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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10화 (905/1,794)

템빨 49권 - 12화

정치적 암투는 흔한 일이다.

귀족들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파벌을 나눴고 서로를 견제했다.

칠공작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다 같은 황실을 섬기는 충신들-검공이라는 예외도 있다-이었으나, 서로를 예의주시하며 경계했다. 심할 경우 무력 충돌을 감수하기도 했다.

공작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작들은 수백 명의 식솔과 수백만의 백성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누군가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권리를 잃지 않고자, 또 누군가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스스로 냉혹해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입장과 성향과는 관계없이, 칠공작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서로를 끔찍이도 존중한다는 점이다.

비록 뒤로는 서로를 두려워하거나 적대하고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서로에게 예의를 다했고 호감을 표했다.

자신의 명예와 가치가 훼손되는 일을 원치 않았으니까.

‘제국 공작’은 누구에게나 존경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일종의 이미지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즉.

“템빨왕 전하께 눈 부라리지 말라고.”

“....”

이런 상황은 없어야 정상이라는 뜻.

그렌할 공작의 권세와 무력이 디워스 공작의 그것을 상회한다 해도.

두 가문이 세일레타의 상권을 두고 다퉜던 점을 고려해 봐도.

‘....타인 앞에서.’

심지어 적대국의 수장 앞에서 이런 망신을 주는 건 상식과 거리가 먼 행동이다.

일단 눈을 깐 디워스가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분노로 떨리는 몸과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심호흡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한다.’

제국 공작의 가치를 훼손시키면서까지 템빨왕을 옹호한다?

현재 그렌할은 분명히 정신이 나가있었다.

어쩜 이미 광전사로 변해 있는 게 아닐지, 의심해도 좋을 정도로 미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디워스는 재차 확신했다.

그리드가 피아로를 빌미로 공작들을 현혹시켰음을.

‘간악한 놈.’

그리드는 섬기던 왕실을 배신하고 조국을 전복시킨 역천의 왕이다.

뱀처럼 교활한 놈이라 할 수 있다.

놈이 피아로를 거둔 일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 우연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놈은 처음부터 계산했다.

피아로가 제국에 각별한 존재였음을.

피아로를 곁에 둠으로써 자신이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음을 엿보았다.

결과, 놈은 대륙일통을 염원하던 황제의 의욕을 꺾는데 성공했고 메르세데스를 손에 넣었다.

피아로의 생존 소식을 알게 된 황제가 메르세데스를 사실상 템빨국으로 보내버리고 템빨국과의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이 명백한 증거다.

‘이놈은 위험하다.’

똑똑해도 너무 똑똑하다.

존재만으로 제국에 위협이다.

어쩌면, 먼 역사 속 무패왕 마드라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

무력만 믿고 날뛰었던 천둥벌거숭이 마드라의 악행은 단지 제국의 전진을 방해하는 수준에 그쳤었지만, 이 천재적으로 교활한 놈은 제국을 안에서부터 썩어가게끔 만들 것이다.

실제로, 이미 황제와 공작들이 놈의 손위에서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황실과 제국을 위해서 이놈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이미 피아로라는 미끼를 문 상태였으니.

피아로의 반역 사건 당시, 그들은 피아로가 누명을 쓴 것이 분명하다며 황제에게 청원까지 올렸었다. 그의 가족들을 단두대에 올려선 안 된다고 간청하였다.

피아로를 동경했던 그들은 피아로의 생존 소식에 환희했을 것이며, 피아로를 보살피고 있었다는 그리드의 언변에 현혹되어 그리드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미 피아로의 존재를 숨길 수 없게 된 이상. 그리드가 피아로를 거둔 것은 순수한 호의가 아닌 정치적인 이유에서였음을 알리고 공작들에게 이성을 촉구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니 일단은 숙이자.

이성이 나간 그렌할의 장단에 맞춰주며 기회를 노리자.

협력은, 바사라에게 받으면 된다.

