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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16화 (907/1,794)

템빨 49권 - 14화

“당시 정황을 분석한 우리는 피아로 공께서 배신했을 리 없다고 확신하였소. 하지만 반역의 증거는 하루가 멀다하고 발견되는 반면 배신하지 않으려 했다는 증거는 제시할 수가 없었으니....”

피아로는 무려 반역의 죄를 뒤집어쓴 대상이었다.

그를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변호한다는 건 천하의 공작들이라도 불가능했다.

“결국 우리는 피아로 공의 가족만이라도 선처해달라는 상소를 올렸소. 하지만 결과는 공께서도 알다시피....”

이제는 하염없이 먼 과거의 일.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되돌리고 싶을, 바로 어제의 고통일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옛일을 고하는 그렌할 공작의 마음은 괴롭고 무거웠다.

끝끝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타들어가는 심정을 간신히 부여잡고 말해나가는 그의 시야가 아찔했다.

“.....”

피아로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저들은 내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데 나는 저들을 원망해왔다.

오직 그 두 가지 사실만이 피아로의 머릿속에 맴돌며 그를 괴롭혔다.

침통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던 피아로가 문득 물었다.

“우리란, 누구요?”

“나와 모르이즈 공, 그리고 레이첼 공과 리갈 공이오.”

“....리갈?”

나란히 서서 듣고 있던 그리드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천공왕 리갈.

그가 최후의 순간에 피아로를 발견하고 동요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밝혀진 것이다.

그리드는 하필이면 피아로에게 리갈을 죽이라 명했던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꽈악.

피아로가 그리드의 떨리는 손을 붙잡아주었다.

“전하, 우리 템빨국에게 있어서 리갈은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습니다. 죄책감은 제가 짊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라고, 이 양반아.’

썩어문드러진 당신의 마음에 새로운 추를 달고 말았다.

나는 그게 미안한 것이다.

제기랄, 욕설을 토하는 그리드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동료들이 귓속말을 보내왔다.

-그리드 너는 과거를 몰랐잖아. 네가 불편해할 일이 아니야.

-애초에 리갈은 칸의 동상을 부수고 사람들을 해친 적이었다고. 적이랑 싸우면서 어떻게 일일이 옛일을 신경 써?

-전쟁 통에 벌어진 일이에요.

“.....”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리갈은 바이란을 침략했고 많은 인명을 해쳤다. 칸의 동상마저 짓밟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리드에게 칼끝을 들이밀었다.

템빨국이 그를 토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하필 피아로의 힘을 빌렸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드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이 지독히도 원망스러웠다.

‘내가 강했다면.... 나만 강했다면 굳이 피아로를 부를 필요도 없이 내 선에서 리갈을 처리했을 텐데.’

그럼 피아로가 새로운 죄책감을 짊어질 일도 없었을 터이다.

아쉬움에 휩싸인 그리드가 지나간 로그를 확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99레벨을 달성하여 이십만대적검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술 교본:이십만대적검>

등급:레전드리

마드라의 기초 검술이 기록 된 교본입니다. 단, 마드라가 데스나이트가 된 이후에 사용한 검술을 기록한 교본이므로 원본에 비하면 내용이 미약합니다.

<이십만대군 분쇄검(열화판)> 단 1개의 검술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습득 조건:마드라의 인정을 받은 자. 레벨 399 이상.

“.....”

피아로를 소환하기 전, 그리드는 디워스에게 나름 치명상을 입혔다는 점 때문에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고 399레벨을 달성했다.

강해질 수 있다.

확신한 그리드가 새로운 다짐을 했다.

‘앞으로 모든 고통은 내가 짊어지겠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그리고 브라함과 메르세데스.

그리드의 가신과 친구 대부분은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있었다.

심지어 대현자 스틱세이조차도 미식룡에게 저주 받아 매일 밤 악몽을 꿨다.

첫 번째 기사 쥬드는 장가를 가는 게 불가능해 보였고, 광물탐지기 마이너는 자신을 홀로 키워주신 병든 노모를 보살피느라 하루하루 애가 타고 있었다.

우리네 모두가 그렇듯이 힘들고 슬픈 사람들이다.

그리드는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들이 나를 섬김으로써 ‘행복할 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게끔 의지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력하자.’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깨우치는 재능 따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뭘 어떻게 더 노력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구르고 또 구르다보면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있다.

