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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04화 (899/1,794)

템빨 49권 - 6화

사하란 제국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플레이어는 많다.

아니,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사하란 제국에게 부정적일 것이다.

인종과 문화를 차별하고 억압하며 오로지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외치는 제국의 모습에 호의적일 수 있는 현대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제국의 인프라를 누리고자 제국인이 된 플레이어는 많을지 몰라도, 제국을 위해서 헌신하는 플레이어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다만, 묘한 것이.

유독 중국인 플레이어들은 사하란 제국에게 호감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화사상에 심취하여 주변 국가를 압박하는 중국의 모습과 사하란 제국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제국을 부정적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제국의 사상이 합당했고 제국의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도리어 용맹하다 보았다.

물론 모든 중국인이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제로 많은 중국인이 사하란 제국을 Satisfy의 중국이라고 표현하며 제국을 지지해왔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중국인 랭커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사하란 제국은 또 다른 차원의 중국이었으며 ‘합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제국의 귀족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데 제국 귀족 중에서도 최고라는 공작이.

“어째서 그리드를....”

소국의 왕인 그리드를 비호하고 있었다.

아니, 저건 단지 비호하는 수준이 아니다.

“저 하찮은 놈들이 전하께 검을 겨누었으니 심히 언짢으시겠군요. 마음을 다스리고 계십시오. 놈들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암벽을 매우 쉽게 등반한 샤벨 타이거와 달리.

푸릉. 푸르릉. 푸릉....

민첩함이 떨어져 힘겹게 간신히 산을 올라온 쌍두하마.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거친 숨을 토하는 녀석으로부터 내려온 그렌할 공작이 그리드를 마치 상관처럼 대했다.

누가 보면 그리드가 황제인 줄 알 것 같은 태도였다.

“도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리드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지존으로 군림한다고 하나 NPC들과 비교해서는 초라해야 정상이다.

하물며 제국의 칠공작들은 서대륙 최고의 권력자이자 최강의 실력자라는 게 학계의 정설.

칠공작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드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더군다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템빨국은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리드의 기사들이 천공왕 리갈을 사살한 바 있다.

제국과 그리드의 관계는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칠공작들은 그리드를 멸시하거나 적대해야 정상이었다.

‘근데 왜 칠공작들이 그리드에게 저렇게 깍듯한 거냐고!’

도통 이해가 안 간다.

공산당의 명령을 받고 유적지로 출정한 중국인 랭커들은 전원 잔뼈 굵은 베테랑들.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척 많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리드와 칠공작들이 보여주는 작금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추측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장찌앤이 침음했다.

“저건 세뇌 스킬이 있어도 못할 일인데....”

히든 클래스 전직자 중에 세뇌 스킬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NPC에 한정해서 적용되는 스킬로, 아주 잠시나마 NPC의 사고를 극히 일부 조작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퀘스트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NPC의 레벨이나 격이 높아질수록 세뇌 스킬의 성공률과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네임드 NPC에게는 세뇌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는 뜻. 네임드 NPC 중에서도 최고봉인 칠공작에게 세뇌 스킬이 통할 리 만무하다.

물론, 그리드가 소문의 세뇌 스킬 사용자일 가능성도 현저히 낮았다.

그리드와 칠공작들의 관계는 결코 꼼수로 형성 된 게 아니다.

중국인 랭커들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대사하란 제국의 지엄한 국법으로 너희들을 다스리겠다. 제국 공작의 앞길을 가로막고 칼을 뽑은 죄목으로 즉시 사형이다.”

너무나도 일방적이고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 그렌할 공작이 칼을 뽑아 들었다.

평소 제국을 지지해온 중국인 랭커들이었으나, 정작 자신들이 제국의 희생양이 되게 생기자 억울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판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맞아! 잠깐 길 좀 막고 칼 좀 뽑았다고 사람을 막 죽여도 되는 겁니까!!”

힘 좀 있다고 이기적이어선 안 되는 거구나.

힘없는 입장에서는 이토록 억울하고 분한 일이구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은 중국인 랭커들이 울분을 토로했지만 제국 공작들은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중국인 랭커들을 몰살시킬 기세였기에 라우엘이 급히 나섰다.

