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05화 (900/1,794)

템빨 49권 - 7화

이제, 그리드의 사고(思考)는 쉽게 매몰되지 않는다.

그가 <이족의 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고도 등한시한 이유는 게으르거나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장은 신경 써봤자 정력만 낭비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내를 선택했을 뿐.

이족의 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족의 왕>

인간 외 종족을 포용함으로서 왕의 자격을 증명하였습니다.

★영구 효과

*이족에게 큰 호의를 받습니다.

*대상이 이족일 경우 호감도 상승 확률이 2배 상승합니다.

*단, 일부 호전적인 종족들은 당신의 능력을 시험할 것입니다.

★제한 효과

*칭호 효과로 ‘계약’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계약의 사용 가능 횟수는 3회입니다. (3/3)

<계약>

대상이 이족일 경우 계약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계약한 대상은 ‘각성’하여 종족 특성이 강화됩니다.

당신은 계약 대상의 종족 특성 중 일부를 습득합니다.

당신은 한 번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

단, 상대방은 언제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이때 당신이 습득했던 종족 특성은 사라집니다.

또한 계약 대상이 사망 시에도 계약은 파기되며 당신이 습득했던 종족 특성은 사라집니다.

두 경우 모두 계약 가능 횟수가 복구되지 않습니다.

효과만 놓고 봤을 때, 이 계약이라는 시스템은 무조건 긍정적이었다.

타종족의 특성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이득이었으니까.

예를 들어 마안족과 계약을 맺었다면, 그리드는 굳이 마안족 왕과의 호감도를 쌓지 않았어도 <마안>을 개방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리드는 마안족 왕에게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다. 심지어 절친한 스틱세이와도 계약하지 않았다.

그들을 신뢰하지 못해서.

그들이 혹 계약을 파기할까봐 걱정해서가 아니다.

괴로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죽게 됐을 경우를 염려했을 뿐이다.

NPC는 플레이어와 달리 필멸자이며, 그것은 천 년 단위의 수명을 지닌 하이 엘프라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기에.

어떤 사고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경우.

내가 그들을 지키지 못할 경우 계약은 언제라도 물거품 될 수 있었으므로, 그리드는 계약 대상이 반드시 플레이어인 편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분명, 합당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실천 난이도가 무척 높다는 점이 문제였다.

우선, 인간 외 종족의 플레이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다.

드워프, 오크, 엘프, 고블린 등.

캐릭터 생성 시 다양한 종족을 선택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Satisfy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 중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는 히든 퀘스트를 수행해서 도중에 종족을 바꾼 케이스밖에 없다.

그리드에게 <반신>이라는 종족을 제안했던 <선택의 기로> 같은 퀘스트 말이다.

여태껏 그리드가 만나본 이종족 플레이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설령 이종족 플레이어를 수색하더라도 문제였다.

대상이 ‘쓸모 있는’ 특성을 지닌 종족이어야 한다는 문제.

그리고 과연 그를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계약 대상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괴해버릴 경우 그리드는 계약 횟수만 소모하고 종족 특성을 잃게 된다.

그러니 꼭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동료들과의 신뢰도 몇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축적된 것이다.

이제와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까지, 그리드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족의 왕> 칭호 효과는 사용 횟수가 3번으로 제한됩니다. 정말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한다.”

오늘, 그리드는 하오의 의지를 보았다.

나를 향한 그의 호감을 여실히 느꼈다.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심지어 하오는 무려 용족이었다.

“나는 하오와 계약하겠다.”

[플레이어 ‘하오’를 계약의 대상으로 지목하셨습니다.]

[......]

[.....]

[....]

[....대상이 계약을 수락하였습니다!!]

[계약 보상으로 반(半)용족의 특성 중 하나를 랜덤으로 습득합니다!]

[....놀라운 행운이 작용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반(半)용족의 상위 특성 <용의 날개>를 얻었습니다!]

“....!?”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 그리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체통을 잃고 말았다.

수백 명의 랭커가 목숨을 잃은 현장.

다소 숙연해진 템빨단원들과 칠공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이쓰으으으!!”

만면에 미소 지은 그리드가 두 팔을 벌리고 환호했다.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끼이이이이이-

안개에 뒤덮인 채 고요히 존재하던 사원의 낡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리드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칠공작들의 이목이 자연히 사원 쪽으로 쏠렸다.

저벅. 저벅.

무명옷을 걸친 노승이 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허허, 시주의 방문은 수백 년 만이로고.”

하얗게 내려앉은 긴 눈썹의 끝을 조물거리며 중얼거린 노승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자, 들어오시지요. 무신께 참배부터 하셔야지요.”

“.....”

일행을 사원으로 안내하는 노승의 태도는 더없이 친절했다.

하지만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노승의 이름 때문이다.

노승의 이름은 ‘추종자’가 아니었다.

“뭣들 하십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벤타오>

잊을 수 없는 이름을 지닌 노승의 둥글둥글한 얼굴에 번진 인자한 미소는, 마치 광대의 짙은 화장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

아크 왕국 수도, 중앙 레베카 대신전.

쏴아아아아아-

일명 부활 포인트라고 명명되는 장소 중 하나인 그곳에 순백의 빛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규모는 점차 커졌고 서서히 인영의 형상을 갖추었다.

곧 빛이 사라졌을 때.

“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장발을 올려 묶은 남성.

고집이 느껴지는 눈매와 뾰족한 코끝이 인상적인 미남자, 하오였다.

