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49권 - 10화
베리드 사태가 아그너스 사태로 번졌다.
대중들은 아그너스에게 생명의 돌을 양보할 것을 촉구했고, 언론은 대중들의 태도를 납득하고 옹호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더 부추겼다.
비정상적인 흐름이었다.
생명의 돌이 베리드를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뿐더러, 대중에게는 누군가의 사유 재산을 양보하라고 요구할 권리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아그너스는 왜 표적이 됐는가.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죠. 그동안 아그너스의 PK 행각은 유명했으니까요. 사냥터를 독점하기 위해서, 자신의 퀘스트를 위해서 등 평소 아그너스는 이기적인 이유로 플레이어들을 학살해왔습니다.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무척 많았죠. 일종의 희생양이 되기에 아주 적절한 대상인 겁니다. 소위 ‘피할 수 없는 절망’을 겪게 된 대중의 불안과 공포에는 ‘해소할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했고, 아그너스라는 희생양이 희망의 주체로서 선택 된 것이죠.』
『사람들에게 생명의 돌의 효과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타인과 나누고 싶을 뿐이죠. 아그너스가 그 대상으로 적합했던 것이고요.』
대륙제일창 키리누스, 그리고 창성 레이첼과 함께 하켄 왕국으로 향하는 길.
밤이 깊어오자 잠을 청한 두 사람의 일정에 맞춰 로그아웃한 크라우젤은 불쾌감에 휩싸였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아그너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혐오감부터 들었다.
뿌린 대로 거뒀다?
헛소리다.
단지 PK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는 건 허울 좋은 핑계다.
PK는 강자와 약자 모두 필요에 따라서 이용하는 시스템인 바.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 그리고 자존감을 지키라고 있는 컨텐츠가 바로 PK이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지금 뉴스에 패널로 나와 지껄이고 있는 저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PK는 아그너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
한데 아그너스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왜?
만만하기 때문이다.
수 년 전의 아그너스는 임모탈이라는 거대 조직의 수장이었던 반면 현재의 아그너스는 외톨이니까. 누명을 뒤집어쓰고 단두대에 올랐을 정도로 입지가 약화 된 그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한때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날뛰었던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이제와 툭툭 건드려보는 것이다.
‘젤가라는 녀석은 여기까지 계산하고 아그너스를 표적으로 삼은 거겠지.’
젤가는 본질을 흐렸다.
베리드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이 극대화 된 것을 이용, 베리드를 ‘레이드’ 대상이 아닌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변질시켰다.
베리드를 레이드할 능력이 없는 ‘절대 다수’의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그에게 쉽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고, 베리드 레이드를 꿈꿨던 사람들의 열정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어느덧 베리드는 하켄 왕국 근교까지 진입하고 있었으나, 그 어떤 플레이어도 그를 저지하고자 나서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젤가가 원하는 건 생명의 돌이 아니다.’
하켄 왕국의 멸망.
바로 그것이 젤가의 바람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작금의 상황을 해석할 수 없다.
크라우젤은 확신했다.
‘녀석의 배후에 야탄교가 있군.’
야탄교의 목적은 33대악마를 강림시키고 인계를 지옥화하는 것.
그들 입장에서 베리드가 레이드 당하는 일을 원할 리 없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베리드를 도왔다가는 전 인류의 적으로 지목되고 철저히 고립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젤가 같은 허수아비를 내세우는 식으로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애초에 아그너스가 세공사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것도 야탄교에 의해서였지....’
야탄교의 이번 계략에는 베리드를 보호하는 동시에 아그너스를 척결하겠다는 목적의식이 깔려있었다.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에 여론과 언론의 반응도 이렇게 극대화될 수 있었으리라.
‘로제라....’
흑마법사 랭킹 1위이자 야탄의 종으로써 막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인물.
종종 우연히 만났을 때 그녀의 태도는 친절하고 서글서글했으나.
‘사실은 무서운 여자일 수도.’
어쨌든, 골치 아프게 됐다.
사람들이 베리드 레이드에 나서지 않게 됐으니, 크라우젤은 순전히 키리누스, 레이첼, 그리고 레이첼의 기사들하고만 베리드와 싸워야했다.
그 어떤 조력자도 없이 사투를 벌이게 생긴 것이다.
키리누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염치없지만.... 하오와 알렉산더에게 참전을 부탁해봐야겠어.’
언제라도 퇴로를 열 수 있는 전력 정도는 갖춰야한다.
판단한 크라우젤이 스마트워치의 버튼을 눌렀다.
***
“흥!”
“칫!”
