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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07화 (902/1,794)

템빨 49권 - 9화

“베리드의 공략법은 존재합니다.”

베리드가 소환 된 장소는 제국과 너무 멀다.

제국이 개입할 여지가 적으며, 일반적인 왕국의 군사력으로는 베리드의 권능을 감당하지 못한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들이 직접 나서서 베리드를 레이드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니까 문제다.

이대로는 정말로 대륙의 절반이 쑥대밭이 될 것이었다.

수십 억 단위의 퀘스트가 영구히 소멸하고 수억 단위의 플레이어가 갈 곳을 잃게 될 예정이다.

이는 과연 S.A그룹이 원하는 사태일까?

일부 지식인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다.

S.A그룹 또한 베리드 레이드를 바라고 있으며, 베리드 공략법을 반드시 안배해놓았을 거라고 분석했다.

“33대악마는 솔로몬의 72악마를 모티브 삼았죠.”

제1위 대악마가 바알이라는 점과 벨리알과 베리드의 존재 등이 명백한 증거다.

33대악마 전부가 솔로몬의 72악마와 동일한 설정을 지닌 건 아니지만, 상당수의 대악마들이 솔로몬의 72악마와 동일하거나 살짝 변형 된 설정으로 창조됐다.

그리고 솔로몬의 72악마에서 묘사되는 베리드는 ‘마법의 반지’로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 마법의 반지만 있으면 베리드를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플레이어 개인이 대악마를 조종하는 건 밸런스 상 말이 안 되므로, 베리드를 완벽히 통제하지는 못하겠지만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명령쯤은 내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마법의 반지라는 건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거요?”

“제가 만들어야죠.”

“무려 대악마를 몰아내는 아이템을 일개 플레이어가 만들 수 있다고?”

“여러분께서 협조해주시면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는 멸망한 로테몬 왕국과 하켄 왕국의 경계.

조국을 지키겠노라 모인 하켄 왕국 소속 플레이어들 앞에서 주장하는 이, 연금술사 랭킹 1위 ‘젤가’였다.

사람들이 콧방귀 뀌었다.

“연금술과 거짓말. 베리드의 권능이 솔로몬의 72악마에서 묘사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알고 있소. 하지만 순위가 다르오, 순위가. 솔로몬의 72악마에서 베리드는 28위인 반면 Satisfy에서는 22위지. 설정에 약간의 변형이 가미됐다는 뜻이오.”

똑같은 약점을 지녔다는 확신을 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법의 반지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쩔 작정이오?”

이곳에 모인 5천 명의 플레이어는 놀러온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해온 고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의 소중한 인연과 재산을 잃지 않고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집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젤가가 사기꾼으로 보였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더군다나 반지를 만드는데 우리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뭐, 돈이라도 갖다 바쳐야하나?”

플레이어들이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젤가는 동요하지 않았다.

저들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고 상정한 범위 내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젤가가 담담하게 말해나갔다.

“아니요, 제가 여러분께 원하는 건 재물 따위가 아닙니다. 마법의 반지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는 생명의 돌. 감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궁극의 연금석이기 때문이죠.”

“....?”

생명의 돌.

굳이 연금술사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은 많다.

“...미친놈.”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젤가에게 더욱 더 노골적인 적의를 보냈다.

“이제 보니까 우리를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이 아니라 우리를 갖고 노는 미친 새끼였군. 연금술사 랭킹 1위? 그래봤자 고작 하급 연금술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놈답게 랭커로써의 자부심 따위 전혀 없구만?”

생명의 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바에 따르면, 거의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만능의 연금석이었다.

마법의 반지의 재료가 생명의 돌이라고?

마법의 반지를 만들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베리드 공략법 따위, 젤가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이다.

놈은 그저 우리를 농락한 것일 뿐.

철컥.

플레이어 중 몇 명이 무기를 뽑아 쥐기 시작했다.

괘씸한 젤가에게 단죄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젤가는 침착했다.

“몇 달 전, 미친개 아그너스가 각국의 세공사 장인들을 살해하고 다녔던 사건 알고 계시지요? 템빨단에 의해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어찌됐든 아그너스가 세공사들을 찾아다닌 건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리야?”

베리드 레이드부터 시작 된 이야기가 아그너스로 이어지다니?

뚱딴지같은 화법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플레이어들에게 젤가가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생명의 돌을 세공하기 위해서였다는군요.”

“....뭐?”

“아그너스가 생명의 돌을 소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아그너스는 현재 하켄 왕국 도처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

“물론, 천하의 아그너스를 상대로 생명의 돌을 빼앗는 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스스로 내놓게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젤가가 5천 명의 플레이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당신들께서 생명의 돌이 필요한 당위성을 세간에 알리시면 됩니다. 베리드는 20억 플레이어 모두의 위협. 세상 모든 플레이어가 아그너스에게 생명의 돌을 내놓으라 외치기 시작할 테고, 제아무리 아그너스라도 전 인류의 압박을 견디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여론을 움직이면 간단하다.

젤가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아그너스 한 사람만 양보하면 베리드를 레이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식이 알려지는 즉시 사람들은 아그너스를 몰아세우기 시작할 것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5천 명의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아주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마법의 반지가 정말로 효력을 발휘할 거라는 전제가 붙었을 경우에만 말이다.

“아그너스가 생명의 돌을 양보해준다고 쳐. 하지만 그걸로 만든 반지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쩔 거지?”

“그 경우 모든 비난과 폭력은 제가 감수하게 되겠죠. 여러분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손 안 대고 코 풀 기회이며, 설령 코가 안 풀려도 문제될 건 없다는 이야기다.