그리드가 마음을 독하게 먹는 동안에도 공작들과 피아로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귀공의 가족들을 지키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마리에게 있었소. 그녀가 직접적으로 나서진 않았지만, 그녀의 가문과 그녀를 섬기는 귀족들이 유독 목소리를 높여 반역 도당을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오.”

“빌어먹을 계집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제국 귀족이 황비를 낮잡아 이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행태다.

황실 그 자체를 모욕하는 행위였고 반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렌할은 황비를 ‘그녀’로, 모르이즈는 한 술 더 떠서 ‘계집’이라고 욕되게 지칭했다.

그들이 마리를 황비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힐끔.

피아로가 바사라의 표정을 살폈다.

바사라는 3대 전 황제의 손녀.

현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다.

황실의 핏줄인 것이며 황위계승서열도 5위일 정도로 매우 높았다.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그녀 앞에서 황실을 모욕한 행위는 그녀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사라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녀 또한 황비 마리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과거의 피아로를 위해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피아로와 친분이 적다는 이유를 넘어서 황실의 핏줄이라는 제약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이 말을 하기는 송구하나.”

그렌할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스모펠 백작이 마리와 내통하는 정황을 여러 번 포착했었소.”

피아로와 아스모펠.

제국의 기둥이라 불렸던 두 사내가 어려서부터 절친한 벗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제국에 없었다.

하여 그렌할은 말을 잇기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피아로에게 너무 큰 충격과 분노를 주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반면 모르이즈는 거침없이 말했다.

“내통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그 계집의 앞잡이가 되어서 칼부림을 쳤다고. 전 적기사단원들을 추격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놈이 바로 그 개새끼야.”

“.....”

“피아로 공,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이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데 가장 크게 일조한 사람이 바로 아스모펠이었을 거라고.”

“....알고 있소.”

“.....”

알고 있었다는 대답.

피아로가 씁쓸히 뱉은 그 한 마디에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피아로가 느끼고 있을 배신감과 분노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사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 년 전, 아스모펠 백작이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리는 사건이 있었어요.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 처리됐지만 저는 그가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거라고 확신했죠.”

“.....”

“피아로 공, 당신이 징벌한 건가요?”

아스모펠은 자신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제국 황도 타이탄의 한가운데 있던 저택 말이다.

한데 침입자는 흔적도 없이 아스모펠을 찾아와 그를 해치고 떠났다.

그 정도 실력자는 세상에 몇 없다.

그리고 아스모펠을 죽여야 하는 명분을 지닌 사람이 바로 피아로였다.

바사라의 추리는 합당하다는 뜻.

그렌할과 모르이즈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피아로의 대답은 예상 외였다.

“당시 아스모펠을 찾아갔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리드 전하셨소.”

“....!?”

그렌할과 모르이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템빨왕 그리드.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를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 싶더니, 이미 수 년 전부터 제국의 감시를 뚫고 제약 없이 활동해왔단 말인가?

‘당시의 아스모펠은 폐인이나 다름이 없어 예전만 못한 실력이었으니 템빨왕 전하께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겠군....’

공작들은 쉽게 납득했다.

과거의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공작들보다 몇 수 위의 실력자였다고 하나, 그리드를 상대로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여전히 강한 피아로가 그리드를 섬기고 있지 않은가.

‘확실해. 템빨왕 전하는 그랜드 마스터와 동급의 실력자다.’

파그마의 기술과 영웅왕의 계보를 잇는 존재.

이미 그 두 개의 업적만으로도 일반적인 전설을 상회하는 격이다.

한데 그리드는 대마법사급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저만한 격을 쌓다니....’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로다.’

공작들이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에 존경심마저 깃들기 시작할 때였다.

“그리고 아스모펠은 고했소. 당시 황비는 야탄교와 손을 잡고 있었고, 자신의 권세를 높이기 위해 적기사단을 와해시켰다고. 그 과정에서 아스모펠은 황비의 계략에 빠졌고 야탄의 정수를 복용했다는군. 그로 인해서 이성을 잃고 나와 동료들을 배반한 것이고.”

피아로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나는 아스모펠을 용서했소. 그는 현재 나와 함께 그리드 전하를 섬기고 있소.”