다른 공작들과 달리 피아로와 큰 인연이 없었던 그녀는 피아로에게 사적인 감정이 없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분노를 억누른 디워스.

마나를 운용하여 취기를 모두 날려버린 그가 그렌할에게 사과했다.

“제가 실수했군요. 상대가 비록 적국의 수장이라 하나 그 또한 백성을 이끄는 왕. 제국 공작으로써 마땅히 지켜야할 체통을 잃고 흥분해 그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보이지 못했으니 지적 받아 마땅합니다.”

디워스의 언변은 고묘한 것이었다.

그리드가 제국의 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주지시키며, 그렌할이 그리드를 비호한 행위를 귀족의 도리 때문이라 받아들였음을 천명했다.

피아로라는 사적인 이유로 그리드에게 현혹됐던 그렌할을 은근히 비판하는 것이다.

디워스는 그렌할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최소한의 이성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한데 결과는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렌할이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더욱 더 미친 헛소리를 지껄였다.

“내가 귀공께 적의를 거두라고 말한 이유는 귀공을 위해서였지 그런 가식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세.”

“저를 위해서 말입니까?”

“맞네.”

“....?”

‘이 양반, 유적지 탐사 기간 동안 어지간히 고생했나보군.’

그렌할의 육신에는 ‘훈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 된 상처가 셀 수 없이 많다.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다.

60년 일생 동안 황실과 백성을 위해서 싸워온 그렌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고난의 연속이었을 무신의 유적지.

그곳을 원군도 없이 한 달 이상 탐험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초를 겪어왔을지, 디워스는 쉽게 추측하기 힘들었다.

그저, 그렌할이 고생 끝에 드디어 맛탱이가 갔구나 싶었다.

속으로 혀를 차는 디워스에게.

“귀공, 그리드 전하 앞에서 계속 불순한 태도를 보였으면 죽었을 거거든.”

스윽.

난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모르이즈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뭐? 내가 죽었을 거라고?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소?”

눈살을 찌푸린 디워스가 반문하자 모르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라?”

디워스의 얼굴이 대추처럼 붉어졌다.

술기운을 몰아냈음에도 만취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모르이즈 공 당신이 시정잡배 같은 인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발언이군.”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비록 이들과 비교해서 세력도, 무력도 다소 약하다고는 하나 목숨을 위협받고도 웃어넘길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나를 죽였을 거라고? 왜? 내가 중간에 끼어들면 피아로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그래서 나를 죽였을 거라고? 당신들과 같은 제국의 공작인 나를! 황제폐하의 신하인 나를 감히 당신들이 살해했을 거라고?!”

지금, 디워스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살해했을 사람이 ‘그렌할’과 ‘모르이즈’였다고 받아들였다.

당연히 오해다.

어떠한 경우가 있어도, 공작은 공작을 해치지 않는다.

방관은 할지 몰라도.

모르이즈가 손사래 쳤다.

“미쳤어? 우리가 귀공을 왜 죽여?”

“그럼 내가 누구에게 죽는단 말인가!!”

모르이즈의 해명 같지 않은 해명이 디워스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망나니 같은 모르이즈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장난질을 친다고 생각했다.

오늘 일어난 일을 반드시 황제폐하와 다른 공작들에게 알리리라.

그리고 이들에게 책임을 물리라.

다짐하며 눈에 불을 켜는 디워스의 귓가로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바사라의 목소리였다.

“템빨왕 전하께 죽었겠지요.”

“....?”

디워스는 벼락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리드에게 죽었을 거라고?

저딴 애송이에게?

이건 신종 갈굼인가?

“....바사라 공, 실망입니다.”

디워스에게 이제 앞뒤 정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자신이 조롱당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다른 공작들이 평소에 자신을 얼마나 무시해왔는지 깨닫고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될 수치심에 휩싸였다.

이를 가는 그에게 그렌할이 물었다.

“한데 왜 자꾸 피아로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피아로는 죽었다.

그렌할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받아들이고 피아로를 가슴에 묻었었다.

한데 디워스가 자꾸 피아로를 언급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리드와 묶어서.