“뿡이다!”
몇 주 간의 항해 끝에 간신히 유적지에 도착한 제국군.
선발대의 원군 역할로 이곳을 찾아온 그들은 서둘러야하는 입장이었다.
한 달 이상 앞서 유적지에 도착해 피로가 축적됐을 선발대와 빨리 합류해서 그들을 지원해야했으니까.
하지만 원군의 행렬은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행군 속도는 거북이마냥 느렸다.
1만의 병사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수십의 귀족들이 서로에게 불신 가득한 시선을 보낸 채 으르렁거리기 바빴으니까.
그들의 중심에는 바게트 백작으로 변장한 후로이가 있었다.
“후후훗....”
혼란과 분노가 들끓는 1만 병력의 행렬 속에서 유일하게 미소 짓고 있는 사내.
그는 자신의 고급지고 수준 높은 이간지계와 선동지계 덕분에 발생한 작금의 상황이 매우 흡족했다.
‘내가 제국의 선발대와 원군의 합류 일정을 3배 가까이 늦췄으니 이쯤 되면 큰 활약이라 자부해도 좋겠지.’
이미 앞서 유적지에 도착하신 나의 주군 그리드 전하께서는 제국군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유적지를 탐사하느라 고초를 겪으셨을 것이다.
안 그래도 강력한 무신의 추종자들에게 위협을 받는 한편 무려 3명의 칠공작들이 이끄는 제국군 본대까지 신경 쓰느라 탈모가 재발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제국의 원군까지 제때 당도했다면....’
주군께서는 더욱 더 큰 위기를 겪으셨을 테고 유적지 탐사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가.
이 최고의 충신 후로이가 제국의 원군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게끔 책략을 구사하여 주군의 유적 탐사에 큰 도움을 드렸다.
충분히 자부할만한 활약이다.
어깨가 으쓱해진 후로이가 지금쯤 어딘가에서 자신을 치하하고 계실 주군 그리드를 떠올릴 때였다.
“하.”
풀바즈 후작이 곁으로 다가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래 현기가 가득했던 후작의 눈동자는 퀭하게 죽은 지 오래였다.
눈 밑에 다크서클도 진하게 내려와 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너무 많은 고초를 겪어온 까닭이다.
평생을 신뢰해왔던 동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 그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수심이 깊어 보이시는군요.”
웃던 낯을 싹 지운 후로이가 바게트 백작을 충실히 연기했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풀바즈 후작을 걱정해주었다.
그에게 풀바즈 후작이 토로했다.
“실바 백작 놈이 또 망언을 지껄이고 다닌다는 소문일세.”
“아니, 저런? 그자가 또 어떤 개소.... 아니, 망언으로 후작님께 심려를 끼친 겁니까?”
“2년 전에 시집간 내 딸이 자기 남편과 백년해로하게 될 거라고 했다는군.”
“아, 아니? 어찌 그런 망발을....! 천하의 개자식! 그야말로 인간 말종이로군요!!”
“하아.... 그러게 말일세. 내 평생에 이토록 지독한 저주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풀바즈 후작의 딸은 41세 연상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이라는 것이다.
세도가의 숙명으로 인해, 자신의 딸을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밖에 없었던 풀바즈 후작은 늘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풀바즈 후작은 최근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는 백발의 사위가 빨리 천수를 다하고 떠나길 바랐다. 딸이 뒤늦게나마 자유를 만끽하길 기도했다.
한데 20년 동안 내게 존경을 표해왔던 실바 백작 놈이 뒤에서는 내 딸의 백년해로를 바라고 있었다.
실로 큰 충격과 배신감이 밀려와 풀바즈 후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주책이군.”
나는 자애와 도량으로 아랫사람들을 품어왔다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잘못 살았다는 말인가.
그런 회의감이 들자 눈시울이 젖은 풀바즈 후작이 황급히 눈가를 닦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에게.
“받으십시오.”
후로이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어째선지 닭똥 냄새가 나는 손수건이었지만, 풀바즈 후작은 그 호의가 고마웠다.
“바게트 백작. 내게는 이제 그대뿐일세.”
“저는 결코 후작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화에 열중하다 보니.
“사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원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밀림을 지나 나타난 산의 정상.
그곳에 자리 잡은 사원을 수색하고 돌아온 기사들이 보고해왔다.
“대규모 전투흔? 추종자들은 한 놈씩밖에 안 나오잖아?”
술병을 들이키며 배를 긁적이던 취공 디워스가 즉각 반응했다.
“추종자와의 전투가 아니었다는 뜻이네?”