최상위 하이랭커인 그의 입장에서 ‘사망’과 ‘부활’의 과정은 실로 오래간만에 겪는 시스템이었다.

상태창과 인벤토리를 연 그가 38퍼센트 가까이 떨어진 경험치와 내구력을 잃고 파괴 된 창을 확인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역시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다시 수복할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다.

“수련이 부족했던 탓이다.”

하오는 굳이 다른 사람을, 그리고 상황을 원망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나약함을 책망하며 더욱 정진하리라 다짐할 뿐이다.

마음을 다잡고 선 그에게 깜찍한 더블 번 헤어의 미소녀가 다가왔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침중한 음성으로 물어오는 소녀의 정체는 메이샤오.

하오의 동생이다.

“나는 괜찮다. 하지만 네가 걱정되는구나.”

어려서 일찍이 가족을 잃은 가여운 소녀.

힘든 내색하지 않고 늘 발랄하고자 노력하는 아이는 역시나 오늘도 활짝 웃어 보인다.

“저야 레벨이 낮잖아요. 금방 복구할 수 있어요.”

“그래, 이미 지난 일이다. 연연하지 않는 게 좋아.”

무가에서 태어난 하오는 어려서부터 단 하루도 창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돌처럼 단단한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가 조금 전 전투를 복기해보았다.

‘그렌할은 강했다.’

근력과 체력은 자신보다 2배 이상 높은 게 확실했고, 보유하고 있는 스킬들은 하나 같이 극치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지난 수년 동안 단련한 끝에 강화 된 <용의 비늘>을 비집고 들어온 검술의 묘리는, 현실은커녕 Satisfy에서도 쉽게 구현할 수 없는 경지를 담고 있었다.

‘절대지존.’

아무리 궁리해 봐도, 현재의 나로서는 그에게 대적할 도리가 없다.

플레이어는 결코 넘보지 못할 초고수다.

그리드는 그를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것일까.

심지어 적국의 귀족일진데.

‘다른 사람들의 예상대로 아이템을 만들어준 건가?’

아니, 이건 좀 무리가 있는 추측이다.

네임드 NPC는 단지 재물만으로 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갑부들은 네임드 NPC를 한 명씩 백으로 뒀을 것이다.

하오의 생각이 깊어지는 그때였다.

[이족의 왕, 플레이어 ‘그리드’가 반용족인 당신에게 ‘종족을 초월하는 친애의 맹세’를 나눌 것을 제안합니다.]

[모든 종족에게 왕의 자격을 증명한 ‘그리드’와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은 단 3명밖에 없습니다. ‘그리드’와 계약 시 당신의 격이 상승할 것입니다.]

[격의 상승효과로 반용족 특성이 각성하고 강화됩니다.]

[계약의 주체가 되는 ‘그리드’에게 반용족의 특성 중 일부가 개화됩니다.]

[당신은 언제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계약 파기 시 ‘그리드’는 반용족 특성을 잃게 됩니다. 단, 당신이 겪은 각성 효과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계약을 수락하시겠습니까?]

“.....”

그리드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이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나이며, 계약 파기 시 손해를 입는 사람은 내가 아닌 그리드였으니까.

이건 그리드가 나를 철저히 신뢰하지 않는 이상 제안할 수 없는 계약이었다.

‘계약 구도가 이렇게 일방적인 이유는 납득이 가는군.’

그리드가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은 총 3명.

그 3명 모두와 계약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리드는 혼자서 많은 이득을 취하게 된다.

어쩌면 불합리할 정도의 이득일 수도 있다.

최소한의 공평성으로 제약이 생긴 것이다.

‘....어찌됐든.’

하오는 어렴풋이 눈치 챘다.

그리드가 적국의 귀족들마저 매료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그가 먼저 보여주는 신뢰 때문이 아닐까?

그리드의 진실 된 마음이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맞을 것이다.

“나는, 계약하겠다.”

그리고.

‘너의 호의를 배신하지 않으마.’

맹세한다.

[이족의 왕, 플레이어 ‘그리드’의 제안을 수락하여 계약에 동의합니다.]

[격의 상승으로 반용족의 종족 특성이 각성합니다.]

[<용의 비늘>, <용의 숨결>, <용의 날개>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용의 피>가 짙어집니다. 용족화 레벨이 2에서 3으로 올랐습니다.]

[용족화했을 때 상승하는 근력, 민첩성, 생명력, 저항력 수치가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격상합니다. 화염 능력과 체력 재생 능력이 강화됩니다. 비행 능력이 보다 안정적이 됩니다.]

[단, 여전히 스킬 구사 능력은 떨어집니다.]

[당신은 ‘그리드’와 반용족의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계약이 유지되는 한, 반용족들의 호전성이 ‘그리드’를 상대로는 다소 누그러질 것입니다.]

“....!”

끓어오르는 힘에 심취해가던 하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마지막 알림창에 놀라고 있었다.

반용족들의 호전성이 누그러질 것이라니?

그 옛날, 종족 퀘스트 때문에 반용족들의 도시를 방문했던 하오는 반용족들의 광기를 보았다.

그들의 흉포한 성정은 그들을 탄생시킨 악룡 번헬리어와 닮아있어 인간과 결코 화목할 수 없는 종족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힘만큼은....’

그렌할이 아무리 강해봤자 어디까지나 인간 세계에서의 일.

오래간만에 반용족들을 떠올린 하오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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