“공작님들 진정해주십시오.”

물론 라우엘 입장에서도 중국인 랭커들이 괘씸했다.

유적지를 독식하겠답시고 우리를 죽이려고 들었으니 쉽게 용서가 안 됐다.

하지만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와 만나본 라우엘은 유적지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칠공작만의 힘으로는 유적지의 모든 비급을 획득하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을 이대로 죽이느니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라우엘이 공작들을 설득했다.

그는 확신이 있었다.

이쪽에서 목숨을 살려준다고 하면, 중국인 랭커들이 순순히 협조해줄 거라고 믿었다. 나중에 비급을 얻었을 때 감히 권리를 요구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까지 이미 완료했다.

하지만 라우엘이 공작들을 설득하기도 전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에게 협조할 생각은 없다.”

한 손에는 창을, 한 손에는 쇠사슬을 꺼내 무장한 하오가 살기를 내뿜으며 외쳤다.

“우리는 끝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다!”

“미친! 뭔 개소리야!!”

중국인 랭커들이 사색이 되었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느니 템빨단과 협력해서 유적지를 탐사하는 편이 훨씬 더 좋잖아!!”

“여기서 죽으면 적해 바깥으로 추방당한다고!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잊었어?! 그나마도 운이 좋아서 항해에 성공했던 거지, 다시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중국인 랭커들이 버럭버럭 소리를 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들은 기껏 찾아온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하오의 판단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오는 입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템빨단과 협력해서 유적지를 탐사하고 비급을 확보할 경우.

중국인 랭커들이 비급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할 것임을.

지금 당장은 목숨만 보존하면 장땡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태도를 바꿀 것이다.

그런 모습을 하오는 수도 없이 봐왔다.

‘그때 난 이들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하오의 중국 내 입지는 지금도 위태롭다.

단지 그리드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인민들에게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고 공산당에서도 주의가 내려왔다.

공산당이 이번 유적지 탐사대의 리더로 하오를 지목한 것도 일종의 사상검증을 위해서였다.

중국과 템빨단이 비급의 권리를 놓고 다투기 시작할 때, 하오가 중국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중국 편에 서서 외치다 보면 그리드와 감정의 골이 깊어지겠지.’

그것만은 안 된다.

그리드는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차단한다.’

결심한 하오가 중국인 랭커들에게 소리쳤다.

“우리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강해지기 위해서다! 저들에게 굴복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게 과연 강해지는 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건 도리어 모욕이며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다!! 당신들은 주석의 분노를 살 생각인가!!”

“....!”

주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중국인 랭커들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들에게 주석은 존경의 대상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제길... 싸우다 죽는 게 낫겠군.”

랴오위가 쯧, 혀를 찼다.

이유야 어찌됐든, 우리 중국인 랭커들이 템빨단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템빨단의 수장은 다름 아닌 그리드.

바로 한국인이었기에.

‘국대전에서 한국보다 못한 성적을 거둔 게 말이 되냐고 화내셨다는 소문인데. 이제는 심지어 한국인의 개가 됐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시면 분노하실 게 뻔해.’

효율은 최악이지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싸우다 죽는다.

결심한 중국인 랭커들이 전원 전투태세를 취했다.

“.....”

돌아가는 사태를 빤히 지켜본 그리드와 극검은 하오의 의도를 눈치 챘다.

그들은 한국인답게 중국인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오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고 사람들을 선동한 건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라우엘도 뒤늦게 눈치 챈 기색이었다.

칠공작들의 시선이 라우엘에게 향했다.

“이래도 살려두라고?”

“...아니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고개를 끄덕인 그렌할과 모르이즈가 나란히 섰다.

그렌할은 방패까지 꺼내 쥐었고 모르이즈는 양손에 건틀릿을 착용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하오에게 고정돼 있었다.

펄럭-!

하오의 등을 꿰뚫고 한 쌍의 날개가 튀어올랐다.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용의 힘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저력을 보여주자.”

하오가 화염 같은 숨결을 토해내며 말하자.

“우오오오오!!”

중국인 랭커들의 기세가 승천했다.

하오를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그들이라고 해도 하오의 실력만큼은 높이 샀기에.

