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9권 - 11화
“자, 그럼. 제대로 시작해볼까.”
씨익 웃은 그렌할 공작이 목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이 순간의 그는 고상한 귀족이 아니었다.
도발적인 표정과 꿈틀거리는 근육질의 몸.
스스로 자처해 투기장에 오른 전사처럼 격앙 된 그는 갑옷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질을 드러냈다.
매섭게 번들거리는 두 눈이 폭력을 탐한다.
“저 아저씨, 왕년에 좀 놀았네.”
그렌할이 내뿜는 투기와 살의에 놀라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극검의 감상이다.
퍼어엉-!
그렌할 공작은 도약하고 있었다.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는 지체 않고 추종자들에게 뛰어들었다.
서걱-!
그렌할 공작의 검이 3명의 추종자를 베자.
퍼퍼펑-!!
3명의 추종자가 즉시 반격하여 그렌할 공작의 턱을 후려치고 발을 걸었다.
물론 그렌할 공작은 쓰러지지 않았다.
전사의 기본 소양은 하체의 단련.
굳건히 버티고 선 그가 자신의 안면을 걷어찬 추종자의 발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해머처럼 휘둘렀다.
쩌엉-!
추종자들의 머리가 서로 부딪쳤다.
두개골이 울리는 충격에 휘청이는 그들을 어깨로 밀치고 돌격하는 그렌할 공작의 검에는 붉은 오러가 맺히고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앙-!
마치 장벽처럼 버티고 서서 템빨단원들을 가로막고 있던 서른 명의 추종자가 홍해처럼 갈라진다.
그렌할 공작이 쏘아낸 오러는 태양의 중력에 묶여 공전하는 행성들을 연상시켰다. 구(球)의 형태를 이룬 채 소용돌이치며 추종자들의 신체를 손상시켰다.
하지만 황량한 협곡에 흩뿌려지는 붉은 피는 대부분 그렌할 공작의 것이었다.
피해를 입은 추종자들이 그 즉시 반격을 가함으로서 그렌할 공작의 맨몸을 넝마로 만들고 있었다.
스스로 갑옷을 버린 그렌할 공작은 추종자들의 공격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빠르게 생명력을 손실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그렌할 공작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광전사다.
「상처 입을수록 강해진다.」
이는 광전사의 근간이자 강점.
“우오오오오오오오!!”
퍼어어어어어엉-!
“.....!”
템빨단원들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사자후를 토한 그렌할 공작이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추종자 하나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간 까닭이다.
생명력이 3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진 시점에서 그렌할 공작의 공격력은 극한(極限)을 찍고 있었다.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서 가장 단단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리드조차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나도 한 방에 골로 가겠군.’
당연히 불사의 힘으로 한 턴은 버티겠지만, 갑옷이나 신체의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까지 감당하진 못할 것이다.
정녕, 위대할 정도로 강하다.
만약, 바이란을 침공했던 칠공작이 리갈이 아닌 그렌할이었다면....
‘...나는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그렌할의 폭주가 거세졌다.
생명력이 20퍼센트 미만까지 떨어진 그가 오러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검과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추종자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위험한 거 아닌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전투를 지켜보던 그리드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상처 입을수록 강해진다는 광전사의 아이덴티티는 한계이자 약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조건’과 ‘제약’에 구속되는 광전사는 결코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적을 위협할수록 자신 또한 위협받는다.
“그만....! 정신 차리시오!”
그렌할 공작의 생명력이 10퍼센트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게 될 것이다.
광전사는 뇌절의 상징.
전투에 매몰돼서 스스로 사지를 향해가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상처를 입으면 더 강해져서 눈앞의 적을 말살할 수 있다.
광전사는 그런 생각으로 쉽게 위기에 처하고 전투 중 사망 빈도가 가장 높은 직업군이었다.
“제길!”
나와 내 동료들에게 신뢰를 보여준 든든한 조력자가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 꼴을, 그리드는 원치 않았다.
