공포감이 그를 엄습했다.

‘....나도 진짜 퇴물이군.’

문득, 웃음이 터져 나온다.

랭킹 1위를 노렸던 시절에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상황도 버텨냈었다.

물론 버텼을 뿐이고 결국 이겨내지 못한 일이 많았지만.

그렇게 계속 실패를 맛봐왔기에 결국 현실의 벽을 깨닫고 지금처럼 퇴물이 된 것이겠지만.

‘오늘만큼은 한계를 단정 짓지 말자.’

이 빌어먹을 악마 군단을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좌절해선 안 된다. 계속 싸워야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시절로 되돌아가야할 때다.

나의 용기가 옛 전우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줄 것이다.

“우오오오오오!!

콰르릉! 쾅쾅!!

전장 한복판에 천둥 같은 굉음이 메아리쳤다.

지발이 여의봉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대지가 격동했다.

지발의 팔은 몇 번이나 부러졌고, 그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페가수스의 영기는 빠르게 고갈되어갔다.

그 끝에.

구워어어....

악마군단의 선두에서 방벽 역할을 해주던 거인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성벽 위 병사들이 쏘는 화살이 드디어 악마군단에게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지발, 우리는 자네를 믿고 있었다네!”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상승했다.

하늘 위 파리떼를 상대하고 있던 귀족들의 안색도 밝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조국을 지킬 수 있게 됐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페가수스의 표정은 침통했다.

푸릉. 푸르릉.

주인의 팔을 핥는 혀가 떨린다.

천공을 활보하던 백색의 날개가 날갯짓을 멈췄다.

“허억.... 허억..... 허억.....”

지발은 탈진 직전이었다.

그의 스태미나창이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아직.... 아직이야.”

조금만 더.

적어도 악마군단의 저격수들을 처리할 때까지 체력이 버텨줬으면 좋겠다.

한데 자꾸 시야가 감긴다.

이대로는 끝이다.

결국, 지발의 시선이 요새 안에 서있는 레이더스에게 돌아갔다.

본래 레이더스는 베리드를 상대할 때나 가동시킬 계획이었지만, 이대로는 레이더스를 가동도 못해보고 죽게 생겼으니 계획을 바꿔야할 것 같았다.

‘레이더스로 악마들을 돌파하고 베리드를 죽인다.’

결심한 지발이 페가수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인의 의지를 읽은 페가수스가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돌렸다.

녀석이 레이더스를 향해서 하강하는 순간.

““고약하군요, 고약해. 하찮은 인간 따위가 언제까지 제멋대로 행동하실 생각입니까?””

지독한 악취와 함께 붕붕 울리는 목소리가 지발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방송을 통해서 골백번도 더 들었던 목소리.

바로 대악마 베리드의 음성이었다.

““제 병사들을 해쳤으니 죗값을 치르셔야죠.””

“....!”

지발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멀리 서있는 베리드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도 황당했고,

파차자자자자자자작!!

전장에서부터 솟구치고 있는 흙먼지들이 일제히 금속으로 굳어가는 광경도 황당했다.

““그만 까불고 죽으세요.””

쿠오오오오오-!

날카로운 금속들이 결집하더니 회전하며 폭풍을 이룬다.

그것은 악마들의 단단한 육신을 갈기갈기 찢으며 날아와 지발에게까지 도달했다.

힘차게 날갯짓한 페가수스가 금속의 폭풍을 따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아보였다.

페가수스 또한 이미 대부분의 영기를 소진한 상태였기에 체력이 부족했다.

“페가수스, 돌아가라.”

죽는 건 혼자로도 충분하다.

괜히 페가수스까지 죽게 만들어서야 더 큰 손해다.

푸르릉! 푸릉!!

페가수스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지만 지발은 무시했다.

녀석을 역소환하고, 그대로 맨몸이 되어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계획보다 너무 빨리 죽게 됐군. 하지만 아직 기회는 한 번 더 남았다.’

지발은 이미 이곳 테일렌 요새를 부활 포인트로 설정해 놨다.

죽어도 즉시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스태미나도 전부 회복할 것이다.

‘다시 싸운다.’

물론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접속제한 페널티를 겪게 될 것이고, 자신이 없는 동안 하켄 왕국은 더 힘든 싸움을 하게 될 테지만 어쩔 수 없다.

쿠콰콰콰콰콰콱!

금속의 폭풍은 이제 지발의 바로 곁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폭풍에 삼켜져 죽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이대로 땅에 떨어져 추락사하는 게 먼저일까.

지발이 허무한 의문을 품어보는 그때였다.

덥썩.

누군가가 지발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이어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쉬고 있어라.”

평생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지발이 질투하고 시기했던.

그러다가 선망하고 동경했던.

전 지존의 목소리였다.

“크라우젤....!”

펄럭-

등에 커다란 금룡의 자수가 놓인, 묵색의 도포가 나부낀다.

부드러운 비단이 지발의 상처 입은 몸을 감싸주었다.

“하늘 찢기.”

꽈작!

꽈자자자자작!!

하늘에 거대한 야수의 발톱이 아로새겨졌고,

까가가가가가가가강!!

거대한 마찰음과 함께 금속의 폭풍이 제자리에 경직됐다.

본래 지발을 갈기갈기 찢어놓아야 했을 그것은 이내.

콰드드드드드득!!

경로를 역으로 바꿨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악마군단을 휩쓸더니 급기야 베리드에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베리드에게 닿기 직전.

쏴아아아아....

폭풍을 구성하고 있던 금속들이 다시 흙먼지로 되돌아가 허망하게 흩어졌다.

““검...””

“우주 검.”

““...성.””

서걱-!

세상이 두 개로 갈라졌다.

땅과 하늘, 수천의 악마들과 베리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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