뒤에서 남을 헐뜯으며 싸우는 귀족들의 한심한 작태에 썩어 들어갔던 디워스의 눈이 오래간만에 반짝였다.
술기운을 안력으로 집중시킨 그가 사원 근처의 전투흔을 직접 확인하더니 산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저 멀리, 광활하게 펼쳐진 갈대밭이 보였다.
군데군데 잘려나가거나 짓뭉개져 있는 갈대에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피가 아직 굳지 않았군. 서두르도록 하지.”
서로 헐뜯고 의심하기 바쁜 귀족들을 대신해서 디워스가 전면에 나섰다.
그는 선발대와 템빨국이 이미 조우해서 전투를 치르는 중이라고 판단했다.
도주 중인 템빨국을 선발대가 추적하는 형태일 것으로 분석했다.
‘그리드가 피아로에 대해서 지껄이면 안 된다.’
피아로를 존경했던. 그리고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있는 다른 공작들은 동요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리드가 그들의 동요를 이용해서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그 전에 빨리 선발대와 합류해서 그리드의 목을 따야한다.
“간다.”
터엉-!
디워스가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이탈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속도였다.
애초에 그는 귀족들과 기사들만을 대동할 생각인 듯했다.
‘이런!’
행군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자 초조해진 후로이가 서둘러 행렬을 쫓았다.
한편, 그리드 일행은....
“허억.... 허억.... 허억....”
갈대밭부터 급격히 상승한 유적지의 난이도.
며칠간의 사투 끝에 간신히 갈대밭을 돌파한 템빨단원들은 쉴 틈조차 없이 위기에 직면했다.
6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들이 무려 넷씩 무리지어 나타나기 시작한 여파였다.
심지어 녀석들은 ‘무조건 반격’과 ‘2회 이상 목격한 스킬을 무조건 회피’라는 무자비한 비급을 공통되게 습득하고 있었다.
어느새 30명까지 숫자가 늘어난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템빨단원들과 칠공작들은 크게 지쳤다. 이 이상의 탐사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여기서 백도를 먹기는 아깝고. 십만대적검을 연계하고 아스타로트의 힘까지 개방하면 잠시나마 퇴로를 열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붉게 점멸하는 시야.
빈사 상태에 빠진 반트너와 교대, 전면에서 탱킹 중인 그리드의 생명력도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에게는 당장의 위기를 돌파할 수단이 있었으나, 칠공작들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망설이는 그리드의 곁으로 유라가 다가와 섰다.
자신의 피부처럼 순백으로 빛나는 갑옷을 무장한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령왕을 부르겠어요.”
사실, 그녀 또한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정령왕과 계약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제국에 알려져도 좋을지, 그녀는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드와 동료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정치적인 문제를 신경 쓴답시고 동료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쏴아아아아-
유라의 주변으로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소환의 진이 그려지기 시작하자.
“잠깐....!”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라우엘이 손을 뻗었다.
정령은 대부분의 인류가 탐하는 힘.
하물며 제국의 정령에 대한 열망은 굉장할 것이다.
템빨국과 제국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령왕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위험을 자처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여, 라우엘은 유라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칠공작들이 한 발 더 빨리 나섰다.
“제가 왜 불사왕이라고 불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제국에서도 지극히 드뭅니다.”
신뢰.
그리드는 보여주지 못했던 그것을, 칠공작들이 먼저 보여줬다.
텅-!
터텅!!
그렌할이 여태껏 꽁꽁 무장해왔던 방어구를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건틀릿과 각반, 투구, 방패, 심지어 갑옷에 이르기까지.
그 중장비들이 하나씩 지면 위에 떨어질 때마다 폭음에 가까운 소음이 울린다.
천근의 무게가 담겼음이라.
이내 상처투성이의 근육질 맨몸을 드러낸 그렌할이.
쏴아아아아아....
안광을 붉게 물들였다.
광전사.
생명력이 소모될수록 극한의 공격력과 흡혈능력을 발휘하는 최강의 투사.
그것이 바로 그렌할의 실체였다.
“내가 왜 맹수왕인지 아는 사람도 적어. 왜냐면 그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죽거든.”
크릉. 크르르릉....
문득 보니,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드러낸 모르이즈의 몸은 짐승의 것처럼 거친 털로 뒤덮이고 있었다.
어쩌면 야수인간 툰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모습을, 모르이즈를 통해서 먼저 보게 된 걸지도 모른다.
이쯤 되자 일행의 시선이 바사라에게 쏠렸다.
당황한 바사라가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변신 같은 거 못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