뭔가가 있다.

은근한 기대감이 그렌할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기대에 부응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전 적기사단 단장 피아로. 그는 현재 나의 기사요.”

그리드였다.

“뭐, 뭐라고요?”

깜짝 놀란 바사라와 모르이즈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전하,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얼굴을 무섭게 굳힌 그렌할은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피아로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경고의 뜻을 담은 눈빛을 보내왔다.

이자에게도 피아로는 각별한 존재였는가.

눈치 챈 그리드가 그렌할의 시선을 담담히 받았다.

“그렇소. 아주 오래 전. 내가 왕이 아닌 평범한 백성이었을 때 나는 그를 만났소.”

악연이었다.

무시무시한 광인이 바로 피아로였고, 그리드는 그에게 죽을 뻔했다.

하지만 악연은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귀족이 되었을 때부터 피아로는 나와 함께하게 되었지.”

“그, 그 무슨....”

피아로가 살아있었다니....?

심지어 타국의 왕을 섬기고 있었다니?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광기.

유전자에 각인 된 그것을 전쟁 통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나를 모두가 두려워하고 기피했을 때 유일하게 따스하게 웃어주었던 사람이 바로 피아로다.

그는 내게 말했다.

광기를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네가 광기를 드러내는 이유는 오직 조국과 백성을 위할 때뿐이니, 남들이 뒤에서 손가락질 하더라도 괘념치 말고 자랑스러워하라고.

제국의 공작들이 칠공작이 아닌 구공작이라고 불리던 시절.

구공작의 으뜸이었던 피아로는 내 지주(支柱)였다.

“아.... 아아....”

“그렌할 공!”

충격에 비틀거리는 그렌할을 모르이즈가 부축해주었다.

그렌할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는 기뻤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화상자국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눌어붙어 있던 슬픔이 조금은 씻겨나감을 느꼈다.

피아로가 무사히 살아남았고, 이토록 훌륭한 주군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빛의 여신께 감사를 올렸다.

동시에, 거대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당신의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 죄.

온갖 복잡한 감정이 밀려오며 그렌할을 눈물 짓게 만들었다.

“.....”

피아로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구나.

그렌할의 반응을 보면서, 그리드는 피아로의 실체를 처음 알게 됐을 때 들었던 서술을 떠올렸다.

‘제국 최고의 명가에서 태어나....’로 시작됐던 서술이었다.

‘어쩌면 피아로도 공작님이셨던 걸까.’

한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것이다.

얼마나 큰 상실감과 고통을 느꼈을까.

피아로의 과거는, 몇 번을 돌이켜봐도 안타깝다.

지금은 아스모펠을 용서하고 하루하루 웃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실에의 복수를 꿈꾸고 있는 그의 마음을, 나는 감히 추량할 수 없다.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벌컥벌컥!

술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려 보니, 차갑게 식은 표정을 지은 취공 디워스가 호리병을 꺼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타고 투명한 술이 흘러내린다.

“나는 평생 조국에 헌신해왔고 귀족의 의무를 다해왔다.”

술병을 한 번에 비운 디워스가 토로하기 시작했다.

“한데 이미 오래 전 떠난 배신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다니.”

디워스가 붉게 충혈 된 두 눈으로 그렌할을 노려보았다. 기세만 봐서는 잡아먹을 것 같았다.

“급기야는 일개 소국의.... 적국의 왕보다 못한 취급을 해....? 내가 템빨왕에게 살해당했을 거라고? 큭...! 큭큭!! 그렌할 고옹!! 그동안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봤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겠소!!!”

피아로와 재회했을 때, 디워스는 솔직히 밝혔다.

나는 당신을 질투하고 시기했노라고.

술에 의존해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체질.

평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디워스 또한 자존감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술을 놓을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던 차에 이제는 그리드보다 못한 취급을 받자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증명하겠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스운 사람이 아님을!!”

공작들에게 포효한 디워스가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이제 피아로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드를 죽이고자 했다.