“....흐음.”

고민 끝에.

“좋아. 베리드를 몰아낼 방법을 세간에 알리고 아그너스에게 생명의 돌을 양보해달라고 요구하겠소. 단, 이후 발생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당신 혼자서 지게 될 것이오.”

“당연합니다.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제게는 여러분께 거역할 힘도 없고요.”

이후.

<위기의 하켄 왕국 플레이어들, 대악마 베리드를 퇴치하는 방법을 밝혀내다!>

<대악마 베리드의 공략법은 ‘마법의 반지’.>

<마법의 반지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는 ‘생명의 돌’이다.>

<생명의 돌, 아그너스가 소유 중인 것으로 밝혀져.>

<수천 명의 플레이어들이 서명 운동을 시작.... 아그너스에게 생명의 돌을 양보할 것을 요구.>

<아그너스,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아.>

<아그너스를 향한 사람들의 비난이 나날이 거세지는 중.>

무려 5천 명의 플레이어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여론을 움직이자 언론까지 반응했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언론사들이 베리드 공략법과 생명의 돌, 그리고 아그너스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베리드 공략법이 과연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 뿐이었고, 언론은 돌아가는 사태가 즐거울 뿐이었다. 화제성 높은 소재가 언론사들의 열정을 높여줬다.

알고 보니 공략법이 틀렸다고 해봤자 여론이나 언론이 입게 될 피해는 전무.

그들은 거침없이 아그너스를 몰아붙였다.

아그너스가 생명의 돌을 양보하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떠들어댔다.

“으으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교외.

쓸쓸한 고성에 홀로 앉은 아그너스가 덜덜 떨리는 몸을 이불로 감싸 안았다.

나는 이유 모를 죄인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사람들이 보내오는 멸시와 질타를 영문도 모른 채 감수해야한다.

“....우웨엑!!”

만인이 나를 미워한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다.

새삼 상기하게 된 현실.

아그너스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어째서 자신이 또 이런 꼴을 겪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공허한 마음처럼 텅텅 빈속을 게워내며 겁에 질렸다.

그러다가 문득.

“왜....”

의문을 품는다.

어째서 또 내가 표적이 돼야하는가?

이제 나는 약하지 않을 진데.

이유 없는 폭력에 굴복해야할 이유 따위, 추호도 없는데.

비틀.

몸을 일으킨 아그너스가 며칠 동안 멀리했던 캡슐에 다가갔다.

그의 몸은 이제 공포가 아닌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나를 핍박하고 나의 것을 빼앗아가려하는 세상 전체를 향한 분노였다.

***

“와, 진짜. 지랄 염병들하고 앉았네.”

다수라는 미명 하에 소수를 희생시키는 족속들.

‘대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어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무리를, 우리네는 살아가며 종종 목격하게 된다.

이럴 때면 절로 성악설이 떠오른다.

<생명의 돌>이라는 불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아그너스의 이름을 연호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지발은 역겨웠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불쾌감이 그를 진절머리 치게 만들었다.

“쯧.”

마장기 레이더스를 이끌고 탈영한 지발.

며칠의 여정 끝에 도착한 고향, 하켄 왕국에서 그는 불타올랐던 사명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성벽 아래 모인 수만 명의 플레이어들.

생명의 돌과 아그너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인류를 위해 희생할 것을 촉구하는 그들은 지금 도대체 어떤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 걸까.

저런 열정으로 직접 베리드를 레이드할 생각은 대체 왜 못하는 걸까.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의 곁으로.

“지발! 정말로 와주었군!”

옛 친구가 다가와 포옹해왔다.

플레티넘 백작이었다.

지발이 하켄 왕국의 귀족이었던 시절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비록 NPC이긴 하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단지 퀘스트의 조역쯤으로 인식했던 대상이지만 언젠가부터 소중한 친구가 된.

그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사실에 불안과 슬픔까지 느껴질 정도로.

“악마 놈 때문에 고향이 위기에 빠졌는데 당연히 와야지. 다들 모였어?”

“국왕전하를 알현 중인 율란 후작을 제외하고 전원 다 모였네. 이곳은 너무 소란스럽군. 자, 어서 내 저택으로 갑세.”

“음...”

플레티넘 백작과 함께 길을 걸으며, 지발은 왕국의 혼돈을 여실히 느꼈다.

무시무시한 대악마가 점차 더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젊은 부모들은 어린 자식을 지키겠노라 창 쓰는 법을 배웠고, 젊은 자식들은 늙은 부모를 지키겠노라 군복을 입었으며, 또 누군가는 주저앉은 채 그저 오열할 뿐이었다.

과연 내가 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솔직히, 지발은 자신이 없었다.

이미 앞서 멸망한 로테몬 왕국의 최후는 처참했다.

대악마 베리드는 너무나도 막강한 상대였다.

하지만 지발은 싸우고 싶었다.

자신조차 이들을 외면한다면, 이들은 정녕 한 줌의 희망도 없이 죽게 될 테니까.

‘....미치겠네.’

상황이 절망적이기 때문일까.

자꾸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진다.

나보다 더 강한 이가 나와 함께 싸워주길 바라게 된다.

한데 하필 떠오르는 인물이 그리드다.

내게 몇 번이나 좌절을 안겨준 상대.

평소에는 생각하기도 싫은 녀석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걸까?

그야 당연히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한물갔구만.”

씁쓸하게 웃는 지발.

그는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7대 길드의 수장을 자처하며 자신이야말로 지존이 될 거라고 외쳤던 시절보다 도리어 훨씬 더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할 정도로, 그리드는 특별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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