그는 그렌할을 돕기 위해서 앞으로 내달리다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과연 저자가 영원히 내 조력자로 남을까?
유적지 탐사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도 저자는 나의 편에 설까?
확신할 수 없다.
그렌할은 제국의 공작.
제국이 템빨국을 적으로 규정하는 이상, 그렌할의 검 끝은 나와 내 동료들에게 향할 것이다.
어쩌면 이대로 죽게 놔두는 편이 좋을.....
‘아니, 그렇지 않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다.
앞으로 유적지를 무사히 탐사하기 위해서는, 아직 그렌할이 죽어선 안 된다.
아니, 그런 계산을 떠나서 나는 그렌할이 마음에 든다.
저토록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귀족.
그의 기품에, 나는 반했다.
하니 죽게 놔두지 않는다.
결심한 그리드가 영웅왕의 자원, 투기를 검끝으로 모으기 시작할 때였다.
푸우우욱-!
추종자 하나가 발악적으로 휘두른 창 한 자루가 그렌할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렌할의 생명력이 급기야 1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구오오오오....
그렌할의 안광이 더욱 짙은 적색을 띄더니.
츠카카카카칵-!
그렌할이 자신에게 창을 찌른 추종자를 베어버림과 함께 약 5퍼센트에 육박하는 생명력을 흡수해버렸다.
“....뭐?”
두 눈이 휘둥그레진 그리드가 십만대적검의 발현을 멈췄고, 그렌할을 돕고자 그리드의 뒤를 따르던 템빨단원들 또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츠칵-!
서걱!!
콰자작!!
그렌할이 추종자를 공격할 때마다 생명력이 회복된다.
극한의 공격력은 여전히 유지된 채, 직계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극강의 흡혈능력이 발현된다.
상처 입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게 오히려 더 쉬울 정도로 넝마가 됐던 그렌할 공작의 몸이 순식간에 수복되어갔다.
상식에 어긋나는 광경이었다.
흡혈이라는 특성.
모든 광전사가 공통되게 지니고 있되 효과가 미미했기에.
광전사 중에서 그나마 위명을 떨치고 있는 하이랭커 ‘아스카’조차도 이토록 대단한 흡혈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었다.
재벌3세인 그녀는 압도적인 재력을 이용해서 템빨을 극대화 시켰고 전투 중에는 집사 블랙테디의 보좌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확보’하는 수준의 흡혈 능력을 보여주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그렌할 공작의 흡혈 능력은 차원이 달랐다.
같은 광전사지만 격이 다르다.
그의 흡혈 능력은 특성의 수준을 넘어서는 권능이었다.
콰작-!
콰자작!!
이제 넷 밖에 남지 않은 추종자들에게 최후의 일격이 꽂힌다.
뼈가 분쇄되고 뇌수를 쏟아내면서 쓰러지는 추종자들의 중심에 홀로 선 그렌할은 처음과 같이 온전한 모습이었다. 전투 중 새로 입었던 상처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주 오래 전에 입었던 상처들만이 남아있었다. 마치 그의 시간만 되돌린 것 같았다.
“.....”
“.....”
침묵이 이어졌다.
그렌할에게 경외 이상의 공포심을 느낀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내 침묵을 깬 사람은.
“....쿨럭!!”
각혈하며 주저앉는 그렌할이었다.
으으, 으으윽, 신음하며 몸을 비트는 그의 단단한 육체 위로 지워졌던 상처들이 다시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그렌할 공....?”
갑자기, 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렌할 공께서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밝히지 않는 이유는 저 후유증 때문이오.”
그렌할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새롭게 몰려오는 추종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돌아온 모르이즈가 설명해주었다.
브라함과 동화한 그리드의 실력을 목도한 이후.
그리드에게 진심어린 존경심을 느끼며 극진한 예의를 갖췄던 모르이즈이지만, 지금은 야수화한 까닭에 흉포해진 상태이기 때문인지 말투가 다소 거칠었다.
그리드는 그의 말투에 일일이 연연하지 않았다.
쫑긋 선 짐승 귀를 박박 긁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다고 생각할 뿐.