퍼엉-!

술기운으로 강화 된 마력이 디워스의 육체능력을 비약적으로 발달시켰다.

반사적으로 흑화를 전개한 그리드가 도살귀의 안대를 착용한 상태로도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할 정도로 디워스는 빨랐다.

하여.

“짐은 너의 안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안대 너머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거세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모든 이로운 효과를 차단합니다!]

[이 효과는 대상을 지켜보는 동안 유지됩니다.]

거세안의 힘은 대상이 버프를 받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적용 중인 버프까지 부정해버린다.

최강의 버퍼 데미안을 상대로 입증된 기능이었다.

“....!?”

술기운에 취해 세상 무서울 것 없던 디워스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리드에게 총탄처럼 쏘아졌던 그의 속도가 화살의 속도만큼 떨어졌다.

주향이 사라진다.

“연살화극(極殺花落).”

[브라함식 웨폰 인챈트의 술식이 발동합니다.]

[검무가 유지되는 동안 현재 사용 중인 무기의 공격력이 50퍼센트 상승합니다.]

우우웅-

<신을 겨누는 검>이 전설의 마법과 공명한다.

[브라함식 디텍스 포스의 술식이 발동합니다.]

[검무가 대상을 추적하여 명중률이 상승합니다.]

그리드의 검 끝이 디워스를 정확하게 겨냥한다.

[브라함식 윈드 커터의 술식이 발동합니다.]

픽-

피피피피피피피피핏!!

연의 검무에 날카로운 바람이 섞였고,

[브라함식 라이트닝의 술식이 발동합니다.]

파지직!

난무하는 푸른 꽃잎들이 전격을 내포한다.

이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킬이 세상에 또 존재할까.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다가 급기야 심장까지 찔려오는 그리드의 검을 보면서, 디워스는 매혹되었다.

“....쿨럭!”

거짓말 같은 상황.

한낱 소국의 왕이 나의 취기를 강제적으로 몰아내어 약점을 노출시키고 이어서 치명타를 입히다니?

중상을 입은 디워스가 떨리는 손으로 새 술병을 꺼냈다.

그의 허리춤에는 아직 3개의 호리병이 달려있었다.

꿀꺽.

그가 새 술을 입에 가져가자.

“기사 소환.”

그리드는 빠르게 판단했다.

거세안의 효과는 대상의 버프를 ‘전부’가 아닌 랜덤으로 벗겨주는 것. 전부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또한 디워스는 연살화극을 직격으로 맞고도 생명력이 3분의 2나 남았다.

동료들과 협력한다면 충분히 레이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긴 했지만, 진흙탕 싸움이 되어서는 결코 좋을 게 없다.

이 싸움이 길어지면 다른 공작들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속전속결을 이뤄야한다.

또한, 피아로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렌할과 이 기회에 호감도를 극대화시키는 것도 노려볼만한 일이다.

그런 모든 계산들이 있었기에.

“피아로.”

그리드는 최강의 패를 꺼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리드의 진정한 궁극기일 수도 있다.

쏴아아아아.....

적해 한가운데.

모든 통신과 텔레포트 마법이 차단되는 이곳 유적지에서 과연 기사 소환이 먹힐까?

그리드는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적해의 다른 곳은 몰라도, 무신의 유적지에서 외부와의 교신이 차단되는 이유는 ‘약자’가 찾아올 수 없게끔 방지하는 차원에서 비롯된 것.

무신은 강자를 환영한다.

강자가 강자를 호출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기꺼이 반겼다.

[무신 제라툴이 전이 마법의 적용을 일시적으로 허락합니다.]

[당신의 기사 ‘피아로’가 당신의 곁으로 당도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커다란 등이 보인다.

흙 묻은 옷이 아닌, 기사의 갑주를 무장한 피아로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신의 유적지로 떠난 그리드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던 피아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차림새였다.

“피, 피아로 공....”

사실이었다.

우리의 옛 영웅은, 저토록 건재한 모습으로 살아있었다.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감격하며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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