“.....?!”

공작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늘 눈을 감고 있던 바사라가 두 눈을 부릅떴을 정도로 공작들은 크게 놀랐다.

‘예쁘다.’

눈을 뜨는 순간 완성 된 바사라의 미모를 보고 경탄하는 템빨단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20대 후반정도로 보이나 실제 나이는 40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바사라.

그녀는 남다른 느낌의 미녀였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의 남편조차도 그녀의 손을 함부로 붙잡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고귀함이 있었다.

“용서라.... 템빨왕 전하의 설득 때문이었을까요?”

계략에 빠졌다, 야탄의 정수를 먹었다.

그런 건 결국 다 핑계다.

뭐가 어쨌든 간에 아스모펠은 친구와 동료들을 배신하고 그들의 가족을 죽게 만든 악마다.

인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를 우선시하는 공작들이 봤을 때도 아스모펠은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바사라는 피아로가 원해서 아스모펠을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리한 그녀는 그리드가 템빨국의 무력을 축적하기 위해서 피아로에게 양보를 강요한 것으로 추측했다.

딱히 비난할 의도는 없다.

때로는 냉혹할 줄도 아는 왕의 재능에 순수히 감탄할 뿐.

바사라의 질문에 피아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뜻이었고 내 판단이었소. 내 원한의 대상은 아스모펠이 아니라 그를 이용한 황비 마리외다. 그리고 아스모펠에게는 자신의 죄를 씻어낼 의무가 있고.”

“....그래서 결국 전 제국의 기둥들이 템빨국에....”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을 바라보는 공작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미 진즉부터 그리드를 인정하고 있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템빨국 그 자체의 저력에 감탄하며 템빨국 전체를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템빨국은 일반적인 왕국과 달랐다.

제국조차도 위협할 수 있는 상대였다.

무신의 유적지를 발견한 덕분에 템빨국과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은, 도리어 제국 입장에서 큰 행운이었으리라.

그렇게 오해하는 공작들에게.

“메르세데스가 전설의 기사가 된 것은 알고 있소?”

“당연하죠. 하지만 그녀는 전설의 기사가 되자마자 제국을 떠났어요.”

“그 아이도 그리드 전하를 섬기고 있다오.”

“....!?”

“혹시 대현자 스틱세이라고 들어보았소?”

“....?”

“그분 또한 그리드 전하를 섬기고 있지.”

“.....”

“직계 뱀파이어와 지옥제일의 마수도 그리드 전하를 충실히 따른다오.”

피아로가 생뚱맞은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대단한 제국의 공작들이 자신의 주군을 보고 감탄하자 흥이 난 것이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었구만.”

연신 떠들어대는 피아로의 모습에 모르이즈는 그렇게 투덜거렸고.

“허허허....”

그렌할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오랜 세월 묵혀온 고통과 슬픔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

황제에게 진실을 알리고 황비 마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 적기사단의 실추 된 명예를 회복하고 이미 땅에 묻힌 그들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끝으로 템빨국과는 반드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한다.’

그렌할과 모르이즈는 판단했다.

템빨국을 적대해서야 피차 좋을 게 없음을.

하지만 황제를 무슨 수로 설득해야할지, 그들은 쉽게 떠올릴 수 없었고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과연 황제가 우리의 말을 믿어줄까?

피아로가 누명을 썼던 것이 맞고, 그 배후에는 야탄교와 결탁한 황비 마리가 있었다.

─라는 진실을, 과연 황제가 온전히 받아들일까?

황후를 잃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이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황제는 오랜 세월 마리를 의지해왔다. 그녀에 대한 황제의 신뢰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을 외쳐봤자 황제폐하께서는 피아로 공을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제국을 떠난 아스모펠과 메르세데스가 템빨국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시면 더 큰 배신감을 느끼고 템빨국과의 화친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어찌해야하는가.

미간을 찌푸리는 그렌할과 모르이즈에게 바사라가 다가와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기꺼워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후훗, 조만간 알게 되실 거예요.”

메르세데스가 템빨국에 의탁했다는 사실을 과연 폐하께서 모르실까?

애초에 폐하께서는 왜 전설의 기사를 추방하셨을까?

메르세데스를 템빨국으로 보낸 당사자가 황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바사라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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