“그렌할 공은 전투 중에 입었던 피해 중 일부를 전투가 끝난 후 다시 입게 되지. 그리고 저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아.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할 수가 없소.”
“몸에 가득한 상처들의 정체는....”
“후유증의 흔적들이오. 뭐, 그렌할 공께서는 오직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만 싸워오셨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저 상처들이 훈장과 같겠지. 오늘 또 새로운 훈장을 얻은 기분일 테고.”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을 위해서 싸웠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모르이즈가 야수화를 풀었다.
털을 벗어내고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는 그리드에게 다시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그렌할 공께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부축하겠소.”
쓰러져있는 그렌할에게 다가가는 모르이즈를 그리드가 앞질러갔다.
그리고 여전히 피를 토하고 있는 그렌할에게 어깨를 내어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렌할의 가슴에는 처음엔 없었던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창에 관통 당했던 자국이다.
울컥한 그리드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고생했소, 친구.”
언젠가 다시 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 황제와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에 거역할 수가 없다.
그리드와 그렌할 서로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렌할을 친구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약점을 공개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위해서 싸워준 그를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신뢰와 호의에는 똑같은 호의와 우정으로 보답하는 것이 그리드의 방식이었다.
“....전하.”
그렌할 공작이 감격했다.
여태까지 나의 광기와 폭력을 목도한 사람들은 나를 기피하거나 두려워하기 바빴다.
한데 그리드는 아니다.
이자는 본질을 흐리지 않는다.
내가 드러낸 광기와 폭력의 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내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주었다.
그렌할 공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기뻤다.
하지만 그리드의 호의는 고작 말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소?”
“....무엇을?”
“내 동생이 성녀요.”
“.....”
“무려 친동생이요.”
“....!”
난데없이 동생 자랑을 시작한 그리드의 시선이 그렌할 공작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유난히 깊은 상처가 있었다.
영구적인 장애를 안길 정도의 깊은 상처.
그것은 제아무리 그렌할 공작이라도 훈장으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오른쪽 팔에 비해 잘 움직여지지 왼 팔을 느낄 때마다 원망을 품었을 상처이리라.
그리드는 그렌할 공작의 레벨이 창성 레이첼, 그리고 검공 리미트보다 다소 낮았던 이유가 이런 상처들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제라도 내 동생과 만나보시오. 그 아이의 치유 능력은 당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소.”
“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그렌할의 몸이 떨렸다.
그가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인사를 올리고자 그리드의 어깨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바로 그때.
“그리드으으으으!!”
어디서 지독한 주향이 풍겨온다 싶더니.
“드디어 찾았다!!”
질풍과 함께 취공 디워스가 나타났다.
“오호....?”
현장의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한 디워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리드와 마주보고 선 그렌할이 갑옷을 벗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침 죽기 직전이었군.”
광전사의 힘을 개방한 그렌할은 일시적으로나마 무적 상태에 가깝다.
평소의 그렌할은 몰라도 ‘불사왕 그렌할’은 창성 레이첼과 검공 리미트조차 감히 꺾을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디워스는 광기를 폭발시킬 그렌할의 폭력에 그리드가 죽을 모습을 상상했다.
한데 어째 영 진도가 느리다....?
‘뭐지? 설마?’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그리드와 칠공작들의 모습을 보고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디워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간악한 놈....! 그새를 못 참고 피아로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로구나!!”
“피아로....?”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그렌할과 모르이즈, 그리고 바사라 세 사람 모두 귀를 의심했다.
거대한 의문이 그들의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었다.
“디워스 공, 눈 까시게.”
“네? 그렌할 공? 잘 못 들었습니다?”
“템빨왕 전하께 눈 부라리지 말라고.”
“....???”
이미 앞서 밝힌 바 있듯이, 디워스는 칠공작 중에서는 권세가 가장 약한 편이다.
반면 그렌할은 칠공작 중에서도 수위를 논하는 권력가였다.
당황한 디워스가 일단 눈을 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