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11화 (1,551/1,794)

템빨 49권 - 13화

그리드가 무신의 유적지로 떠난 후.

피아로는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농부이되 무인인 그는 무신의 추종자와 얽힌 설화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의 유적지가 대단히 위험한 장소임을 뻔히 예상하고 그리드를 걱정했다.

자신을 데려가지 않은 그리드를 감히 원망하지는 못한 채, 흙 묻은 천 옷을 벗고 기사의 갑주를 차려입었다.

그리드가 나를 부를 때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그리드가 나를 부를 상황 자체가 없기를 바라며.

지난 한 달 동안의 피아로는 농부도, 전설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한 명의 기사로서 애타게 주인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끝내 주인의 부름을 받아 유적지에 도착한 그는.

“....네놈.”

그리드와 대치하고 있던 취공 디워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놈이 레이단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와 그리드를 위험에 빠뜨렸음을 즉시 눈치 챈 것이다.

“거름으로도 못 쓸 놈이 감히 나의 왕을.”

전설의 농부가 되어 검성에의 집착으로부터 해방 된 후.

아스모펠과의 오해가 풀리고 과거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덮어둘 수 있게 된 이후.

피아로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왔다.

분노를 숨기고 평안을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지만 조금씩 회복되어왔다.

하지만 이 순간의 그는 흉살악귀와 같았다.

황비 마리를 만나게 되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간 억눌러왔던 분노를 온전히. 아니, 몇 배로 표출했다.

파직-!

파지지지직!!

석양으로 물든 붉은 하늘에 수십 줄기의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대기(大氣)라는 자연이 피아로의 살기와 분노에 반응하고 있었다.

자연경의 표출이다.

“옛정에 기대어 살아갈 생각일랑 꿈에도 말라.”

따당. 땅.

피아로가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호미, 낫, 괭이가 휘몰아치는 기류에 휩쓸려 갑옷과 마찰한다. 무기(?)들의 무게가 워낙 가볍다보니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악기의 연주처럼 울려 퍼졌다.

피아로가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촤르륵-!

씨앗처럼 작아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무언가.

그것이 수십, 수백 개 허공에 흩뿌려졌다.

대경실색한 디워스가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안력과 기감을 지닌 그는 자신을 향해서 쏟아진 작은 것들의 정체를 즉각 파악한 것이다.

강기의 조각들이었다.

미세한 입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하나, 하나하나에 내포된 파괴력은 천지를 격동시키고도 남을 것들이었다.

....아니, 과연 그럴까?

뭔가 좀, 느낌이 다르다.

강기.

흔히 검기의 상위격이라고 알려진 그 힘은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짜릿짜릿하게 마련인데, 피아로가 뿌린 강기의 조각들은 굉장히 온순했다.

파괴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나.

후두둑....

디워스에게 적중하지 못하고 지면 위로 떨어진 강기들은 그 어떤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눈처럼 사르르 녹아 지면에 흡수됐다.

‘속임수?’

회피를 강요받고 말았다.

이로 인해서 나는 어떤 후폭풍을 겪게 될 것인가?

이를 악 문 디워스가 충격에 대비했다.

자신이 뒤로 물러난 틈을 노린 피아로가 어떤 방법으로 공격을 연계해올지, 그는 쉽게 추측하지 않았다.

수 싸움으로는 피아로를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자신의 순발력을 믿고 취기를 돋우며, 앞으로 벌어지게 될 상황에 실시간으로 대응하고자 할 뿐이다.

한데 각오가 무색하게도.

“....?”

피아로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디워스의 예상과 달리 공격을 연계해오지 않았다.

디워스가 의문에 휩싸이는 순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