쩌저저저저정-!

아가리를 벌린 뱀처럼 날카롭게 쇄도한 쇠사슬이 그렌할을 덮쳤다가 방패에 가로막힌 순간.

촤르륵-!

메이샤오가 던진 천이 진동하는 방패의 모서리를 묶어버렸다.

“음!”

하오가 던진 쇠사슬에 깃든 용력에 놀랐다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천에 붙잡혀 끌려가는 방패를 놓치고 만 그렌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오 남매의 협공은 5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들의 협격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훌륭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채챙-! 채채채채채채챙!!

중국인 랭커들이 그렌할 공작을 돌파하기 위해서 맹공을 펼쳤다. 스킬이 깃든 수십 자루의 병기가 동시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중국이 미국 다음가는 Satisfy 강국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템빨단원들은 제아무리 그렌할이라도 꽤 큰 상처를 입을 거라고 보았다.

모르이즈가 날린 기습에 수십 명이 죽어나갔다고 하나, 중국인 랭커의 숫자는 여전히 150명이 넘었으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특히 하오의 기세가 매서웠다.

창끝에 용의 기운을 담고 돌진하는 그의 동작에는 그리드도 잠시 움찔할 정도로 파괴적인 힘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자신을 덮쳐오는 공격들을 무시한 그렌할이 일검을 휘두르자 반월의 검광이 뿜어져나갔고.

쿠와아아아아아아앙-!!

중국인 랭커들이 쏟아 부운 온갖 스킬은 그렌할에게 닿지도 못하고 파쇄되었다.

“....!!”

용의 비늘로 뒤덮인 하오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중국인 랭커들의 몸이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찰나에 발생한 그 압도적인 광경을 보면서, 그리드는 전율했다.

‘진짜 실력을 감추고 있었군.’

회(回)를 훨씬 더 상회하는 범위와 위력의 반격기.

그게 바로 그렌할이 선보인 검광의 정체였다.

그리드는 확신했다.

무려 53개의 폭포가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그렌할 혼자서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와 맞상대가 가능했을 거라고.

물론 이겼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렌할과 비교해서 레벨이 조금 더 높았던 창성 레이첼과 검공 리미트는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와 동급이려나?’

그리드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이토록 강한 칠공작들과 추종자조차도 양반 가람에게는 한 수 접어둬야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대륙에서도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놈을 어떻게든 처리해야할 텐데, 도대체 무슨 수로 감당해야할지 감도 안 잡혔다.

‘나도 계속 강해지고 있는데 왜 계속 초라한 느낌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NPC의 자연 성장 시스템은 사기다.

플레이어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다.

플레이어는 영원히 NPC를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인가?

꾸욱!

주먹을 불끈 말아 쥔 그리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퍼펑-!

콰콰콰콰쾅!!

전투가 심화되고 있었다.

십공신 전원이 나서도 승부를 장담 못할 중국인 랭커 군단이 그렌할과 모르이즈 단 두 사람의 파괴력을 감당 못하고 죽어나갔다.

그나마 꿋꿋이 버티는 사람은 하오 한 명뿐.

하지만 그마저도 진즉에 왼 팔을 잃었으며 몸 곳곳의 비늘이 떨어져나간 상태다.

“우오오오오오!!”

푸욱-!

부러진 창 대신 칼날 같은 손톱을 뻗은 하오의 발악적인 공격이 그렌할의 가슴에 꽂혔다.

“큭....?!”

그렌할이 신음했고, 모르이즈와 바사라가 크게 놀랐다.

그리드도 경악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는 NPC를 넘을 수 없다는 절망이, 지금 이 순간의 하오를 보자 언젠가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했다.

자신의 성과에 만족한 듯 미소 지은 하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꽂혔다.

“큰 신세를 졌다.”

“나야말로. 너의 마음, 잘 받았어.”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걱-!

그렌할의 검이 하오의 목 위로 떨어졌다.

순간.

[<이족의 왕> 칭호 효과를 발동합니다!]

[<이족의 왕> 칭호 효과는 사용 횟수가 3번으로 제한됩니다. 정말로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리드가 마안족 세력을 흡수한 대가로 얻었던 칭호의 효과를 최초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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